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택 1천139채를 보유하다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고 사망한 일명 ‘빌라왕' 김아무개씨 사건 피해 임차인들이 지난해 12월27일 오후 세종시 정부세종청사 국토교통부 앞에서 피해 상황을 호소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2020년 말, 직장인 배소현(27)씨는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보증금 2억5400만원에 전셋집을 마련했다. 알고보니 그의 임대인은 빌라 1139채를 소유한 ‘빌라왕’ 김아무개씨였다. 김씨는 지난해 10월 심장마비로 숨진 채 발견됐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허그) 전세보증금 보험에 가입한 배씨는 ‘깡통전세’ 피해는 입지 않을 것이라 낙관했지만, 보증금을 받아내는 과정은 험난했다. 숨진 김씨의 상속인 이름으로 등기가 넘어가야 허그에 반환 절차를 밟을 수 있는데, 상속인이 상속 의사를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배씨는 빌라왕 김씨의 상속인이 물어야 할 취득세 600만원을 대신 납부하면서 상속인의 소유권 이전등기를 대신 처리하는 ‘대위상속등기’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배씨처럼 보증금 보험에 가입하고도 반환 절차에 어려움을 겪는 전세사기 피해자들을 돕기 위해 대법원이 관련 절차를 간소화하기로 했다. 전국 각지에서 ‘빌라왕’ 사건이 잇따라 전세 사기 피해자가 속출하고 있는데, 복잡한 법절차 때문에 보증보험에 가입하고도 신속하게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
대법원은 먼저 임대인 사망 시 임차인이 대위상속등기를 하지 않아도 임차권등기를 할 수 있도록 절차를 개선했다고 17일 밝혔다. 임차인이 보증금을 받으려면 임차권을 등기부에 기재해 보증금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공시해야 하는데, 임대인 사망으로 인한 소유권 변동이 등기에 반영되지 않으면 임차권등기도 곤란한 실정이었다. 수백채 이상의 빌라를 무자력 인수한 빌라왕의 상속인들이 주택 상속을 주저하는 사이, 수백명의 임차인들은 보증금을 날리지 않을까 노심초사해야 했던 셈이다.
대법원이 절차를 간소화하면서 앞으로는 임차인이 빌라왕의 상속인을 위한 대위상속등기까지 할 필요는 없게 됐다. 다만 숨진 임대인의 가족관계증명서 등 사망 사실과 상속인을 알 수 있는 서류를 첨부해 임차권등기명령을 신청하면 된다.
임차권등기의 신속한 처리를 위해 임차권등기명령 송달 절차도 간소화됐다. 지금까지 법원은 임대인 주소지로 보냈다가 송달되지 않는 경우 재송달 과정을 거쳐, 공시송달 등으로 송달이 됐다고 간주하는 방식을 활용했는데, 재송달 과정을 생략할 수 있도록 예규를 개정한 것이다.
대법원은 “전세 사기 피해자가 신속하게 보증금을 반환받을 수 있도록 대위상속등기 절차를 생략하도록 하고 임차권등기명령 송달절차를 간소화했다”며 “법적 절차를 거치는 시간이 최소 한달 이상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다만 법원의 이런 절차 개선은 이전에 먼저 대위상속등기를 진행한 전세사기 피해자들에게 소급적용되지 않는다. 배씨는 “피해자들이 각각 납부한 금액 600만원은 숨진 집주인의 상속인인 부모에게 소송을 통해 다시 받아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신민정 기자
shin@hani.co.kr 서혜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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