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작가친구들 릴레이 기고 ④ ‘방송작가도 노동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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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 프로그램 녹화 중 일하는 작가. 방송작가 친구들 제공
방송작가들의 비정상적인 노동현실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당사자들의 끈질긴 문제 제기로 2020년 방송작가 2명을 해고한 <문화방송>(MBC)의 결정이 부당해고라는 중앙노동위원회 판정도 지난 3월에 나왔다. 지금 지상파 3사는 시사교양·보도 분야 작가들의 근로자성 문제로 특별 근로감독을 받고 있다. 그러나 방송 3사는 근로감독 대상 명단과 연락처를 뒤늦게 제출하거나 일부만 제출해 근로감독을 지연시키고 있다.
수십 년을 일하고도 하루아침에 잘리고 퇴직금 한 푼 없이 쫓겨나는 방송작가, 또 방송사의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전태일재단, 노회찬재단, 한국비정규직노동센터 등 노동시민사회단체들이 ‘방송작가 친구들’이라는 이름으로 뭉쳤다. 방송 3사가 이제라도 근로감독에 적극 협조하기 바라며, 네 번째 릴레이 기고를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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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드팀이 바빠서 방송작가가 대신 요리중인 모습. 방송작가 친구들 제공.
작가인지 잡가인지
이해진 ㅣ 15년차 방송작가 일찍이 중학교 3학년 때 방송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나는 이를 위해 8년을 투자했다.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하며 보낸 4년, 방송아카데미 작가과정을 수료하고 구직 차 이곳저곳을 기웃대며 보낸 2년, 케이블방송사 무급 수습작가로 보낸 1년, 외주제작사 에프디(FD)로 보낸 1년. 그 8년은 방송작가가 될 수만 있다면 기꺼이 감내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기적처럼 방송국 막내 작가가 되어 방송사 수첩을 건네받았을 때의 감격은 지금도 생생하다. ‘밤샐 각오가 돼 있는, 방송에 대한 열정과 끼로 똘똘 뭉친 인재’를 뽑는다는 구인 문구조차 마음에 들었던 나는 급여가 얼마인지도 모른 채 일을 시작했다. 닥치는 대로 자료를 찾고, 섭외전화를 돌리고, 촬영현장을 쫓아다니고, 제작일정을 확인하고, 촬영본을 받아쓰기 하는 게 주업무였지만 부가 업무가 더 많았다. 시도 때도 없는 피디(PD)의 지시와 요구는 작가 업무와는 거리가 먼 것도 많아서 가끔은 내가 피디 비서로 취직한 것 같단 착각마저 들었다. 가끔 사적인 술자리에 불려 나가서 작가들에 대한 불평을 들어주는 것도 내 몫이었다. ‘얘는 이래서 안 돼, 쟤는 저래서 안 돼.’, ‘일을 잘하는 작가는 잘난 척해서 싫고, 일을 못 하는 작가는 멍청해서 싫고, 나이 들어서 싫고, 눈치 없어서 싫고, 솔직해서 싫고, 일밖에 몰라서 싫고.’ 대부분 일에 대한 평가보다는 사감이 개입된 악담이었다. 그리고 불평의 끝은 “두고 봐라. 곧 잘라버릴 거니까”였다. 정작 자신이 모든 작가가 기피하는 인성 제로의 무능한 피디란 걸 혼자만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주어진 모든 일을 소리 없이 해냈고 모든 부당함을 군소리 없이 감당했다. 피디 눈 밖에 나면 언제 잘릴지 모른다는 작가들의 충고대로 영혼 없이 일한 지 한 달여 만에 통장에 찍힌 금액은 30만 원이 채 안 되는 금액이었다. 피디한테 내막을 묻자 싸늘한 대답이 돌아왔다. 딱히 하는 일도 없는데 그 금액이 적냐? 일 배우는 자세가 안 돼 있다. 일이나 제대로 하지 돈부터 밝히냐? 넌 돈을 벌러 온 게 아니라 일을 배우러 온 거란 걸 잊지 마라. 며칠 후 난 ‘돈돈 하는 인간’으로 낙인이 찍혀 있었다. 프로그램 개편으로 결재와 정산이 늦어진 데 대한 사과는 한마디도 듣지 못하고 타박만 한 바가지 들었을 때, 바로 그때 이 바닥을 떠났더라면 나는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까? 하지만 오래 품어온 꿈을 쉽게 폐기할 수 없었다. 한 달에 채 120만 원이 안 되는 수입을 쪼개어 쓰면서 오직 일 잘하는 작가가 되기 위해 피디가 요구하는 ‘잡가’가 되어가고 있었다. 원룸 월세와 식비, 교통비를 빼고 나면 남는 게 없는 빠듯한 생활이었지만 1~2년만 견디면 막내 딱지를 떼고 작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던 시절이었다. 막내 작가는 항상 웃고 다녀야 팀 분위기가 밝다는 피디의 충고대로 웃음도 잃지 않았다. 네 일 내 일 구분이 없고 시작과 끝이 없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평일과 휴일이 따로 없었다.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는 잡무에 야근은 일상이었고 화장실을 갈 때는 휴대전화부터 챙겼다. 제때 전화를 받지 않으면 불같이 화를 내는 피디가 가장 무서웠다. 일주일에 하루 이상은 밤샘을 해야 했고, 못다 한 일을 싸 들고 가는 날도 많았다. 버스가 끊긴 밤에는 택시비가 아까워 방송국 소파에서 쪽잠을 자야 했고 주말 출근도 일상이었지만 잔업수당이나 휴일수당은 10원도 없었다. 그래도 전부 감수할 수 있었다. 당당한 방송작가가 될 수만 있다면. 그렇게 1년을 지날 무렵 기적처럼 프로그램의 한 코너를 맡게 됐다. 게으름 피우지 않고 열심히 일한 덕분에 막내 딱지를 빨리 떼게 됐다는 선배작가들의 칭찬과 축하가 너무나 달콤했다. 주급도 10만 원이나(?) 올라서 30만 원짜리 적금통장도 만들었다.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긴 있구나! 비록 서브 작가였지만 명색이 작가가 된 만큼 더 열심히 일했다. 피디 앞에서 몇 날 며칠 깨알같이 조사해서 찾아온 아이템을 브리핑할 때가 가장 신났다. 피디 마음에 드는 아이템이 없을 때는 마음에 드는 아이템을 찾을 때까지 눈에 불을 켜고 이 잡듯이 아이템을 뒤졌고 비로소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을 때는 피디가 천사처럼 보였다. 아이템을 찾고 자료조사를 하고 섭외를 하고 촬영구성안을 짜고 촬영일정을 잡고 촬영을 조율하고 촬영한 파일을 정리하고 편집구성안을 짜고 최종편집본을 점검해 원고를 쓰고 자막을 뽑고 출연자들의 인적사항을 받아서 지급을 요청하는 모든 과정이 1주일 단위로 반복됐다. 피디한테서 제때 편집본이 넘어오지 않으면 원고 쓸 시간이 촉박해 초조했지만 독촉할 수도 없었다. 종일 붙들고 써야 할 원고를 서너 시간 안에 휘갈겨 써야 할 때는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방송일은 정해져 있고 제작에 차질이 없으려면 무조건 제때 원고가 나와야 하는데 편집이 늦어지면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었다. 탈고는커녕 채우기 급급한 원고가 속상해 조금만 일찍 넘겨달라고 부탁했지만, 소득은 없었다. 네가 무능한 걸 왜 내 탓으로 돌려? 너 편해지라고 밥도 거르고 편집하란 거냐? 그렇게 기다리기 힘들면 네가 편집할래? 넌 원고를 발가락으로 쓰냐는 타박까지 들었을 땐 ‘그럼 넌 발가락으로 편집하냐? 편집이라도 잘하면 말도 안 해’를 속으로만 부르짖었다. 가끔 한두 번씩 늦어지던 편집본이 대놓고 늦어지면서 밤샘과 휴일 노동은 일상이 됐다. 겨우 원고를 넘기고 나면 한숨 돌릴 틈도 없이 자막을 뽑아야 했고 겨우 모든 작업이 끝나고 나면 곧장 다음 방송을 준비하느라 숨이 턱턱 찼지만 내가 만든 방송이 나갈 때는 온몸을 짓누르던 피로가 말끔하게 달아났다. 이 맛에 방송하는 거구나! 작가가 되길 정말 잘했어. 1주일 단위로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업무에 탄력이 붙을 무렵 할부로 장만한 노트북을 들고 회의실로 들어서는 나를 피디가 기다리고 있었다. 더는 회의에 안 들어와도 된다는 짧은 통고. 프로그램 부분 조정으로 제작비도 줄일 겸 코너 하나를 없애기로 했으니 지금 준비하고 있는 방송분까지만 준비하면 된다고. 눈앞에서 칼자루를 들고 내 목을 날리면서도 다음 주 방송은 차질없이 진행하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로부터 1주일 후 나는 방송사 마크가 선명하게 찍힌 수첩만 겨우 챙겨 들고 방송국을 나왔다. 내가 작가인지 잡가인지 헷갈리며 2년 동안 감내한 애달픈 노동을 증명해 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직 절반이 빈 페이지로 남은 수첩만이 내가 그곳에 몸담았다는 걸 말해줄 유일한 증거물이었다. 그 길로 방송사는 쳐다보지도, 돌아보지도 말았어야 했는데 나는 또 자석에 이끌리듯 방송사 문을 두드렸고 맡은 프로그램마다 혼신을 다하며 방송에 울고 방송에 웃었다. 15년 전 얼치기 막내 작가로 방송사 문을 들어설 때 솔깃했던 ‘인재상’에 비춰볼 때 ‘인재’인지는 모르겠지만 ‘밤샐 각오가 돼 있는, 방송에 대한 열정과 끼로 똘똘 뭉친’ 작가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하나의 프로그램이 끝날 때마다 쓸모를 다한 나는 미련 없이 버려졌고 또 다른 방송사를 기웃대거나 또 다른 프로그램의 콜에 응답하며 미친 듯이 프로그램에 투신했다. 방송작가에게 우아한 자판은 없었다. 자판을 두드리며 원고를 쓰는 일보다 훨씬 많은, 온갖 잡일을 쳐내는 동안 내가 작가인지 잡가인지 헷갈릴 때도 많았다. 강산이 변하고 물가가 파도치는 동안에도 꿈쩍 않는 원고료에 맞춰 살면서 오직 한길을 걸어왔으니 나란 인간도 참 어지간하다. 지난 15년 동안 방송과 부대끼며 들었던 말 중 가장 위로가 됐던 말이 있다. 어느 출연자가 한 말이었다. 방송국에선 몰라줘도 방송국 밖에선 알아주는 이가 있구나! “이 프로그램엔 피디가 없어요?” “엇, 왜요? 불러드릴까요?” “아뇨, 아예 안 보여서. 일은 작가가 다 하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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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촬영에 작가가 동행하는 모습. 방송작가 친구들 제공
방송작가유니온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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