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29일 밤 10시15분 서울 용산 이태원 해밀턴 호텔 뒤 골목에서 압사사고가 발생했다. 사진은 30일 새벽 사고 현장 모습.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24일 국회는 ‘용산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위한 국정조사’의 첫발을 내딛었다. <한겨레>는 국정조사에서 되짚어야 할 10월29일 저녁 6시34분 112 첫 신고부터 30일 새벽 2시30분 첫 재난대책회의까지 절규로 가득 찼던 이태원 참사의 지옥 같은 8시간을 정리한다. <한겨레>가 직접 취재한 내용과 함께 △경찰 특별수사본부 언론 브리핑 △소방·경찰·대통령실 등 정부 자료 △구조 상황 보고서 △현장 녹취 및 메시지(112·119 신고 녹취, 소방 무전 녹취, 모바일 상황실 메시지) △국회 요청 자료 등을 종합해 국가가 사라졌던 결정적인 순간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한다.
“종로센터 구급차 출발합니다.”
10월29일 밤 10시18분 종로소방서 소속 종로119안전센터에서 구급차가 출발했다.
10시15분 ‘압사’란 단어가 담긴 119 첫 신고가 들어온 지 3분 만이었다. “사람도 깔려 있다고 하고 좀 많이 복잡한 것 같아요.” 119상황실은 구급차에 119 신고 내용을 소방 무전으로 통보했다.
“이태원으로 이동 요청된 구급차는 빨리 출발하세요.” 압사 신고가 빗발치자 상황실장이 독촉했다. 15분 만에 이태원 압사 관련 119 신고가 25건이나 접수됐다.
10시32분 위급한 출동 지령을 뜻하는 코드제로(0)가 발령됐다.
“차량 정체가 심해요.” 이태원으로 이동하던 소방(펌프) 차량이 무전을 쳤다.
10시28분 지휘팀장은 대원들에게 도보 이동을 지시했다. “해밀톤호텔 바로 옆 골목에 30명 정도 되는 행인이 넘어져 있어요. 현재까지 구급차는 안 보입니다. 펌프차 도착하면 뒤편 골목으로 진입해서 행인들 뒤로 떼어낼 수 있도록 해주세요.” 지휘팀장의
10시31분 무전이다. 구급차 8대가 출발했지만 현장에는 한대도 닿지 못했다.
녹사평역부터 이태원까지 주차된 차들 때문에 구급차 진입이 어려웠다. 사고 현장에서 3㎞ 떨어진 신당센터 구급차는 10시30분에 출발해 11시3분에야 현장에 도착했다. 평소라면 5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다. 당시 구급차와 함께 이동한 펌프차에 탔던 권영준 구조대원은 “이태원역에서 1㎞ 도로가 꽉 막혔다. 사이렌을 울리며 역주행해 가까스로 갔다”고 했다.
10시42분 종로119안전센터 구급차가 현장에 도착했다. 첫 119 신고를 받은 지 27분 만이었다. 대원들은 15명의 의식 없는 환자를 발견해 심폐소생술(CPR)을 실시했다. “시피아르 인원이 모자라. 대원들 빨리!” 다급한 목소리가 무전기를 뚫고 나왔다. 응급대원만으로 대처가 불가능해지자, 주변에 있던 시민들이 함께 쓰러져 있는 사람들의 흉부를 압박했다.
10시44분 현장 경찰이 참사를 처음으로 인지했다. 마약 단속에 집중했던 형사들이 용산경찰서에 다급한 현장 상황을 보고했다. 현장 소식은 언론이 아니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먼저 알려졌다.
11시 트위터에는 “사람 여러명 쓰러져 있고 시피아르 한다고”라는 짧은 글이 게시됐다. 언론 첫 보도는
11시37분에야 나왔다.
11시 다리를 다친 20대 여성이 동작소방서 노량진센터 구급차에 실려 광명 성애병원으로 옮겨졌다. 병원으로 향한 첫 구급차였다.
11시15분 심정지 상태의 30대 여성을 시작으로 구급차는 1분 간격으로 심정지, 실신, 의식 장애 환자들을 싣고 병원으로 내달렸다. 환자들이 병원으로 이송되는 사이 현장에선 “30여명이 의식이 아예 없다”는 소방 무전이 들어왔다. 환자 이송은 85분간 계속됐다.
30일 0시25분 20대 여성 사망자가 서울병원으로 실려 갔다. 구급차의 첫 사망자 이송이었다. 골든타임은 끝나가고 있었다.
곽진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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