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방공호에 무릎이 굽혀진 채 매장된 유해. 28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충남 아산 부역혐의 희생사건’ 유해발굴 현장을 공개했다. 사진 진실화해위 제공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한국전쟁 당시 집단학살된 ‘아산 부역혐의 희생사건’ 희생자 유해 40여구를 발굴했다. 좌익 부역 혐의로 학살돼 묻힌 이들의 유해가 73년 만에 세상에 나오게 됐다.
진실화해위는 충남 아산시 배방읍 공수리 성재산 방공호 유해발굴 현장을 28일 오전 언론에 공개했다. 발굴지는 1950년 10월 좌익 부역 혐의 관련자와 그 가족들을 매일 밤 40∼50명씩 트럭에 실어 성재산 일대와 온양천변에서 학살한 다음 주검을 유기한 곳이다. 진실화해위는 “1951년 1·4후퇴 당시엔 도민증을 발급해 준다며 배방면사무소 옆 곡물창고 등에 좌익 부역 혐의를 받는 이들과 가족을 모두 구금한 뒤 한 집에 남자아이 1명만 제외하고 수백명을 집단학살한 지역”이라고도 설명했다.
성재산 방공호에서 드러난 유해발굴 전체 모습. 사진 진실화해위 제공
진실화해위는 이번 조사로 폭 3m, 길이 14m의 방공호를 따라 최소 40구의 유해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대부분 남성으로 2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으로 추정된 희생자들은 무릎이 구부러진 채 엘(L)자 자세를 하고 있었다. 진실화해위는 “학살당한 뒤 좁은 방공호에 바로 매장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머리 위엔 녹슨 탄피가 얹혀 있거나 군용전화선인 ‘삐삐선’이 손목에 감긴 유골도 있었다. 현장에선 학살 도구로 추정되는 에이원(A1) 소총 탄피 57개와 소총 탄두 3개, 카빈 탄피 15개, 99식 소총(일제강점기 일본군 사용) 탄피 등도 다량 발굴됐다. 다수의 단추와 벨트 9개, 신발 39개 등 유품도 있었다. 진실화해위는 오는 4월 중순까지 수습 작업을 진행해 인근 염치읍 백압리 현장에서도 발굴을 이어갈 계획이다.
이번 유해발굴은 한국전쟁 때 일어난 부역혐의 희생사건과 관련해 국가 차원에서 처음 나섰다는 의미도 있다. 많은 희생자가 가족 단위로 살해돼 유족이 없는 경우가 많아 유해 수습도 거의 이뤄지지 못했다. 한 마을에 가해자와 피해자의 자손이 사는 일도 많아 유해 발굴까진 쉽지 않은 상황도 있었다. 이에 국가기관이 아닌 지자체나 시민사회단체가 주로 발굴에 나섰고, 아산시는 지난 2018년 자체 사업을 통해 유해 208구를 수습한 바 있다.
아산 부역혐의 사건은 지난 2009년 5월 1기 진실화해위가 진실규명해 ‘반인권적인 국가범죄’로 인정한 사건이다. 1950년 9∼11월 온양경찰서 소속 경찰과 치안대가 지역 주민들이 인민군 점령 당시 부역을 했다고 몰아 집단학살한 사건이다. 당시 희생자 77명의 신원이 확인됐고, 희생자는 800여명으로 추정됐다.
장예지 기자
penj@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