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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비정규직 방송작가, 억울하면 정규직 피디 시험 보라고요?

등록 2021-06-30 15:46수정 2021-06-30 15:57

방송작가친구들 릴레이 기고 ⑤ ‘방송작가도 노동자다’
방송작가계에 김은숙·김은희·이우정만 있지 않아
애초 이런 직종을 만든 사회와 고착화된 인식이 문제
정규직 다수인 방송사에서 차별받지만, 꿈 포기 못해
영상 촬영현장에 동원되는 작가들. 방송작가 친구들 제공.
영상 촬영현장에 동원되는 작가들. 방송작가 친구들 제공.

방송작가들의 비정상적인 노동현실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당사자들의 끈질긴 문제 제기로 2020년 방송작가 2명을 해고한 <문화방송>(MBC)의 결정이 부당해고라는 중앙노동위원회 판정도 지난 3월에 나왔다. 지금 지상파 3사는 시사교양·보도 분야 작가들의 근로자성 문제로 특별 근로감독을 받고 있다. 그러나 방송 3사는 근로감독 대상 명단과 연락처를 뒤늦게 제출하거나 일부만 제출해 근로감독을 지연시키고 있다.

수십 년을 일하고도 하루아침에 잘리고 퇴직금 한 푼 없이 쫓겨나는 방송작가, 또 방송사의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전태일재단, 노회찬재단, 한국비정규직노동센터 등 노동시민사회단체들이 ‘방송작가 친구들’이라는 이름으로 뭉쳤다. 방송 3사가 이제라도 근로감독에 적극 협조하기 바라며, 다섯 번째 릴레이 기고를 싣는다.

이제 당신들이 우리의 말을 들을 차례다

권지현 ㅣ 방송작가·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 영남지회 부지회장

‘프리랜서'와 ‘노조',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자유롭게 개인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왜 노동조합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다는 사람들이 많을 듯하다.

하지만 연예계에는 김태희·송혜교·전지현만 있는 것이 아니고, 스포츠계에는 김연아·박지성·서장훈만 있는 게 아니듯, 방송작가계에도 김은숙·김은희·이우정만 있는 게 아니다. 그 말은 대한민국의 기업과 산업, 노동 구조를 삼성과 엘지 같은 대기업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도 같다.

나는 방송작가다. 그리고 프리랜서다. 처음 방송작가가 됐을 때, 합격선을 통과했다는 기쁨에 들떠, 또 너무 어려서 노동시장 구조뿐 아니라 프리랜서조차 알지 못했고, 알려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현장에 투입되고 한 달, 노동의 대가를 원고료가 아닌 ‘바우처’ 명목으로 받으며, 방송작가의 현실을 어렴풋이 알게 됐다.

그래도 그때는 20대였고, 어쨌든 일을 하고 있었고, 매우 적지만 돈을 벌고 있었다. 무엇보다 아이엠에프(IMF·외환위기)를 갓 넘기고 이제 겨우 진정이 될 즈음이었던 시기에 일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 스스로 대견하다 여겼기에 그런 노동시장의 부조리한 구조를 제대로 들여다볼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나조차 감정적으로 흔들리는 20대를 감당할 수 없었던 탓에 그런 걸 생각하고 말고 할 주제도 못 되었다.

그렇게 6~7년을 일하고, 결혼과 출산으로 일을 쉬게 됐을 때였다. 그때부터였다. 일은 그만두었는데, 자꾸 일 생각이 났다. 다 지나간 일인데, 일하던 때의 기억과 함께 억울함과 서러움, 분노가 찾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나이 먹은 국장과 팀장들이 흘리던 시시껄렁한 음담패설, 돈 받으며 일을 배우는 게 너희에겐 얼마나 좋은 기회인 줄 아느냐던 이상한 충고, 원고료가 적다고 건의하면 편의점 아르바이트하면 더 많이 번다더라고 응수하던 같잖은 협박성 발언까지.

그들은 무엇이 그리 당당했던 것일까.

나는 무엇이 그리 겁이 났을까.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옳다고 믿었던 것일까.

왜 나는 내가 틀렸다 생각했던 것일까.

정신없이 지내던 시절, 이리저리 치이며, 제대로 대처하고 처리하지 못한 채, 제쳐두고 억눌러 놓았던 감정들이 그제야 나를 찾아왔다. 지나고 생각하니, 나이 좀 더 먹고 생각하니, 말이 되지 않는 일들이 너무 많았다. 그때 나는 그런 부당함에 왜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도망 다니기에 급급했을까, 도망가는 행동이 싫다는 의사 표현이라 믿었던 나는 왜 그리 어리석었던 것일까.

한바탕 생각의 소용돌이를 거치며 깨달았다. 내가 잘못한 것은 없다고. 따지고 보면 나를 부품 취급하던 조직이, 차별하던 사람들이, 특수고용이라는 유령 같은 자리를 만들어낸 이 사회가 진짜 잘못을 하는 것이라고.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른다. 정 그렇게 억울하고, 대우받고 싶으면 제대로 시험 쳐서 피디(PD)가 되면 되지 않느냐고, 정규직이 되면 되지 않았느냐고.

하지만, 단언컨대 나의 꿈은 피디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기자도 아나운서도 아니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처음부터 ‘방송작가’였다. 방송국에는 수많은 직종이 존재한다. 피디, 카메라, 기자, 아나운서, 리포터, 기상캐스터, 엔지니어, 그리고 작가. 그 가운데 정규직인 직종도 있고, 그렇지 않은 직종도 있다. 나는 실력이 모자라고 능력이 없어서 ‘정규직 작가’가 아닌 ‘프리랜서 작가’가 된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서류전형을 통과하고, 필기시험을 치르고, 면접을 보고, 작가가 됐는데, 그게 프리랜서였다.

우리가 뽑았으나 우린 널 책임지지 못한다, 그것이 한 달의 교육기간 중 제작팀장이란 사람에게서 첫날 첫마디로 들었던 말이었다. 방송작가는 세상 어디에도 정규직이 존재하지 않았고, 지금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거의’라고 표현한 것은 2020년 <티비에스>(TBS) 서울교통방송이 방송사 최초로 10명의 방송작가를 정규직으로 채용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한들, 정규직이건 비정규직이건 계약직이건 파견직이건 일용직이건 특수고용직이건 고용상 신분의 다름이 어떤 차별의 근거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결국은 구조의 문제다. 애초에 이런 직종을 만들어낸 사회의 잘못. 그리고 그것이 처음부터 잘못되었음을 깨닫지 못한 채, 그 굴레 속에서 승자와 패자,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로 나뉘어 누군가를 억압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의 가여운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지금 당장이야 원 안에 있을지 모르지만, 자본의 논리를 따라가면 고통 분담과 경제적 효용이란 명분 아래 마지막 1%를 제외한 우리는 모두 결국 원 밖으로 밀려날지 모르는 다 같은 운명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는 정규직과 계약직, 프리랜서 등 고용 신분에 따른 편견과 차별이지만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정규직의 사회도 생존경쟁, 약육강식의 정글과 같다. 치열한 경쟁과 정치, 그 속에서 서로를 물고 뜯는 모습은 이겨도 이긴 것이 아닌 투견판과 다름없다. 결국, 이 판을 보고 웃는 자는 오직 한 사람, 그 판의 주인밖에 없기 때문이다. 직원 모두는 그가 펼쳐놓은 판에서 열심히 싸워 성과를 내면 일정 정도의 보상을 받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버려질 운명이다. 시기만 다를 뿐 결국 우리는 모두 ‘을’인 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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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표지

은유의 책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에 이런 말이 나온다. “우리가 입을 다무는 것은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하고 싶은 것을 모두 말할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그렇다. 생살여탈권을 쥐고 흔드는 자들이 무서워서 말하지 못했고, 잘릴까 두려워 입을 다물었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침묵했다.

그러나 이제는 삶의 경험치만큼 두려움을 대하는 자세는 좀 더 의연해졌고, 부당함에 치이고 치이던 세월 덕분에 맷집도 생겼다. 그렇게 프리랜서 노조인 방송작가유니온이 탄생했고, 우리는 말할 방법을 얻었다. 정당한 노동의 대가, 안정적인 노동환경을 위해 말할 준비가 되었으니, 이제 당신들이 우리의 말을 들을 차례다.

식당에서도 일하는 방송작가들. 방송작가 친구들 제공
식당에서도 일하는 방송작가들. 방송작가 친구들 제공

노동과 삶이 공존하는 미디어센터를 꿈꾼다

김태현 ㅣ 마포구 노동자종합지원센터 센터장

우리 마포구 노동자종합지원센터는 서울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센터 끝자락에 있다. 30년간 노동운동을 하다 상암동으로 처음 출근하면서부터 나에게 디엠시(DMC)라는 동네는 화려한 빌딩 숲속에 광장과 근대적 조형물이 있는 ‘멋진 신세계’처럼 보였다. 하지만 사람의 정취가 보이지 않는 이상한 거리여서 왠지 정감이 가지 않았다.

왜인지 알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상암동 방송작가들이 문화생활을 누릴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우리는 방송작가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밤에 타로 문화프로그램을 진행했다. 하루 만에 신청이 완료됐으나 실제 참가한 이들은 극소수였다. 시도 때도 없이 대기 상태인 프리랜서라는 일이 그들에게 조금의 여유도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류의 한 장르로까지 격상한 각종 방송프로그램은 화려함을 자랑하지만, 이 이면에는 프로그램 준비와 제작 등 전 과정에 방송작가와 방송 스태프의 피와 땀과 눈물, 그리고 보상 없는 노동이 뒤따랐다는 명백한 사실이 감춰져 있다. 방송작가는 프리랜서라는 자유분방한 명칭을 부여했지만, 그들에게 인간다운 보상과 최소한의 문화생활을 영위할 실질적 자유는 주지 않았다. 대다수 방송작가는 자유 대신 각종 지시와 명령에 순응해야 할 의무만 주어졌다.

최근 조금씩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이한빛 피디(PD)의 죽음과 청주방송 사건을 통해 방송작가와 스태프의 인권 착취적 노동실태가 드러났다. 방송작가유니온과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가 결성되는 등 노조 조직화도 진행됐다. 그동안 억눌렸던 비정규 노동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문화방송>(MBC)에서는 ‘방송작가가 노동자’라는 중앙노동위원회 판정까지 나왔고, 지상파 3사에서는 처음으로 근로감독이 진행 중이다. 한국비정규센터, 언론노조, 서북권직장맘센터, 마포구노동자센터 등이 참여한 미디어공동사업단에 최근 전태일재단, 노회찬재단 등이 참여하면서 ‘방송작가 친구들’로 확대 재편됐고, 이들의 든든한 지원 연대체가 되고 있다. 나는 방송작가유니온 간부들이 고립감과 열패감에 시달리다가 방송작가 친구들 결정을 계기로 연대의 소중함과 자신감을 얻었다며 울먹이며 든든해 하는 것이 더 고무적이다.

나는 꿈꾼다. 노동부의 근로감독 결과를 통해 방송작가들의 노동실태가 제대로 밝혀지고, 종속적 노동자에게는 노동자로서의 최소한의 노동조건(최저임금과 주휴일, 52시간 노동상한제, 퇴직금)이 보장되기를, 진정한 프리랜서에게는 인간다운 보상과 지시, 개입 없는 프리랜서로서 표준계약이 이뤄지는 계기가 되기를. 방송사들은 판정이 나거나 근로감독 결과에 따라 노동자성이 강한 방송작가들은 직고용하고 프리랜서들에게는 공정한 보상과 표준계약서를 제시하기를.

방송사 정규직 노동자들은 대부분 방송 민주화를 위해 투쟁해온 동지들이다. 이들이 수많은 방송작가와 스태프를 갑질 대상이 아니라 자신과 같은 동료로 인정하고 함께 하기를 기대해본다. 다행히 언론노동조합이 방송작가유니온을 지원하고 이 투쟁에 함께 해오고 있다. 정규직 조합원들이 비정규 노동자들에게까지 동지애와 연대감을 확대하도록 교육과 캠페인, 조직화 지원을 강화했으면 한다.

이 모든 것들이 쉽게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꿈을 꾸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연대가 세상을 조금씩 바꿔온 것이 사실이다. ‘방송작가 친구들’은 그러한 꿈을 꾸고 연대를 실현하기 위한 조그마한 시작일 뿐이다. 만일 이러한 일들이 이뤄진다면, 상암동 디엠시(DMC)는 삭막한 빌딩 숲에 가려진 인간의 모습이 아름답게 드러날 것이고, 노동과 삶이 공존하는 인간다운 도시의 모습을 찾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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