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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갓생’, 어쩌면 번아웃의 다른 이름

등록 2022-02-19 08:29수정 2022-02-19 11:09

[한겨레S] 이런 홀로
소진증후군이라는 파트너

좋아하는 일 하며 빠진 자기착취
혼자 벌어먹어야 한다는 사실에
성과에 더 집착하게 되는 악순환
정말 이렇게 내달리고 싶었을까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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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 올라온 ‘번아웃증후군’(소진증후군) 자가진단 테스트를 해본다. △업무량이 지나치게 많은 것 같다 △예전과 달리 일에 대한 열정이 사라진 것 같다 △만사가 귀찮게 느껴지고 특히 업무에 대해 생각하면 피로감과 불편함이 느껴진다 △출근을 해도 시간이 꽤 지나야 업무를 제대로 시작할 수 있거나 카페인 도움 없이는 업무 집중력을 높일 수가 없다…. 도합 열두개 항목이 전부 ‘예스’다. 월급을 주 연료로 이 한 몸 열심히 태워온 지 수년째, 누군가 옆에서 건들기만 하면 온몸이 바스러져 잿더미가 될 것 같다.

내가 회사일을 혼자 떠맡은 일중독자라서 그런 건 전혀 아니다. 주변 동료들 모두 비슷한 심리적 소진 상태를 겪고 있어 징징거리기도 어렵다. 심리적인 에너지 고갈로 간단한 일조차 하기 어려워지면 결국 정신과 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다. 번아웃에 빠진 미국 밀레니얼의 초상을 그린 책 <요즘 애들>(지은이 앤 헬렌 피터슨)을 읽어보니, 태평양 너머 대륙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능력주의에 기반한 아메리칸드림을 믿기엔, 아무리 노력해도 안정성을 획득하기 어려운 현실이 번아웃된 노동자를 양산하는 토양이다. “번아웃은 단순한 일시적 병증이 아니다. 우리 시대의 상태다.” 번아웃은 잠시 쉰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다. 그 자체를 받아들이고 항불안제를 복용하며 간신히 일할 만한 상태를 만들어놔야 한다는 ‘뉴노멀’이다. 번아웃 상태에 빠져 지내지 않으려면, 금수저거나 파이어족이 돼 현재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다시 태어나거나 로또의 로또를 맞거나.

좋아하는 일 하라’는 이데올로기

고3 시절, 엄마는 교대에 진학하라고 했다. 방학도 있고 안정적이고 애 키우기에 딱이라고.(교사 친구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다.) 열아홉의 나는 절대 그렇게 살기 싫었다. 안정성과 같은 가치는 후순위였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뭔지는 몰랐지만, 너무 좋아서 열정을 쏟아도 아깝지 않을 그런 일을 하고 싶었다. 2005년 스티브 잡스는 스탠퍼드대학교 졸업식에서 이런 연설을 했다. “만족스러운 인생을 사는 유일한 방법은, 여러분이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 위대한 일을 하는 유일한 방법은, 여러분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겁니다. 아직 그런 일을 찾지 못했다면 계속 찾으세요.” 잡스의 그 유명한 ‘만족하지 말고 더 갈망하라’(‘Stay hungry, Stay foolish’) 연설이었다. 돌이켜보면 “너만의 좋아하는 일을 하라”는 메시지는 20대 초중반의 내게 유일한 이데올로기였다.

취업준비생이라는 암흑기를 수차례 입사시험 낙방 끝에 벗어난 뒤 잠시나마 행복에 겨웠다. 내가 찾아낸,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 일하고 싶은 직장에서 일한다는 것. 그 자체로 선택받은 삶이었다. 휴일, 휴식, 칼퇴근과 같은 ‘워라밸’에서 희생할 것은 많았다. 감내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내가 만든 결과물이 스스로 정말 좋았다는 생각이 들면 또 몇주를 버틸 수 있었다. 누군가 칭찬이라도 해주면 날아갈 것 같았다.

열정의 그림자는 자기착취였다. 그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저녁 시간을 반납해 일하고, 때로는 주말 데이트를 포기하고 일했다. 8시간만 일하면 업무가 원활하게 굴러가지 않았다. 일 못한다는 손가락질받는 게 두렵기도 했다. 하고 싶었던 일을 한다는 대가로 스스로를 쥐어짰다. <요즘 애들>에선 좋아하는 것이 일이 되고, 일이 곧 좋아하는 것이 되는 ‘일과 삶의 통합’을 “번아웃으로 가는 직행열차”라고 꼬집는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 스트레스가 크면 며칠 밤을 연달아 생생하게 일하는 꿈을 꿨다. 일어나면 어깻죽지가 바짝 굳어 있을 정도였다. 어느새 좋아하고 하고 싶었던 일이 무서워졌고 재미없어졌다.

가치 입증’해야 하는 시대

맞다. 번아웃은 사회적 문제다. 저성장 시대, 사라진 정년 문화. 죽을 때까지 집을 소유할 수도 없을 것 같다. 해소되지 않는 이런 불안 속에서 언제까지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니, 끊임없이 스스로의 능력을 끌어올려 시장가치를 입증해야 한다. 사회적 문제라고 인지했다고 개인 차원에서 당장 달라지는 건 없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나 자신뿐이라서다.

요즘 유행하는 ‘갓생’이라는 말을, 알고 보니 나는 진작 실천하고 있었다. ‘갓+인생’을 합친 ‘갓생’은 허투루 쓰는 시간 없이 생산적인 일과로 삶을 구성하는 것을 가리킨다. 번아웃 속에서 나는 황당하게도 ‘루틴 만들기’에 집착했다. 일주일에 두번 외국어 공부, 매일 아침 스트레칭을 비롯해 생산성 앱을 깔고 삶에 규율을 만들어나가는 방식이다. 밀린 독서도 하고 전시도 봐야 한다. 체크리스트에 모든 체크를 완료하면 어쩐지 내가 내 삶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만 보는 건 쉼이 아니라 죄악이니까. 일의 영역을 넘어 생활 전반에 침투한 또 다른 강박일까. 어쩔 수 없다. 이래야만 마음이 편하니까.

나 혼자 산다는 것. 가끔씩 엄청나게 무섭다. 남은 세월 혼자 벌어먹고 죽을 때까지 혼자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울 때가 있다. 자명하게도 도망칠 곳이 없다는 얘기다. 더더욱 존재가치를 노동의 성과로만 입증하려고 채찍질하게 된다. 사생활은 단순하고 일은 손대면 끝이 없으니까. 내 옆의 또 다른 혼자 사는 사람이 전전긍긍한다면 “그렇게까지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아도 돼”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친구에게 쉽게 할 수 있는 다정한 말을 내게 해주기가 어렵다. 주중엔 야근하고 주말엔 갓생 살기 위해 애쓰는 삶. 그렇게 소진된 채 내달리는 삶. 스스로 묻는다. 정말 이렇게 살고 싶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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