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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적어도 오늘 밤엔 안 마시리

등록 2021-11-27 09:47수정 2021-11-27 09:55

[한겨레S] 이런 홀로
혼삶의 짝꿍이 된 술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후회할 일을 한 뒤 반성하고 고치는 사람은 언젠가 성공할 사람이다. 나는 아니다. 지난해 여름, 술을 마시고 필름이 끊기고서 크게 다칠 뻔했다. 다음날 아침, 몸에 생긴 여러 상처를 발견하고서야 알았다. “내가 술을 또 마시면 인간이 아니다.”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나는 ‘개’가 됐다. 아니다, 견주들이 화낼 말이다. 그냥 인간이 아닌 걸로 하자.

회사에 다니기 전까지 술을 좋아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아빠의 폭음과 주사에 질린 터라, ‘어른이 되면 절대 안 마셔야지’ 다짐하는 쪽에 가까웠다. 음주에 관대한 직종에서 일한 뒤로 술이 늘었다. 술 마실 이유는 갖다 붙이면 생겼다. 힘들어서, 괴로워서, 즐거워서, 슬퍼서, 후련해서, 동료나 친구들과 마셨다. 가족과 같이 살 땐 혼술이 눈치 보였지만, 혼자 살게 되니 이유를 붙일 필요도 없었다. 자연스레 술은 나 홀로 인생의 짝꿍이 됐다. 잠이 안 와서 한잔, 며칠 술을 안 마신 것 같으니 두잔, 오늘은 진짜로 짜증 났으니까 석잔. 들이켠 술과 함께 옆구리 살도 모락모락 불어났다.

알코올에 백전백패하는 이유

지난해 여름 언제든 사고를 당할 수 있다는 경고장을 받은 날 이후, 한낮의 이성이 나를 지배할 땐 술을 꼭 끊어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뭔가 새롭게 시작하려 할 땐 책부터 읽는 모범생이므로 인터넷 서점에서 당장 주문했다. ‘중독 문학’의 고전으로 불리는 미국 작가 캐럴라인 냅의 <드링킹, 그 치명적 유혹>. 저자 설명을 읽자마자 운명처럼 느껴졌다. 그는 홀로 산 여성이자 글 쓰는 이였다. 2002년 마흔셋에 눈을 감았지만, 책을 쓸 때 나이는 서른일곱이었다. 나의 처지와 거의 비슷했다. 이 책의 초반부를 읽자마자 곧장 빠져들었다.

“나는 술 마시는 느낌을 사랑했고, 세상을 일그러뜨리는 그 특별한 힘을 사랑했고, 정신의 초점을 나 자신의 감정에 대한 고통스러운 자의식에서 덜 고통스러운 어떤 것들로 옮겨놓는 그 능력을 사랑했다. 나는 술이 내는 소리도 사랑했다. 와인병에서 코르크가 뽑히는 소리, 술을 따를 때 찰랑거리는 소리, 유리잔 속에서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 술 마시는 분위기도 좋아했다. 술잔을 부딪치며 나누는 우정과 온기, 편안하게 한데 녹아드는 기분, 마음에 솟아나는 용기.” 이 다섯 문장에 포함된 모든 단어와 조사, 쉼표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공감했다. 그래서 어느덧 맥주를 마시며 책을 읽고 있었다.

무릇 어른이란 이런 ‘고통스러운 자의식’과 더불어 살고 대면할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 문제는 물리적인 나이가 들고, 회사에선 연차가 쌓여만 가는데 점점 더 자신을 되돌아보고 들여다보기가 두려워졌다는 데 있다. 몇년 일 좀 더 했다고 후배에게 충고 한두마디를 하고 난 뒤, 뒤돌아서면 입안이 쓰다. 내가 뭐라고? 나나 잘해야지. 난 왜 이러지.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어쩌다 회사를 이렇게나 다닌 거지. 지금이라도 회사 그만둘까. 쓰고 나니 더욱 한심한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은 주로 이런 식으로 전개된다. 술이 깨고 나면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걸 알면서도 알코올만이 지닌 ‘세상을 일그러뜨리는 그 특별한 힘’의 유혹에 번번이 진 이유다. 술을 마신 나는 전보다 매력적이고 용기 있고 유쾌하(게 느껴진)다. 맨정신에는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거나 무척 노력해야 겨우 손끝을 스쳐 지나간다고 느껴지는 그런 덕목을 내게 쉽게 심어준다. 그러니 백전백패다. 솔직히 앞으로도 이길 자신은 없다.

단번에 끊어야 한다는데

당연하게도 합리화는 수시로 일어난다. “물론 다칠 뻔했지만 늘 그렇게 마시는 건 아니잖아. 대부분은 적당히 마신다고. ‘블랙아웃’이 되지 않게만 마시면 돼. 일년에 두세번 제어가 안 될 때가 있어서 그렇지.” 스스로에게 말했다. 하지만 ‘알코올 중독’의 기준은 한번에 얼마나 ‘많이’보다도 ‘자주’에 방점이 찍혀 있다. 유려한 문체로 음주 욕구를 불 지핀 캐럴라인 냅은 책에서 술을 줄이는 게 아니라 단번에 끊어야 한다고 했다. 많은 전문가도 그렇게 조언한다. 담배를 줄여가면서 서서히 금연하겠다는 애연가의 말을 우리가 믿지 않는 것처럼, 술도 똑같다.

더 큰 문제는 술 마시는 친구들 위주로 내 주변에 남았다는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나의 음주 습관을 비난할 친구와는 거리두기가 됐다. 만났을 때 “부어라 마셔라” 해도 수치심이 남지 않는 사람들만 남게 됐다. 술자리에 가서 “술 끊었어”라고 호기롭게 말했지만, 결국 친구들이 생맥주를 석잔째 마실 때 시키고 만다. 또 졌네, 졌어. 숙취로 뒤덮인 다음날 또 금주를 다짐하지만 망각은 늘 금주보다 쉽다.

혼술이라도 하지 말자 싶어 무알코올 맥주를 상자째 샀다. 뇌를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무알코올 맥주는 초창기엔 맥주 흉내만 낸 맛없는 음료였지만, 다종다양하게 나오는 요즘엔 꽤 맥주 맛에 가깝게 구현한 제품이 많다. 맥주가 마시고 싶을 때 얼마간 입을 달래준다. 결과는? 무알코올 맥주로 끝날 때도 있었지만, 약간의 취기가 아쉬워 먹다 남긴 화이트 와인을 쫄쫄 따라 마신 적이 몇번 있다.

그간 읽어온 이 코너 ‘이런 홀로’의 필자들은, 대개 고민과 위기에 봉착했다가 슬기롭게 해결하고 깨달음을 얻는다. 과거의 그릇된 인식을 바로잡고, 잘못된 습관을 개선하며 한발짝 더 나아간다. 나도 그렇게 이 글을 마무리 맺고 싶었다. 하지만 금주에 성공하지 못했다. 입으로만 다이어트를 외치는 사람처럼, 한개비씩 줄여 담배를 끊겠다는 사람처럼 오늘 또 금주를 다짐할 뿐이다. 적어도 오늘 밤엔 안 마시리. 이렇게 일주일, 한달, 일년이 지나면 나는 인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나의 금주 성공기를 쓸 수 있으리라. 독립쪼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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