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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지금 가서 봐도 될까요?” 가깝고도 느슨한 ‘우리 동네’ 소속감

등록 2021-07-17 10:56수정 2021-07-17 12:00

[토요판] 이런 홀로
‘당근’으로 만난 동네 사람들
당근마켓을 이용한 뒤부터, 나는 어렴풋하게나마 온라인 동네 커뮤니티에 발을 걸친 느낌이 들었다. 그 커뮤니티는 내가 ‘맘’을 연기하지 않아도, 이 동네에 길어야 2년 정도 살 예정인 세입자여도 부담 없이 낄 수 있는 느슨한 소속감을 제공했다. 게티이미지뱅크
당근마켓을 이용한 뒤부터, 나는 어렴풋하게나마 온라인 동네 커뮤니티에 발을 걸친 느낌이 들었다. 그 커뮤니티는 내가 ‘맘’을 연기하지 않아도, 이 동네에 길어야 2년 정도 살 예정인 세입자여도 부담 없이 낄 수 있는 느슨한 소속감을 제공했다. 게티이미지뱅크

내가 ‘당근마켓’을 맨 처음 이용한 건 3년 전인 2018년 가을 어느 날이다. 이사를 앞두고 짐 정리를 하고 있었다. 투룸에서 원룸으로 옮기게 되어, 1인가구의 얼마 안 되는 세간살이에서도 줄여야 할 게 많았다. 냉장고, 스탠드형 전신거울, 그리고 지난 4년 내 책을 지켜준 3단짜리 책장 2개와 4단짜리 책장 1개 등이 정리 목록에 올랐다. 처음에 나는 구청에서 지정한 재활용센터에 전화했다. 다수 지방자치단체가 ‘자원의 절약과 재활용 촉진을 위한 조례’에 따라, 중고 가전·가구를 사고팔 수 있는 재활용센터를 운영한다. 평균 2년에 한 번씩 이사를 다닌 나는, 당시까지만 해도 재활용센터 애호가였다. 비록 내 정리 목록에 오르긴 했지만, 여전히 쓸 만한 물건들이었다. 새로운 동거인을 찾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재활용센터 2곳에서 연달아 ‘퇴짜’를 맞았다.

“그런 건 요즘 사는 사람이 없어요. 유행이 지났잖아.” 내가 전화로 책장의 외양을 설명하자, 센터에서 답한 말이다. 혀를 끌끌 찼다. “가져가는 사람 아무도 없을 겁니다.” 책장이 귀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아무도 찾지 않을 것’이라는 그의 확언에 마음이 상했다. 정말 없을까? 그때 동네 사람들의 중고거래를 돕는다는 스마트폰 앱 ‘당근마켓’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앱을 내려받고 정리 목록에 오른 물건들을 ‘무료나눔’으로 올렸다. 충분히 쓸 만한 물건들이 버려지지 않고 새 주인을 찾는다면, 그리고 내 입장에선 대형 폐기물 스티커 값을 아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지금 가서 봐도 될까요?”

“지금 가서 봐도 될까요?” 당근마켓에 글을 올린 그날 밤, “3단짜리 책장을 원한다”는 메시지가 왔다. 밤 11시30분. 홀로 사는 집에 모르는 사람을 들이기엔 부담스러운 시간이었다. 대화명을 눌러 ‘판매상품’ 목록을 봤지만, 성별도 가늠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삿날이 바투 다가와 있었다. “오셔도 된다”고 답했다. 곧바로 친구에게 전화로 내 상황을 전하는 ‘안심콜’을 넣은 뒤, 책장을 들고 집 현관문 앞까지 나갔다. 메시지를 주고받은 지 10분도 안 되어 그 사람이 나타났다. 나보다 키도 작고 몸무게도 적은 것이 분명한 그 사람을 보는 순간, 긴장이 완화되며 입까지 풀렸다. “책장을 찾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재활용센터에서는 이제 이런 책장은 취급 안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렇다고 버리기엔 너무 아깝고요.” 책장을 들여다보며 혼자 들고 갈 수 있을지 가늠해보던 그 사람이 답했다. “센터에서 왜 그렇게 말했는지 모르겠네요. 요즘도 이런 책장 사려면 최소 1만원은 내야 돼요.” 그 사람은 재활용센터 직원처럼 혀를 끌끌 찼지만, 내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9.5㎏짜리 책장을 들고 낑낑대며 골목길을 내려가는 그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봤다. 그는 10분쯤 뒤에 다시 메시지를 보내왔다. “저 4단짜리 책장도 가지러 갈게요. 걔도 들고 올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삿짐 정리로 시작한 당근마켓
전신거울 가져간 모녀,
비누 가져온 중년여성…독립한 뒤 처음 이웃을 마주했다
‘맘’이 아니어도, 세입자여도
부담없이 낄 수 있는 동네 커뮤니티
소소한 일상 공유하는 이 관계망이
‘하우스’ 아닌 ‘홈’ 만들 수도

당근마켓을 시작한 지 며칠 만에, 정리 목록에 있던 여러 물건을 새 주인들에게 건넬 수 있었다. “딸이 계속 갖고 싶어 했다”며 작은 손수레를 끌고 나타난 모녀가 전신거울을 데려갔다. 핸드메이드 비누를 사례품으로 가져온 중년 여성 두 사람이 힘을 합쳐 6단짜리 선반을 옮겼다. 대부분 나의 ‘슬세권’(슬리퍼와 역세권을 더한 신조어. 슬리퍼를 신고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를 의미)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단지 ‘회사와 가까운 곳’이어서 선택했던 나의 동네. 나는 이사를 앞두고서야 당근마켓을 통해 처음으로 동네 이웃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하고 인사하고 대화 나눌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15년여 전 고향을 떠나 서울로 이주한 뒤 ‘동네 이웃’이라는 관계는 내게 박물관에서 만날 법한 유물로 취급되고 있었다. 어릴 적 사귄 ‘옆집 언니·오빠’의 근황은 가끔 고향에 있는 부모님을 통해 건너 듣는 정도. 부모님 집에서 독립한 뒤 내가 개척한(?) 동네 이웃은 없었다. 학생 시절 가까운 거리에서 함께 자취하던 친구들, 같은 건물에 거주했던 과거 주인집 할아버지, 아주머니를 이웃에 포함시킨다면 모를까.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친구들 가운데는 온라인 지역 ‘맘카페’에 가입해 정보도 얻고 동네 이웃을 새로운 친구로 사귀는 경우가 있었다. 한 친구는 내게 “동네 맛집 정보를 정확히 알고 싶다면 맘카페를 활용하라”고 알려주기도 했다. 하지만 비록 온라인이더라도 ‘맘’인 척 연기해야 하는 게 썩 맘에 들지 않았다. 신축 아파트에 입주한 친구들은, 입주하기도 전부터 다른 입주 예정자들과 온라인 메신저상 오픈채팅방에 모여 왁자지껄 대화를 나눴다. 정보와 의견을 나누고 합심(?)해서 단체행동에 나서야 할 일들이 존재한다고 했다. 나에게는 오프라인 동네 커뮤니티는 말할 것도 없고, 온라인 동네 커뮤니티도 멀기만 했다.

‘하이퍼로컬’을 공공에서도…

하지만 당근마켓을 이용한 뒤부터, 나는 어렴풋하게나마 온라인 동네 커뮤니티에 발을 걸친 느낌이 들었다. 그 커뮤니티는 내가 ‘맘’을 연기하지 않아도, 이 동네에 길어야 2년 정도 살 예정인 세입자여도 부담 없이 낄 수 있는 느슨한 소속감을 제공했다. 나는 꼭 거래할 물품이 없어도 동네 당근마켓 ‘눈팅’을 즐기게 됐다. 사고파는 물건의 이력을 소개한 글이 곧 동네 이웃의 목소리였다. 당근마켓은 지난해 소소한 일상과 동네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동네생활’ 게시판을 확대했고, 올해 초에는 취미 등 일상을 공유할 사람들을 모집하고 단체 채팅을 할 수 있도록 한 ‘같이해요’ 서비스도 선보였다. 당근마켓이 입증한 하이퍼로컬(hyper-local, 시·군·구 등보다 더 좁은 의미의 지역)의 가치는 다른 온라인 플랫폼으로도 번지고 있다. 네이버 카페가 올해 초 선보인 ‘이웃 톡’ 서비스가 대표적이다. 이용자의 위치에 기반해 더 정교한 온라인 동네 커뮤니티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30대 1인가구인 내 일상에 어느덧 성큼 다가온 하이퍼로컬의 가치를, 시장의 영역 말고 공공 부문에서 경험할 기회가 언젠가 찾아올까? 몰락한 백인 중산층 유목민들의 삶을 다룬 영화 <노매드랜드>에서 주인공 ‘펀’은 “나는 집 건물(house)이 없을 뿐, 집(home)이 없는 건 아니야”라고 말한다. 영화 속에서 ‘하우스리스’와 ‘홈리스’를 구분 짓는 주요 요소 중 하나는 ‘관계망’이다. 내게 가족이 없고, 번듯한 건축물로서 집이 없어도, 나의 일상을 공유하는 친구와 이웃들이 존재하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지난 4월 오세훈 서울시장이 ‘1호 공약’이었던 1인가구 특별 대책을 위한 태스크포스(TF)를 만들었다는 뉴스를 보며, 그간 1인가구를 위한다는 숱한 정책 구호들도 함께 떠올렸다. 오 시장은 1인가구의 ‘5대 고통’을 안전·질병·빈곤·외로움·주거로 규정하고, 이를 해소하기 위한 수요자 맞춤형 정책을 개발한다고 했다. 다른 지자체나 중앙정부와 정책 방향이 크게 다르진 않다. 5대 고통을 덜어줄 주요 열쇠가 어쩌면 하이퍼로컬 커뮤니티에 있지 않을까. 정부의 주거 지원 정책 목표가 건물을 의미하는 ‘하우스’보다는, 이웃 관계를 포함한 ‘홈’에 가까운 것이기를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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