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예순살 윤정민은 공장을 떠난다. 스물한살 최예린은 공장을 떠났다. 떠나며 질문을 남겼다. 왜 한국은 소수의 인재만이 아닌, 다수 노동자가 주인공인 성공을 꿈꾸지 못하는가. <한겨레>는 세 차례에 걸쳐 평범한 노동자의 숙련과 가치를 놓친 혁신과 경제 성장이 개인과 한국 사회에 남긴 불안과 경고를 전한다.
공장 노동자로 취업했던 2001년 생 김수혁(가명)씨(왼쪽)와 2002년생 최예린씨. 강창광 선임기자, 김혜윤 기자 chang@hani.co.kr
특성화고 졸업, 자격증 있음, 일에 대한 열정 또한 있음. 2002년생 최예린과 2001년생 김수혁(가명)은 2021년 각자의 첫 일터에 들어섰다. 수혁은 현대기아차의 4차 협력사에, 예린은 스마트폰에 들어갈 인쇄회로기판(PCB)을 도금하는 공장에 취직했다.
둘의 학력·나이·업종·직업은 1980년대 후반 민주노조를 만들고, 초기 사회보장제도의 대상이었으며, 중산층을 꿈꿨던
베이비붐 세대 생산직 노동자 윤정민과 비슷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 제조업이 국내총생산(GDP)의 25~30%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는 것 또한 같다. 심지어 수혁과 예린은 인구 감소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출생아 수 40만명 시대에 태어난 ‘귀한’ 아이들이다. 달라진 것, 이상한 건 시대뿐이다. “최소한의 노동권이요? 그거 다 개뿔이에요.” 예린이 말했다. 한국 경제를 이끌어온 제조업의 효율적인 생산 구조 한편에서 이들은 잠시 머물다, 도망쳤다.
수혁은 기계가 좋았다. 어렸을 때부터. “과학자 같은 꿈도 꾸다가 현실적으로 생각하니 기술을 익히면 되겠다 싶었어요.” 수혁은 이른 나이에 취업이 가능하고 대학 입학에도 수월할 수 있다는 말에 특성화고 진학을 결정했다. 중학교 시절 비슷한 생각을 지닌 같은 반 친구들은 9명으로, 3분의 1 정도였다.
당연히 기계과를 택했다. 철 깎고 구부리는 게 재밌었다. 3학년 2학기, 현장실습생 신분으로 시작한 첫 직장에도 기계 30대가 즐비했다. 금속을 깎고 가공하는 자동선반·밀링 기계다. 좋아했던 기계와의 불화는 이전까지 생각해보지 못했다.
손이 많이 가는 기계였다. 기계는 끊임없이 ‘칩’이라고 부르는 기름 먹은 찌꺼기를 토해냈다. 기계를 식히고 원활히 돌리기 위해 틈나는 대로 절삭유도 채워줘야 했다. 쉴 새 없이 기름을 먹이고, 찌꺼기가 가득 찬 ‘칩받이’를 마대 자루에 부어 나르는 일이 수혁의 업무였다. 기계의 양육자, 실은 보조자였다.
2021년 기준 노동자 10만명당 1천대, 세계 어느 나라에 견줘도 한국의 산업용 로봇 밀도는 압도적이다.
범용 제품을 빠르게 만들어내는 데 유리한 대신 다수 노동자의 자율성을 소외시키는 한국 특유의 기계화·자동화는 이제 소규모 하청 공장에도 널리 퍼져 있다.
기계 사이에서 수혁 같은 생산직 노동자의 역할은 많지 않다. 정준호 강원대 교수는 “대기업이든 하청기업이든 매뉴얼에 따라서만 움직이거나 기계를 관리하는 저숙련 반복 노동을 맡게 되었고 대체 가능한 노동자가 되었다. 그렇다고 노동 강도가 약해진 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많은 투자 비용이 들었기에 기계는 계속해서 돌아가야 했고, 누군가 옆에서 그런 기계를 관리해야 했다. 수혁에게 맡겨진 역할이다.
공장의 주인공은 뒤바뀌었다. 열심히 금속을 깎아대는 기계를 보조하며 수혁의 손과 발에는 금속 찌꺼기가 박혔다. 가장 큰 골칫거리는 황동 찌꺼기다. 장갑을 뚫고 양말 속을 파고들어, 손가락과 발바닥에 박혔다. “황동 칩은 길게 이어져서 안 나오고 끊어져서 뾰족뾰족하게 나와요. 이게 아주 미세해서 박히면 따갑기는 한데 눈으로도 잘 안 보여요.”
현대 기아차의 4차협력사에서 일했던 김수혁(가명)씨가 지난 2일 저녁 경기도 안산스마트허브전망대에서 자신의 일터인 반월 국가산업단지를 내려다보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장갑이 간절했다. “하루에 한개씩 받은 흰 목장갑은 절삭유가 묻으면 삭아서 잘 끊어지거든요. 그래서 처음에 장갑을 더 달라고 했다가 안 줘서 나중에는 포기했어요.” 손톱깎이나 핀셋으로 손가락과 발바닥에 박힌 황동 찌꺼기를 뽑아내며 고된 하루를 마쳤다. 현장 부장이 말했다. “이 일에서 (매출) 손해가 안 나려면 (생산직 노동자가) 공장에 아침 일찍 나오고 밤늦게 퇴근하면서 기계를 점검하고 돌려야 해.
다른 기술직이나 사무직을 찾아봐.” 기계에 맞춰 돌아가는 공장의 풍경을 50대 노동자는 통달했다.
공장 기계 옆에 붙어 비슷한 일을 반복하는 수혁과 친구들은 노동의 의미를 찾기 어렵다. 특성화고 졸업생 모임 ‘마니또’가 최근 3년(2020~2022년) 동안 공단에 취직한 안산·시흥지역 특성화고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벌인 설문조사에서 조사 대상 98명 중 67명(68%)이 ‘현재 업무를 그만두고 싶다’고 답했다.
예린이 현장실습생 신분으로 처음 도금공장에 들어섰을 때
신뢰감을 느낀 건 냄새 때문이었다. ‘도금공장은 냄새나고 더럽다’는 선입관과 달리 깔끔한 외관을 유지하고 있었다. 위험물 기능사와 환경기능사 자격증을 딴 그는 유해화학물질 안전관리자로 취직했다.
예린은 ‘사무직’이었지만, “기초부터 익혀야 한다”는 담당 부장의 지시에 현장으로 갔다. 다만, 도금 용액에 어떤 화학물질이 들어가 있는지 모른 채 맨손을 담가야 했다. 누구도 이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다. 주변 외국인과 중장년 현장직 노동자 스무명이 장갑을 끼고 있어 “장갑 있어요?” 물었지만, 부장은 무시했다.
도금조(도금 용액이 담긴 용기) 주변에 황산·질산 등 강산이 표기된 통이 놓여 있었다. 도금 용액에 맨손을 담그며 작업을 시작한 지 며칠이 지나자 손에서 진물이 나고 피부가 벗겨졌다. “손톱이 말 그대로 파이게 녹거나 뚫려서 피가 난 적도 많아요. 산이 튀면 그 방울 그대로 (손톱 위에) 동그랗게 구멍이 나 피가 나요.” 예린은 월 160만원을 받았다.
깔끔했던 외관에도 비밀이 있었다. “그날 냄새가 덜 나는 금도금만 해서 처음에는 환경 검사 나오나 싶으셨대요. 제가 들어오고 나서야 새로운 애 뽑는데 안 좋아 보이면 안 들어온다고 그런 걸 알았대요.” 작업을 멈추고 공장을 단장할 정도로 예린은 필요한 노동자였다.
청년이 제조업 생산직을 꺼리는 분위기는 지난해 특히 두드러졌다. 2022년 상반기 기준, 제조업의 부족 인원은 한해 전보다 4만6천명 늘어 17만6천명에 이르렀다. 전 산업 미충원 인원 대부분(94.7%)은 300인 미만 사업체에 집중됐다. 채우지 못한 노동자는 대개 고졸 수준 또는 전문대졸 수준의 업무 숙련도가 필요한 일(56.9%)이다.
왜 청년이 공장을 찾지 않는지, 공장도 알고 있다. 인력을 채우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가장 많은 응답은 ‘임금수준 등 근로조건이 구직자의 기대와 맞지 않기 때문’(29.1%)이었고, ‘구직자가 기피하는 직종이기 때문’(17.9%)이 뒤를 이었다.(고용노동부 2022 상반기 직종별 사업체 노동력 조사 결과)
수혁도 사람 귀한 회사에서 사실상 ‘사기 취업’을 당했다고 여겼다. 담당 상사는 면접에서 “병역특례도 해주고 원하면 대학을 다니면서 일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취업 뒤 “병역특례를 시켜달라”는 요구에 번번이 침묵했다. 병역특례 기간이 끝남과 동시에 청년들은 퇴사하기 때문에 회사는 병역특례 시작 시점을 최대한 미루려 한다.
“만약에 그게(병역특례) 없으면 젊은 사람들이 가는 공장은 거의 없을 거예요.” 수혁은 170만원을 받았다. 밤 10시까지 야근을 하는 일도 잦았다. 야근은 원청이 심사를 나오기 전날 집중됐다. “에스큐(현대기아자동차 협력업체 품질인증제도) 심사 나온다 그러면 야근하는 거예요.” 원청과의 관계가 아니면 유지되기 어려운 회사, 4차 벤더의 막내 직원인 수혁은 거대한 원하청 구조의 가장 밑에 있었다.
장갑을 얻기 위해, 병역특례 약속을 요구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노동자의 권익, 안전을 위해 연대하는 조직이
예린과 수혁이 일했던 공장에는 없었다. 2020년 기준 30인 미만 사업체의 노동조합 조직률은 0.2%에 그친다. 예린은 “나 혼자 외쳐봐야 아무것도 안 되는 느낌을 받아서 노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노동조합의 존재를 본 적이 없었다. 수혁은 “제가 먹고살기에도 바쁘다”고 했다.
스마트폰에 들어갈 인쇄회로기판(PCB)을 도금하는 공장에서 일했던 최예린씨가 지난해 12월28일 오전 경기도 안산 반월국가산업단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그래도 나름의 방법으로, 누군가를 위해 저항했다. 예린과 친구들은 다녔던 회사를 “별점 리뷰하듯” 평가해 선생님에게 전달했다. 공장들은 시도 때도 없이 학교로 연락해 인력 지원을 요청하기 때문에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블랙리스트’를 만들 필요가 있었다. 예린은 선생님에게 “절대 사람을 보내지 말아달라”며 자신이 겪은 일화를 전했다.
공장의 현실을 마주한 청년은 저마다 “전공과 다른 일을 준다”, “차별을 받고 있다”, “병역특례라 무시한다”고 토로했다. 학교는 졸업한 학생들의 신고를 접수하고 나서야 문제를 인지하곤 했다. “제가 퇴사한 뒤 학교가 더는 그 회사로 학생을 안 보내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예린이 안도했다.
가장 적극적인 저항은 공장을 떠나는 것이다. 예린이 퇴사 의사를 밝히자, 상사는 폭언과 애원을 오갔다. “출근하지 마라. 퇴직금을 주지 않겠다”, “공고 출신이라 머리가 안 돌아가나”라고 말하다가, 어느 날에는 “너 같은 인재를 또 어디서 구하냐”, “함께 해온 작업은 마무리해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예린은 흔들리지 않았다. “경력 있는 분들을 시키면 일이야 수월하겠지만 연령대가 높아지면 (회사 운영이) 어려우니까요. 젊은 사람은 급여를 적게 줄 수 있고요.”
수혁은 ‘입사와 동시에 병역특례를 시켜주겠다’는 확답을 받고 두번째 직장에 다니고 있다. 새 회사에서 배우고 있는 용접 자체는 “재미있고 계속하고 싶은 일”이다. 다만 여기, 한국에 계속 머물 생각은 없다. “몸도 힘들고 처우도 안 좋고 ‘나 공장 다녀’ 이러면 인식도 안 좋잖아요. 그래서 외국으로 가고 싶어요. 호주나 캐나다나 뉴질랜드쯤? 아직 많이 생각은 안 해봤지만.”
인구 감소 시대의 아이들, 예린과 수혁은 저마다 공장에서, 한국에서 떠날 계획을 세웠다. 귀하지만 귀하게 대하지 않는 모순 앞에 애원하고 협박해도 별수 없다.
안산/장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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