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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잡일이 더 많은 현실…방송작가에게 우아한 자판은 없다

등록 2021-06-28 12:59수정 2021-06-28 14:26

방송작가친구들 릴레이 기고 ④ ‘방송작가도 노동자다’
쇼 프로그램 녹화 중 일하는 작가. 방송작가 친구들 제공
쇼 프로그램 녹화 중 일하는 작가. 방송작가 친구들 제공

방송작가들의 비정상적인 노동현실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당사자들의 끈질긴 문제 제기로 2020년 방송작가 2명을 해고한 <문화방송>(MBC)의 결정이 부당해고라는 중앙노동위원회 판정도 지난 3월에 나왔다. 지금 지상파 3사는 시사교양·보도 분야 작가들의 근로자성 문제로 특별 근로감독을 받고 있다. 그러나 방송 3사는 근로감독 대상 명단과 연락처를 뒤늦게 제출하거나 일부만 제출해 근로감독을 지연시키고 있다.

수십 년을 일하고도 하루아침에 잘리고 퇴직금 한 푼 없이 쫓겨나는 방송작가, 또 방송사의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전태일재단, 노회찬재단, 한국비정규직노동센터 등 노동시민사회단체들이 ‘방송작가 친구들’이라는 이름으로 뭉쳤다. 방송 3사가 이제라도 근로감독에 적극 협조하기 바라며, 네 번째 릴레이 기고를 싣는다.
푸드팀이 바빠서 방송작가가 대신 요리중인 모습. 방송작가 친구들 제공.
푸드팀이 바빠서 방송작가가 대신 요리중인 모습. 방송작가 친구들 제공.

작가인지 잡가인지

이해진 ㅣ 15년차 방송작가

일찍이 중학교 3학년 때 방송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나는 이를 위해 8년을 투자했다.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하며 보낸 4년, 방송아카데미 작가과정을 수료하고 구직 차 이곳저곳을 기웃대며 보낸 2년, 케이블방송사 무급 수습작가로 보낸 1년, 외주제작사 에프디(FD)로 보낸 1년. 그 8년은 방송작가가 될 수만 있다면 기꺼이 감내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기적처럼 방송국 막내 작가가 되어 방송사 수첩을 건네받았을 때의 감격은 지금도 생생하다. ‘밤샐 각오가 돼 있는, 방송에 대한 열정과 끼로 똘똘 뭉친 인재’를 뽑는다는 구인 문구조차 마음에 들었던 나는 급여가 얼마인지도 모른 채 일을 시작했다. 닥치는 대로 자료를 찾고, 섭외전화를 돌리고, 촬영현장을 쫓아다니고, 제작일정을 확인하고, 촬영본을 받아쓰기 하는 게 주업무였지만 부가 업무가 더 많았다.

시도 때도 없는 피디(PD)의 지시와 요구는 작가 업무와는 거리가 먼 것도 많아서 가끔은 내가 피디 비서로 취직한 것 같단 착각마저 들었다. 가끔 사적인 술자리에 불려 나가서 작가들에 대한 불평을 들어주는 것도 내 몫이었다. ‘얘는 이래서 안 돼, 쟤는 저래서 안 돼.’, ‘일을 잘하는 작가는 잘난 척해서 싫고, 일을 못 하는 작가는 멍청해서 싫고, 나이 들어서 싫고, 눈치 없어서 싫고, 솔직해서 싫고, 일밖에 몰라서 싫고.’ 대부분 일에 대한 평가보다는 사감이 개입된 악담이었다. 그리고 불평의 끝은 “두고 봐라. 곧 잘라버릴 거니까”였다. 정작 자신이 모든 작가가 기피하는 인성 제로의 무능한 피디란 걸 혼자만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주어진 모든 일을 소리 없이 해냈고 모든 부당함을 군소리 없이 감당했다.

피디 눈 밖에 나면 언제 잘릴지 모른다는 작가들의 충고대로 영혼 없이 일한 지 한 달여 만에 통장에 찍힌 금액은 30만 원이 채 안 되는 금액이었다. 피디한테 내막을 묻자 싸늘한 대답이 돌아왔다. 딱히 하는 일도 없는데 그 금액이 적냐? 일 배우는 자세가 안 돼 있다. 일이나 제대로 하지 돈부터 밝히냐? 넌 돈을 벌러 온 게 아니라 일을 배우러 온 거란 걸 잊지 마라. 며칠 후 난 ‘돈돈 하는 인간’으로 낙인이 찍혀 있었다. 프로그램 개편으로 결재와 정산이 늦어진 데 대한 사과는 한마디도 듣지 못하고 타박만 한 바가지 들었을 때, 바로 그때 이 바닥을 떠났더라면 나는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까? 하지만 오래 품어온 꿈을 쉽게 폐기할 수 없었다. 한 달에 채 120만 원이 안 되는 수입을 쪼개어 쓰면서 오직 일 잘하는 작가가 되기 위해 피디가 요구하는 ‘잡가’가 되어가고 있었다. 원룸 월세와 식비, 교통비를 빼고 나면 남는 게 없는 빠듯한 생활이었지만 1~2년만 견디면 막내 딱지를 떼고 작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던 시절이었다.

막내 작가는 항상 웃고 다녀야 팀 분위기가 밝다는 피디의 충고대로 웃음도 잃지 않았다. 네 일 내 일 구분이 없고 시작과 끝이 없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평일과 휴일이 따로 없었다.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는 잡무에 야근은 일상이었고 화장실을 갈 때는 휴대전화부터 챙겼다. 제때 전화를 받지 않으면 불같이 화를 내는 피디가 가장 무서웠다. 일주일에 하루 이상은 밤샘을 해야 했고, 못다 한 일을 싸 들고 가는 날도 많았다. 버스가 끊긴 밤에는 택시비가 아까워 방송국 소파에서 쪽잠을 자야 했고 주말 출근도 일상이었지만 잔업수당이나 휴일수당은 10원도 없었다. 그래도 전부 감수할 수 있었다. 당당한 방송작가가 될 수만 있다면.

그렇게 1년을 지날 무렵 기적처럼 프로그램의 한 코너를 맡게 됐다. 게으름 피우지 않고 열심히 일한 덕분에 막내 딱지를 빨리 떼게 됐다는 선배작가들의 칭찬과 축하가 너무나 달콤했다. 주급도 10만 원이나(?) 올라서 30만 원짜리 적금통장도 만들었다.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긴 있구나! 비록 서브 작가였지만 명색이 작가가 된 만큼 더 열심히 일했다. 피디 앞에서 몇 날 며칠 깨알같이 조사해서 찾아온 아이템을 브리핑할 때가 가장 신났다. 피디 마음에 드는 아이템이 없을 때는 마음에 드는 아이템을 찾을 때까지 눈에 불을 켜고 이 잡듯이 아이템을 뒤졌고 비로소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을 때는 피디가 천사처럼 보였다.

아이템을 찾고 자료조사를 하고 섭외를 하고 촬영구성안을 짜고 촬영일정을 잡고 촬영을 조율하고 촬영한 파일을 정리하고 편집구성안을 짜고 최종편집본을 점검해 원고를 쓰고 자막을 뽑고 출연자들의 인적사항을 받아서 지급을 요청하는 모든 과정이 1주일 단위로 반복됐다. 피디한테서 제때 편집본이 넘어오지 않으면 원고 쓸 시간이 촉박해 초조했지만 독촉할 수도 없었다. 종일 붙들고 써야 할 원고를 서너 시간 안에 휘갈겨 써야 할 때는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방송일은 정해져 있고 제작에 차질이 없으려면 무조건 제때 원고가 나와야 하는데 편집이 늦어지면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었다.

탈고는커녕 채우기 급급한 원고가 속상해 조금만 일찍 넘겨달라고 부탁했지만, 소득은 없었다. 네가 무능한 걸 왜 내 탓으로 돌려? 너 편해지라고 밥도 거르고 편집하란 거냐? 그렇게 기다리기 힘들면 네가 편집할래? 넌 원고를 발가락으로 쓰냐는 타박까지 들었을 땐 ‘그럼 넌 발가락으로 편집하냐? 편집이라도 잘하면 말도 안 해’를 속으로만 부르짖었다. 가끔 한두 번씩 늦어지던 편집본이 대놓고 늦어지면서 밤샘과 휴일 노동은 일상이 됐다. 겨우 원고를 넘기고 나면 한숨 돌릴 틈도 없이 자막을 뽑아야 했고 겨우 모든 작업이 끝나고 나면 곧장 다음 방송을 준비하느라 숨이 턱턱 찼지만 내가 만든 방송이 나갈 때는 온몸을 짓누르던 피로가 말끔하게 달아났다. 이 맛에 방송하는 거구나! 작가가 되길 정말 잘했어.

1주일 단위로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업무에 탄력이 붙을 무렵 할부로 장만한 노트북을 들고 회의실로 들어서는 나를 피디가 기다리고 있었다. 더는 회의에 안 들어와도 된다는 짧은 통고. 프로그램 부분 조정으로 제작비도 줄일 겸 코너 하나를 없애기로 했으니 지금 준비하고 있는 방송분까지만 준비하면 된다고. 눈앞에서 칼자루를 들고 내 목을 날리면서도 다음 주 방송은 차질없이 진행하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로부터 1주일 후 나는 방송사 마크가 선명하게 찍힌 수첩만 겨우 챙겨 들고 방송국을 나왔다. 내가 작가인지 잡가인지 헷갈리며 2년 동안 감내한 애달픈 노동을 증명해 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직 절반이 빈 페이지로 남은 수첩만이 내가 그곳에 몸담았다는 걸 말해줄 유일한 증거물이었다.

그 길로 방송사는 쳐다보지도, 돌아보지도 말았어야 했는데 나는 또 자석에 이끌리듯 방송사 문을 두드렸고 맡은 프로그램마다 혼신을 다하며 방송에 울고 방송에 웃었다. 15년 전 얼치기 막내 작가로 방송사 문을 들어설 때 솔깃했던 ‘인재상’에 비춰볼 때 ‘인재’인지는 모르겠지만 ‘밤샐 각오가 돼 있는, 방송에 대한 열정과 끼로 똘똘 뭉친’ 작가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하나의 프로그램이 끝날 때마다 쓸모를 다한 나는 미련 없이 버려졌고 또 다른 방송사를 기웃대거나 또 다른 프로그램의 콜에 응답하며 미친 듯이 프로그램에 투신했다. 방송작가에게 우아한 자판은 없었다. 자판을 두드리며 원고를 쓰는 일보다 훨씬 많은, 온갖 잡일을 쳐내는 동안 내가 작가인지 잡가인지 헷갈릴 때도 많았다. 강산이 변하고 물가가 파도치는 동안에도 꿈쩍 않는 원고료에 맞춰 살면서 오직 한길을 걸어왔으니 나란 인간도 참 어지간하다. 지난 15년 동안 방송과 부대끼며 들었던 말 중 가장 위로가 됐던 말이 있다. 어느 출연자가 한 말이었다. 방송국에선 몰라줘도 방송국 밖에선 알아주는 이가 있구나!

“이 프로그램엔 피디가 없어요?”

“엇, 왜요? 불러드릴까요?”

“아뇨, 아예 안 보여서. 일은 작가가 다 하나 봐요?”

영상 촬영에 작가가 동행하는 모습. 방송작가 친구들 제공
영상 촬영에 작가가 동행하는 모습. 방송작가 친구들 제공

방송작가유니온을 응원합니다

김형탁 ㅣ 노회찬재단 사무총장

미소를 짓는다. 방송작가유니온 간부들의 따스한 미소 안에는 고맙다는 마음이 가득 담겨 있는 듯하다. 어려울 때 함께 손잡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큰 힘일까. 방송작가 친구들의 대열에 노회찬재단도 참여했다. 친구에게 보내는 미소에는 믿음도 포함돼 있다. 방송작가의 든든한 친구 역할을 어떻게 해낼 수 있을까. 숙제를 받은 셈이다. 만남에는 계기가 필요하듯 노회찬재단은 많은 사람이 방송작가들의 현실을 바로 알고, 이들을 격려하는 계기를 만드는 작업에 힘을 보태려 한다.

지난 5월 미디어 비정규 공동사업단에서 주관한 방송작가노조 활성화를 위한 간담회가 열렸다. 그 자리에서 방송작가들의 현실을 널리 알려내고 지원의 힘을 모으자는 이야기가 오갔고, 공동사업단의 별칭으로 ‘방송작가 친구들’이라는 이름으로 일을 추진하기로 했다. 친구들이라는 이름으로 몇몇 단체들의 지원사업이 아니라, 많은 분의 마음을 모아 낼 수 있는 다양한 사업들을 계획해보자고 취지였다.

대한민국은 노동조합 하기 참 어려운 나라다. 30인 미만 사업장의 노동조합 조직률은 0.1%에 불과하다. 노동조합을 가장 어려운 처지에 있는 노동자들의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라고 하면, 말은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실제로는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진 이야기가 되고 만다. 노동조합도 어느 정도 처지가 되어야 생각할 수 있다. 소규모로 분산되어 일하는 노동자에게 노동조합은 먼 나라 이야기다. 열악하고 분산된 노동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앞장서서 노동조합을 하려면 시쳇말로 자신의 삶을 갈아 넣어야 한다.

대한민국은 노동조합 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노동자로 인정받기도 어려운 나라다. 노동자로 인정하는 판단 기준이 사용 종속성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경제적인 위치로 보면 분명 노동자인데도 법적으로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특수고용노동자, 플랫폼 노동자, 프리랜서 노동자가 그렇다. 노동자로 인정받느냐 못 받느냐가 뭐 그리 중요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노동자로 인정을 받지 못하면 오직 노동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여러 가지 사회보장제도 혜택에서 제외된다. 국민연금과 건강보험은 지역가입자로도 가입할 수 있지만, 고용보험과 산재보험은 노동자가 아니면 가입할 수 없다. 노동 이력을 증명하지 못하면 노동자에게 지원되는 코로나19 재난지원금의 대상에서도 제외된다.

방송작가들이 당하고 있는 부당한 현실의 개선은 작가들이 노동조합으로 모일 때 가장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프리랜서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노동조합으로 모으기가 만만치 않다. 스스로 노동자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결정적으로는 노동조합을 하면 불이익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크다. 경험하지 못한 일에는 늘 긴장과 두려움이 앞서기 마련이다.

방송작가 친구들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더불어 응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함께 행동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용기를 낼 수 있게 한다. 방송작가를 시작할 때의 꿈은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자신의 재능을 드러낼 수 있는 공간과 기회를 가진다는 건 참 가슴 벅찬 일이었을 테다. 하지만 막상 닥친 현실에 또 얼마나 고통스러워했을까. 그래서 그들의 찬란했던 꿈이 벽 없는 창살에 갇혀 있을 때, 보상 없는 노동에 막내 작가들의 꿈이 스러져가고 있을 때 함께, 아파하고 함께 소리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언론사의 존재 이유가 진실을 널리 알리는 데 있지만, 언론사 내부의 진실은 꽁꽁 묶여 드러나지 않고 있다. 진실을 다루는 기관은 여러 곳이 있다. 그중에서 언론사는 그 진실을 널리 알리는데 그 존재 이유가 있고, 그 알림은 공정의 원칙에 따라야 한다. 그러나 적어도 방송작가들에 대해서만큼은 방송사들이 자신의 존재 이유와 원칙을 저버리고 있다.

방송작가 친구들은 방송사의 임무와 원칙에 대한 주문을 강하게 할 것이다. 작가들이 보상 없는 열정으로 지쳐 쓰러지지 않아야 한다. 마땅하게 인정받는 속에서 훌륭한 작가로 성장할 수 있어야 한다. 이건 방송사를 압박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이 나라를 좋은 사회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다.

“힘내세요, 노회찬재단은 방송작가와 방송작가유니온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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