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 조사 보고서 집필에 참여했던 전치형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가 지난 26일 한겨레신문사에서 이태원 참사, 재난 조사에서 과학기술학의 의미와 쓸모 등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재난이 일어나면 우리는 대체로 ‘인재’라는 평가를 내린다. 사람의 잘못에서 비롯됐다는 판단은 사람 하기에 따라 막을 수 있었다는 판단이기도 하다. 어떤 재난에도 사람의 크고 작은 잘못이 있기 마련이다. 시스템의 결함이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라 해도 그 시스템을 사람이 만들었다는 점에서 역시 인재다. 재난 조사의 대상에 사람의 잘못뿐 아니라 시스템의 결함 같은 다른 요인들을 포함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과학기술과 얽혀 있는 시스템의 문제를 찾아내고, 나아가 그것이 사람의 활동과 연결된 고리를 규명해 매뉴얼화된 해법까지 제시하는 일은 대단히 방대하고 복잡하다. 데이터의 신뢰도와 해석의 타당성을 확보하는 데도 수많은 난제가 숨어 있다. 이 모든 과정을 어렵사리 거쳤다 해도 사회적 합의와 학습에 이르는 것은 또 다른 과제다. 이 모든 것이 재난 조사에 ‘과학기술학’을 절실히 요청하는 이유다.
과학기술학은 과학기술 및 이를 이용한 시스템도 본디 사람의 일이라는 사고를 바탕에 둔 학문이다. 자연재해와 사회적 재난의 이분법을 넘어서, 사람과 과학기술이 재난에 개입한 복잡한 맥락을 짚는 데 무엇보다 유용하다. 이태원 참사 한 달을 앞둔 지난 26일, 과학기술학자인 전치형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를 만났다. 전 교수는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두 차례 조사 과정에 깊이 참여한 바 있다.
―‘과학기술학’이라는 학문 분야가 다소 낯섭니다.
“과학기술을 연구와 분석 대상으로 삼는 학문인데요. 과학기술을 직접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과 과정, 사회적인 맥락을 역사학, 사회학, 인류학, 철학의 방법론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학 지식이든 기술 시스템이든, 한 사회가 그것을 만들고 사용하는 방식에 대해 연구하는 겁니다. 정부나 산업계가 과학기술의 결과물에 대한 활용에 관심이 많다면, 과학기술학은 무엇보다 과학기술의 과정을 중시합니다. 그것은 곧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왜, 어떻게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기도 합니다.
―육하원칙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누가’는 과학과 기술을 할 자격이 누구에게 있느냐, 또 그 결과가 누구에게 영향을 미치느냐 같은 것이죠. 또한 그것은 한국이냐 미국이냐, 어느 시대냐도 관련이 있고, 나아가 누구의 돈을 가지고 무엇을 얻기 위해 어떤 제도와 환경을 활용하느냐와도 닿아 있습니다. 과학기술이 사회적·정치적·경제적 맥락 속에서 이뤄지는 활동이라는 점에 주목하는 겁니다. 과거 황우석 사태를 보면, 과학이 민족주의나 개발 담론 등과 긴밀하게 연결돼 나타난 사회적 현상이라는 측면이 있지 않습니까. 누가, 어떻게, 왜 같은 과학기술의 과정을 들여다봐야 하는 필요성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언제부터 어떤 배경 속에서 과학기술학이 시작된 겁니까?
“시작점은 학자마다 다르게 잡을 수 있지만, 1962년 토머스 쿤이 <과학 혁명의 구조>를 발표한 것이 과학기술학의 중요한 초기 연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때 과학 연구의 속성, 과학의 역사, 또 과학 이론의 전환을 이해하는 전기가 마련됐죠. 1960~70년대를 거치며 서구에서 과학기술에 의한 환경 문제, 과학기술의 군사적 이용 같은 것과 연결된 비판적인 흐름과 결합하게 되고요. 그 뒤로 페미니즘, 장애학을 비롯한 소수자 이슈와 과학 사이의 관계를 다루면서 과학기술학 연구의 폭이 더 넓어졌습니다.”
―그런 흐름이 나타난 배경이 있을 텐데요.
“한 사회가 돌아가는 데 과학 지식과 기술 또는 이를 이용한 기반시설 등의 역할과 복잡성이 커지면서 사회 현상이나 사회적인 사건들을 과학과 기술적인 요소들과 함께 이해할 수밖에 없게 된 거죠.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어떤 사안이든 단일한 학문 분야와 방법론, 연구 도구만으로는 논의하고 대응할 수 없습니다. 과학기술학은 가능한 모든 관점과 방법론, 전문성을 끌어모으기 위해 고민합니다.”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앞둔 지난 4월10일 전남 목포신항에 거치된 세월호를 둘러보는 유가족과 추모객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과학기술학 연구자로서 재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저는 스스로 재난 연구자라고 부르기를 매우 주저합니다. 다만 재난과 관련해 조금이라도 글을 쓰고 활동을 하게 된 건 세월호 참사 이후입니다. 사실 참사 직후에는 세월호가 과학기술학적인 주제라고 선명하게 인식하지도 못했습니다.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거대하고 복잡하고 무력해지는 사건이었으니까요. 어떻게든 학생들을 상대로 가르치고 대화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자료를 모으고 강의 방식을 구상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2015년 이후에 세월호특조위, 선체조사위가 시작되면서 차츰 인식이 구체화됐습니다. 그 뒤 선체조사위와 사회적참사위 보고서 필진으로 참여하면서 재난 조사 단계에 대해 과학기술학적으로 많은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과학기술학이 재난과 만나는 지점은 어디일까요?
“재난 조사의 과정이 결국 지식 생산의 과정이기 때문에 과학 지식을 생산하는 과정과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과학 지식을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생산하고, 어떻게 공인받는가 하는 문제를 과학기술학이 나름 잘 정립해왔거든요. 재난 조사도 견고한 데이터들을 바탕으로 팩트를 정리하고 해석한 다음 사회적으로 공인받고 수정하고 사회적인 학습이 이뤄져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지 않습니까.”
―재난 대응에서 과거보다 과학기술학이 중요해졌다고 볼 수 있을까요?
“그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겁니다. 현대사회는 재난을 겪고 뒷감당을 하는 데 상당히 많은 자원이 들어가고 있어요. 평온한 상태가 오히려 예외일 수 있다는, 조금 극단적인 인식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재난을 빨리 처리하고 평온한 상태로 서둘러 돌아가려고 무리하지 않고, 시간을 두고 정성을 들여 대응하고 조사하고 애도하는 게 이른바 정상 상태에 기여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재난과 과학기술 모두를 더욱 길고 넓은 과정으로 여기는 과학기술학의 관점도 도움이 될 겁니다.”
―현대적 재난에서 가장 대표적인 걸 딱 하나만 꼽는다면?
“제 연구 분야는 아니지만, 기후위기를 꼽아야겠지요. 세월호든 이태원이든 우리가 굉장히 격렬하게 경험했던 재난과는 다른 양상으로 보이지만, 두 참사가 제기하는 문제도 결국 공동체를 충격에 빠뜨리고 생명을 앗아가고 기존 시스템을 붕괴시켰다는 점에서 보면 그것의 가장 큰 버전은 기후위기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현대적 재난은 현대 과학기술의 책임이 크지 않을까요?
“무관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기후위기를 비롯한 여러 재난에 대해 지식을 만들어내고 재난을 감당할 수 있는 역량 또한 과학기술에서 상당 부분 오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재난 대응이 이해와 조사와 그것을 통한 실천으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할 때, 그 과정에도 과학이나 기술이 계속해서 개입하고 기여해야 합니다. 다만 이때 과학기술은 사회적 합의와 정치적 판단의 과정에 잘 녹아들어야 합니다.”
지난 7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 앞에 시민들이 적은 추모의 글귀들이 붙어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한국만의 재난 대응의 특성이나 한계가 있을까요?
“왜 많은 사람이 이태원 참사를 세월호 참사의 반복이라고 느꼈을까요. 희생자가 발생한 과정은 다르지만, 그 직후에 벌어진 여러 과정에서 반복을 보는 것이 아닐까요. 참사가 발생하면 내가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살아도 괜찮은가,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그런데 가장 높은 정치적 층위에서 이런 질문을 대하는 데 대단히 미숙하다고 할까요. 반드시 참사의 진상을 규명하고 잘못을 시정하겠다고 실천의 의지를 내보여야 그나마 신뢰가 조금이라도 회복될 텐데, 그렇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특히, 거기에 과학자, 공학자, 법률가, 사회과학자 등의 전문성을 최대한 동원해서, 6개월이면 6개월, 1년이면 1년 동안 제한된 시간 안에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최대한 노력하고, 이것을 정리해서 보고드리겠다는 구체성이 더해져야 하는데, 그것도 없었고요.”
―참사의 재발을 우리 사회의 실패로 봐야 할까요?
“이태원 참사도 어떤 거대한 실패가 있었던 것인데요. 참사가 나면 무엇의 실패인지를 놓고 다투게 되죠. 어떤 조직의 대응 실패인지, 정치 지도자의 실패인지, 심지어 시민의 안전 의식 실패인지까지도. 논쟁을 하는 건 당연한 측면이 있습니다. 중요한 건 무엇의 실패인지 합의하는 것인데, 우리 사회는 합의에 실패했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굳이 ‘합의’라고 표현하는 것은 복잡하고 거대한 재난 참사에 아주 간단한 원인이 있어서 그것만 찾으면 진실을 밝혔다고 얘기할 수 있는 경우는 사실상 없기 때문입니다. 훨씬 더 복잡한 데 실패가 있었고, 그렇다면 전문가든 시민이든 참여해서 무엇이 실패했는가에 대해 다양한 논의를 하고 그것들 사이에 연결고리를 밝히고 일종의 서사를 사회적으로 생성한 다음 그것을 받아들이고 교훈을 얻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던 게 아닐까요.”
―사회적참사위의 세월호 조사 보고서도 그런 경우가 아닐는지요?
“조사 보고서의 요지는 ‘외력이 침몰의 원인인지 확인되지 않았다’라는 표현에 들어 있습니다. 그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외력의 가능성을 열심히 조사했는데 입증할 수 없었고, 그런 데이터가 나오지 않았고, 그렇게 결과를 해석할 수 없었으므로 외력에 의한 침몰 가설을 기각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죠. 그런 다음 남아 있는 유효한 가설은 이러이러한 것이라고 전문가들이 합의할 수 있고, 그것을 사참위의 중요한 조사 성과로 남길 수 있었다고 봅니다. 그렇게 되지 못한 게 저희 필진으로서는 대단히 아쉬운 부분이죠. 그러나 여러 해 조사를 거쳐 이미 많은 사실이 축적됐습니다. 이것들을 어떻게 활용할지가 대단히 중요한 과제입니다.”
전치형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가 지난 26일 한겨레신문사 옥상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앞두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재난이 발생할 때마다 매뉴얼이 작동하지 못하는 것도 그런 실패와 관련이 있을까요?
“매뉴얼의 실패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 첫째는 매뉴얼을 실무 단계에서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대로 따랐어도 대응에 실패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매뉴얼을 만드는 과정에서 상상했던 상황을 뛰어넘거나 예측하지 못한 일들이 발생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매뉴얼을 무용하다고 봐서는 안 됩니다. 매뉴얼을 만들면서 더 많은 전문가와 당사자들이 참여해 최대한 예측해 보려는 과정을 통해 역량이 길러지고, 그 길러진 역량은 매뉴얼의 한계를 뛰어넘는 일이 발생했을 때 대처할 수 있는 역량으로 발휘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매뉴얼을 제대로 만들려는 과정 자체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른바 ‘탈진실 시대’라고 하는데요. 그런 시대적 특성이 재난 대응에 미치는 영향도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정치적 양극화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다만,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재난 대응 또는 진상 규명은 거대한 사회적 합의 과정입니다. 그런 합의를 이뤄내려는 과정 자체가 정치나 이데올로기같이 더 넓은 영역의 양극화된 지형에 교본적인 사례로 기능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나마 재난 상황에서는 잠시라도 양극화된 태도를 넘어 어떻게든 피해자들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는 공감대의 지평이 넓어질 테니까요.”
―우여곡절 끝에 이태원 참사에 대한 국정조사에 여야가 합의했습니다.
“국정조사뿐 아니라 체계적인 진상 규명 활동도 이어져야 할 텐데요. 활동을 설계하고 진행하는 이들이 ‘이태원 참사는 무엇의 실패인가’를 규정해야 하는데, 여러 다양한 가설이나 의혹을 모두 아우르는 조사를 하기는 물리적으로 어려울 겁니다. 그럼에도 제한된 시간에 제한된 사람들이 모여서 최대한의 성과를 내려면 어떤 지식과 경험을 가진 이가 들어가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고, 어떤 방식으로 사실을 밝혀내서 결론에 이르러야 하는지 미리 궁리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도 할 수 없는 것도 있을 겁니다. 그 결과를 피해자들과 국민에게 보고하게 될 텐데, 우리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조사를 해서 이런 결과를 얻었고 우리가 알고 있는 한에서의 참사는 이렇게 일어난 것인데, 여러 가지 한계로 인해서 미처 고려하지 못했던 것은 이런 것이 있다까지 최대한 소상하게 보고할 수 있는 과정이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안영춘 논설위원
jon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