2021년 11월16일(현지시각)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한국 정부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중재 2일 차 심리에서 한국 정부 측 대리인을 맡은 로펌 ‘프레시필즈 브룩하우스 데린저’의 변호인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 정부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에게 약 1300억원을 물어줘야 한다는 ‘투자자-국가 분쟁해결절차’(ISDS)의 지난 20일 판정은 한국 정부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규정된 ‘최소대우기준’을 위반했다는 판단 때문인 것으로 드러났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건에서 보여준 박근혜 정부의 행태가 ‘국제 사회에서 통용되는 최저선’에 미치지 못했다는 뜻이다.
23일 법무부가 발표한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 판정 선고’ 자료를 보면, 이번 판정은 보건복지부 등이 국민연금의 합병 표결에 개입한 행위를 국가의 ‘조치’로 보고, 그 조치가 한-미 에프티에이 협정상 ‘최소기준 대우 의무’를 위반했다는 판단에 따라 이뤄졌다.
우선, 중재판정부는 보건복지부 관계자 등이 국민연금의 합병 표결에 개입한 행위는 (한-미 에프티에이) 협정상 국가 책임의 근거가 되는 ‘조치’에 해당한다고 봤다. 국민연금공단(국민연금)은 사실상 국가기관이므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한국 정부에 귀속된다는 논리다.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주주로서의 순수한 상업적 행위에 불과해 국가의 ‘조치’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한국 정부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미 에프티에이 제11.5조는 ‘공정하고 공평한 대우와 충분한 보호, 안전을 포함한 국제관습법상 외국인에게 인정되는 대우’를 최소기준대우로 규정한다. 박근혜 정부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건에서 삼성물산 최대 주주였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한 압력을 넣은 것은 국제관습법의 최소기준에 어긋난다는 게 중재판정부의 판단이다.
‘박근혜 정부의 삼성물산 합병 개입’을 인정한 대법원 판례 등이 근거로 인용됐다. 2019년 8월 대법원은 국정농단 사건 판결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이 ‘묵시적 청탁’을 받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승계를 위해 삼성물산 합병에 개입했다고 밝혔다.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기금운용본부 관계자들에게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건에 찬성하라는 내용의 지시를 내리는 등 기금운용 독립성이 보장되는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에 부당하게 개입한 혐의(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등)로, 홍완선 전 국민연금기금운용본부장은 국민연금의 손해를 막기 위해 노력할 의무가 있음에도 복지부의 지시에 따라 투자위원회 등에서 합병 찬성을 하고 국민연금에 재산상 손해를 야기한 혐의(업무상 배임)로 각각 징역 2년 6월을 확정받았다.
다만 손해액 산정 기준은 한국 정부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엘리엇 쪽은 본건 합병이 부결됐을 경우 실현됐을 것으로 예상하는 삼성물산 주식의 가치를 기준으로 손해액 산정을 요구했지만, 중재판정부는 한국 정부의 주장대로 삼성물산의 실제 주가를 기준으로 삼았다.
한국 정부가 지급하는 법률비용이 엘리엇이 한국 정부에 지급하는 액수보다 8배 이상 많은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법무부는 “한국 정부와 엘리엇 사이에 판정문 공개 여부가 합의되지 않았다”며 판정문을 공개하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절차의 심각한 문제 등을 이유로 영국 법원에 이번 중재 결정을 취소해달라고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선고일로부터 28일 이내(7월 19일까지)에 이뤄져야 한다. 법무부는 “국민의 세금이 불필요하게 지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정부 대리 로펌 및 전문가들과 함께 판정 내용을 면밀히 분석하고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이재호 기자
ph@hani.co.kr 이지혜 기자
godot@hani.co.kr 전광준 기자 ligh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