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작가노조 조합원들이 2017년 11월 서울 상암동 <제이티비시>(JTBC) 건물 1층 카페 모임방에서 큐시트를 본뜬 종이 구호 ‘방송작가도 노동자다’를 들어 보이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방송작가들의 비정상적인 노동현실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당사자들의 끈질긴 문제 제기로 2020년 방송작가 2명을 해고한 <문화방송>(MBC)의 결정이 부당해고라는 중앙노동위원회 판정도 지난 3월에 나왔다. 지금 지상파 3사는 시사교양·보도 분야 작가들의 근로자성 문제로 특별 근로감독을 받고 있다. 그러나 방송 3사는 근로감독 대상 명단과 연락처를 뒤늦게 제출하거나 일부만 제출해 근로감독을 지연시키고 있다.
수십 년을 일하고도 하루아침에 잘리고 퇴직금 한 푼 없이 쫓겨나는 방송작가, 또 방송사의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전태일재단, 노회찬재단, 한국비정규직노동센터 등 노동시민사회단체들이 ‘방송작가 친구들’이라는 이름으로 뭉쳤다. 방송 3사가 이제라도 근로감독에 적극 협조하기 바라며, 여섯 번째 릴레이 기고를 싣는다.
11월11일 서울 광화문 프레스센터 전국언론노동조합 사무실에서 열린 방송작가유니온 창립대회에서 이미지 지부장이 깃발을 흔들고 있다. 방송작가유니온 제공
이미지 ㅣ 방송작가·전국언론노동조합 특임부위원장
방송작가 노조가 생기기 몇 해 전, 한 방송사의 최고 윗선은 동료 퇴직자에게 일자리를 주려고 ‘메인 작가’를 잘랐다. 친한 선배 작가가 희생양이 됐다. 퇴직 언론인은 작가가 하던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며칠 못 가 그만두며 사측에 ‘방송작가들 제대로 대우하라’는 말을 남겼다는 후문이 들렸으나, 잘린 작가는 원래 자리로 되돌아가지 못했다. 동료 작가들이 억울하게 그만둔 그녀를 위로한 게 고작이었다.
작가노조가 있었다면, 과연 그런 해고가 가능했을까? 훗날 제대로 힘이 되어주지 못한 걸 미안해하던 내게 선배 작가는 말했다. 동료 작가들이 잘리고 짐 싸서 나가는 날 외롭지 않게 마음 보태준 것만으로도 고마웠다고. 동료가 있다는 걸 느낀 건 20년 작가 생활 중 그때가 처음이었다고. 작가노조를 한다는 건 어쩌면 든든한 진짜 동료가 생기는 게 아닐까?
신규 데일리 프로그램 ‘론칭’ 후 사흘째 날 아침 지하철에서, 프로그램이 폐지돼 당일부터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전화를 받았다. 새 프로그램 기획에 투여된 노동력의 대가는 물론 약속된 원고료조차 받을 엄두를 못 냈다. 그저 낮은 시청률을 자책했다. 국내 대표 시사 고발 프로그램 메인작가 1인은 동료에게 ‘위로’를 받으며 그날 해고될 걸 알았다. 사회 정의를 외치는 프로그램 만드는 제작진이 당사자에게 통보조차 하기 전에 ‘아무개 작가’를 해고할 거란 소문부터 낸 거다. 지상파 방송사 보도국의 한 작가는 출근해보니 후임 작가가 와 있었다. 또 다른 방송사의 유명 프로그램에서는 프로그램 녹화를 앞두고 밤샘 대본 작업을 하던 기존 작가들에게 한마디 언급도 없이 작가 전체를 새로 구하는 구인 공고를 올렸다.
이른바 노동자였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프리랜서라도, 이런 식의 ‘계약해지’가 허용될 수는 없다. 누가 봐도 부당하다. 방송작가노조가 결성된 이후 노조가 직접 나서 개선하고 해결했다. 부당해고를 문제 제기해 방송사에 복직되기도 했고, 방송사의 공식 사과를 받기도 했다. 당사자가 용기 내고, 방송작가유니온이 함께 했기에 가능했다.
해고·채용 과정뿐 아니라, 일한 만큼 못 받는 보상체계 문제에 더해 모성권 차별까지. 방송작가가 겪는 부당한 사례는 너무나 광범위하다.
한 지역 라디오 작가는 원고료를 받을지 못 받을지 모를 원고를 써야 했다. 프로야구 중계의 우천 취소를 대비한 원고를 쓰고 대기하는 일. 무려 4월부터 10월까지, 프로야구 시즌 내내. 비가 오지 않아 중계가 무사히 끝나면, 원고는 쓰레기통으로 직행하고 원고료 한 푼 받지 못한다. 이 부당함은 매해 반복됐지만, 작가 개인의 호소만으로 좀처럼 개선되지 않았다. “싫으면 나가!” 방송 일자리가 많지 않은 지역에서, 그마저 일자리가 희소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부당은 관행이 됐다.
한 방송사 간부는 원고료가 수년째 고착된 사실을 인정하며 말했다. “수년 동안 작가들이 한 번도 원고료 인상을 요구한 적 없다.” 이 말은 명백히 거짓이면서 또 한편 거짓이 아닐 수 있다. 그간 작가의 원고료 인상 목소리가 그 간부에게 닿지 못한 탓에. 계속되었을 작가들의 요구는 중간에서 묵살되거나 혹은 원고료 인상 요구를 하지 않는 작가로 교체되거나.
‘절친’ 기혼 작가는 면접에서 임신계획이 없다면 붙여주겠다는 막말을 들어야 했다. 어처구니없게도 그 말을 한 면접자는 만삭의 여성 정규직 피디(PD).
나 그리고 우리 작가들은 참고 일하거나, 덜 부당한 프로그램 혹은 방송사·제작사를 찾는 데 골몰해 왔다. 더 열심히 일해 ‘능력 작가’로 인정받으면 ‘부당’한 일을 겪지 않을 거라 착각, 혹은 맹신하면서. 그러나 이런 방법은 곧 한계에 부딪히고 만다. 불공정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언제든 ‘나 그리고 우리 모두’ 또다시 부당한 일을 겪을 수밖에 없다. 나 홀로 ‘능력’을 키우는 것만으로도 역부족이다.
<대구 문화방송>(MBC)을 비롯한 여러 방송사의 작가들이 방송작가노조에 가입한 후 원고료 인상에 성공했다. 작가 개인으로는 절대 불가능했을 성과다. 또 다른 작가들은 노조와 함께 서면계약서의 부당조항을 삭제해냈다. 성희롱 발언을 한 간부의 직위해제도 이뤄냈다. 이 또한 작가 개인이 할 수 없는 일이다. 방송작가들의 든든한 울타리, 노조가 있어 가능했다.
2017년 11월11일 방송작가 노조가 만들어진 후 지금까지 부단히 열심히 달려왔지만, 방송작가가 속한 부당한 구조를 바꿔내고 제대로 처우 개선하기까지 아직 갈 길이 멀다. 전태일재단과 노회찬재단 등 수많은 시민사회단체는 방송작가들의 든든한 ‘친구’가 되겠다고 어깨를 겯고 있다. 조만간 시민사회 저명인사들이 포진한 ‘방송작가 친구’도 결성될 예정이다. 정치권도 방송작가 문제 해결에 힘 보태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무엇보다 방송작가들이 더 뭉쳐야 한다. 작가들이 더 많이 뭉치면, 작가들의 눈물은 그만큼 줄어든다. 방송작가들이 왜 노동조합에 가입해야 하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