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ㅣ문미정의 ‘10대를 위한 자기방어수업’
저기까지 뛰어가겠다, 마음을 먹고서는 힘차게 팔을 저어 내달렸던 때가 있었다. “저기 보이는 철봉을 짚고 돌아오는 거야”라고 누군가 놀이 규칙을 제안하면 너 나 할 것 없이 바람을 가르며 튀어나갔다.
철봉을 짚고 재빠르게 방향을 바꾸어 출발선으로 돌아올 때, 살짝 들어올렸던 뒤꿈치와 힘이 들어간 다리, 앞뒤로 노를 젓듯 힘차게 움직이던 팔뚝의 감각을 떠올려본다. 꼭 붙잡고, 매달리고, 버티고, 밀어내고, 튀어 오르고, 뒹굴었던 움직임을 기억한다. 몸짓이 노래와 같았다. 움직임에 리듬과 화음이 있었다. 경쟁하는 놀이이기도 했고, 춤을 추는 일이기도 했으며, 공과 씨름하는 순간순간의 도전이기도 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몸짓은 달라졌다. 공간이 충분한데도 몸에 끼이는 상자에 갇혀 있기라도 한 듯 작은 움직임만을 허락한다. 팔을 들어 올릴 때는 몸통에 팔을 기어이 붙여놓는다. 어깨에서 팔꿈치까지만이라도 최대한 몸통에 붙여놓고, 손목과 팔뚝 정도를 이용해서 작게 움직여보는 것이다.
팔의 움직임보다 더 엄격하게 갇힌 것은 다리의 움직임이다. 참 이상한 일이 아닌가? 안정적으로 땅에 발을 딛고 균형을 잡을 때, 무릎을 살짝 굽히고 큰 움직임을 준비할 때, 위로 올라가거나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힘을 받고자 할 때, 무수히 많은 순간에 왼쪽 무릎과 오른쪽 무릎은 서로 멀어져서 각자의 균형자리를 찾아내는데, 왜 이유 없이 움직임을 방해하는 규칙을 만들어내었을까?
그러다가 급기야 발목만을 쓰면서 달리게 되기도 한다. 훌륭한 축구팀에서 선수들이 다른 선수의 움직임과 공의 위치에 따라 자리를 바꾸어가며 각자의 역할을 해내듯이, 몸은 리듬감 있는 움직임을 안다.
내 몸은 마치 팀워크가 아주 좋은 집단처럼 서로의 움직임에 맞추어 밖으로 펼치고 안으로 굽히며 움직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완전히 무시하고 ‘조신한’ 몸짓으로 바뀌어가고 있다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몸을 상자에 가둔 범인은 시선이다. 남들이 나의 몸과 움직임에 대해서 내리는 평가가 시선이다. 거울과 카메라를 통해서도 시선을 만난다. 거울을 보면서 사진을 보면서, 거울 좀 보라고 이 사진 좀 보라고 하는 말을 들을 때, 상자는 만들어지고 두꺼워지고 작아진다.
‘여자다움’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들은 가장 먼저 몸에 대해 간섭하기 시작한다. 몸은 어떠해야 하고, 몸짓은 어떠해야 한다고들 한다. 그래서 몸을 상자에 가두더니 이제는 그 움직임이 우스꽝스럽다고 놀려댄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나는 안 그런데요, 내 친구들은 안 그래요, 우리 반 친구들은 안 그래요”라고 말을 하는 10대들이 있다. 그 말끝에는 자부심이 묻어 있다. 웃음이 번져난다. 우리를 상자 속에 가두려는 사회가 있지만,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상자를 뚫고 나오는 몸짓을 만난다.
애초에 상자 따위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는 듯, 몸짓은 힘차고 자유롭다. 그런 몸짓이 많아지면 좋겠다. 팀 경기도 하고, 힘겨루기도 하면 좋겠다. 억눌린 몸짓이 마음마저 억누르지 못하도록 활개를 치면 좋겠다. 몸과 마음은 연결되어 있다.
문미정 ㅣ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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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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