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린씨가 다니는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한 고등학교 돌벤치 중 5개에는 학교를 다니다 세상을 스스로 떠난 학생 들을 추모하는 내용의 문구가 새겨져 있다. 서린씨 제공
‘논문, 출판, 봉사단체 설립, 애플리케이션(앱) 제작 기획, 미술 전시회….’ 국제학교를 다니는 한동훈 법무부 장관 딸이 쌓아올린 ‘스펙’은 화려하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표절·대필 의혹이 숨어 있고, 의혹의 줄기는 케냐를 비롯한 제3세계 청년들의 지적 착취 산업으로까지 이어진다. 한 장관의 딸은 연구 윤리를 어지럽히는 약탈적 저널을 활용하고, 미국 입시전문가인 이모 진아무개(49)씨의 딸들과 스펙을 품앗이해왔다.
<한겨레>는 지난 1~9일 진씨가 활동한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너제이 등 실리콘밸리 인근을 방문했다. 여기는 한 장관의 딸과 ‘스펙 공동체’를 이룬 진씨 딸들이 고등학교를 다녔고, 미국 명문 대학을 향한 아시아인 학생들이 치열한 입시 경쟁을 벌이는 곳이다. 이곳에서 만난 이들은 편법적인 기회 획득에 분노하며, 세상의 모든 출발선은 같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규칙은 지켜져야 한다고 말했다.
<한겨레>는 미국 명문 대학이라는 학벌을 자녀에게 물려주는 과정에 한국 사회 엘리트들이 동원하는 ‘글로벌 스펙 산업’의 실태와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세 차례에 걸쳐 담는다.
‘사랑하는 기억으로’(In loving memory of)
미국 프리몬트에 사는 서린(18)씨의 고등학교 돌벤치에 새겨진 문장이다. 다섯개의 벤치에 새겨진 비슷한 문장 뒤에는 이 학교에 다니다 스스로 세상을 떠난 아이들의 이름이 있다. 떠난 이의 마음을 들여다볼 방도는 없지만, 살아 있는 친구들은 학업 스트레스 때문이었을 것이라 짐작한다.
이 학교 학생들은 대학 과정 수업을 미리 듣는 에이피(AP) 코스를 고등학교 내내 보통 4~5개가량 듣는다. 자신이 대학 과정 수업을 소화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명문대 입시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에이피 과정은 보통 11~12학년에 수강한다. 한 학년에 들을 수 있는 수업이 6~7개이기 때문에 전체 수업의 최대 40%가량을 대학 수준 강의로 소화해야 하는 것이다.
미국의 대학 진학률은 40% 중반 수준이지만 상위권 대학 입시는 치열하다. 아이비리그 대학들이 한국·중국·인도 등 아시아인의 입학 쿼터를 암묵적으로 10~20%로 유지하고 있어 교육열이 높은 아시아인들의 경쟁은 더욱 과열돼 있다. 전세계의 부를 끌어모으는 실리콘밸리 인근의 새너제이, 프리몬트, 쿠퍼티노, 샌타클래라 등에 있는 고등학교의 경우 아시아인 학생 비중이 많게는 90%에 이른다.
고등학교(4년제) 첫 학년인 9학년 때 겪은 ‘치열한 경쟁’을 서씨는 또렷이 기억한다. “(학기) 시작할 때는 서로 잘 모르잖아요. 학업성적(GPA·지피에이)이 썩 좋지 않았는데 아이들이 대놓고 성적 비교를 많이 하니까 불편했죠. 친구들이랑 울었던 적도 있어요.” 미국에서 태어나 공부해온 그도 주변에서 반칙을 목격했다. “(미국 대학입학 자격시험인) 에스에이티(SAT)를 대신 쳐줬다는 사람도 있었고, 대입 에세이를 아예 카운슬러가 써줬다는 말도 직접 들었어요. 그런 사람들이 학교에 한두명 정도는 있죠.”
그래도 부정한 방법으로 스펙을 쌓고 싶은 생각은 없다. “돈이 많은 학생은 여러 도움을 많이 받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학생들은 혼자 해야 하니까 억울하긴 하죠. 그래도 혼자 해냈다는 자신감이 있어요. 다른 사람이 다 해준 학생은 어떻게 성장할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미국에서는 대학이 끝이 아니거든요. 좋은 대학을 안 가도 하나씩 제대로 배우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한겨레>가 지난 1일부터 9일까지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직접 만나거나 통화한 미국의 한인
청년 7명은 한동훈 법무부 장관의 딸이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는 사촌들과 함께 ‘스펙공동체’를 만들고 약탈적 저널에 대필과 표절로 의심되는 논문을 실었다는 의혹에 놀랐다고 했다. 세상이 공정하지 않다는 사실쯤은 이미 터득했지만, 반칙까지 이뤄지는지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이중 국적인 한수민(가명·31)씨는 한국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뒤 고등학교 때 미국으로 건너와 유명 사립대학에 진학했다. 군 복무를 마친 뒤 현재 미국의 테크 기업을 다니고 있다. 한 장관 딸의 스펙 의혹 보도를 보고 한씨는 “황당했다”. “미국 상위 10위권 대학의 경우 지원하는 학생들의 에스에이티나 지피에이가 대부분 비슷해요. 그래서 (교외 활동인) 엑스트라 커리큘럼이 변별력을 가져요. 그런데 그 활동들이 사실 스스로 한 것이 아니거나, 표절했다면 신뢰를 깨는 행위죠. 신뢰를 기반으로 한 사회이기 때문에 학생이 했다고 하면 믿어주고 미국 대학은 엑스트라 커리큘럼을 일일이 검증하지 않거든요. 한국식 대학 입시 문화가 (미국에) 도입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산업이 생긴 거죠. (한 장관 딸처럼) 촘촘하게 스펙을 만드는 것은 처음 본 거 같아요.”
한국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닌 김형민(가명·24)씨의 박탈감은 더 컸다. 자신을 미국 유학생 사이에서 ‘흙수저’라고 여기는 그는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커뮤니티칼리지(2년제 대학)를 거쳐 미국 명문 주립대학에 편입했다. 내신에 신경을 쓰느라 고등학교에서 미국 대학 입시용 스펙을 제대로 쌓기 어려웠고, 학비가 상대적으로 저렴한 주립대학이라도 한국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바로 가기엔 부담스러웠다.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던 그에겐 편입학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커뮤니티칼리지를 다니면서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전공 관련 스펙을 쌓기 위해 전공과 관련한 일을 풀타임, 파트타임으로 가리지 않고 했다. 시간 나는 대로 봉사활동도 했다. 주립대학에서는 김씨의 노력을 높이 평가해 편입에 성공했지만, 그의 마음은 평온하지만은 않다. “미국에 3년 정도 있었는데, 처음엔 ‘왜 이렇게 불공평하지’라는 생각을 했어요.
강남에서 온 유학생들은 돈으로 컨설팅받고 대학 진학을 해버리니까요.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학비 등) 2억원 정도 빚을 갚아야 해서 그럴 수도 없어요. 미국 테크 기업은 초봉이 연 1억원 정도라서 취업하면 빨리 갚을 수 있거든요. 그런데 다른 유학생들은 학비 포함해서 4억원 정도 쓰고도 한국으로 돌아가더라고요. 부모 돈이 많은데다 한국에 인맥도 있으니까 그렇겠죠.”
미국에서 6월은 고등학생들이 미래를 꿈꾸며 졸업하는 계절이다. 한 장관의 딸과 ‘스펙공동체’를 이룬 것으로 알려진 사촌이 다니던 고등학교의 졸업식도 지난 3일 열렸다. 찬란하게 푸른 하늘 아래 500여명의 졸업생이 꽃다발을 받으며 새로운 출발을 축복받았다. 하지만 아이비리그 대학에 진학한 그 사촌은 이날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프리몬트·쿠퍼티노/김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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