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ㅣ김선호의 우리 아이 마음 키우기
“민지야~ 선생님한테 볼펜이 두 개 있어. 네 맘에 드는 거 하나 골라서 가져.” “정말요? 뭔데요? 어디요?”
민지는 볼펜을 좋아했다. 필통은 다양한 볼펜들로 가득 차 있었다. 민지에게 볼펜은 가슴 설레게 하는 물건이었다. 민지는 두 볼펜 중 어떤 것을 가질지 망설였다. 결정하기 어려워했다. 결국 눈 감고 집기로 했다. 나는 볼펜 두 개를 쓱 치운 다음 말했다.
“민지야. 눈 뜨고 직접 너의 의지로 골라봐! 운에 맡기지 말고.” “너무 힘들어요. 둘 다 너무 좋고…. 잘못 고르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눈을 뜨고 골라야지. 그래야 너의 선택에 책임을 질 수 있는 거야.”
민지에게 갑자기 볼펜을 준 이유는 이것 때문이었다. 민지는 자주 망설였다. 발표하다가도 망설였고, 친구들이 놀자고 할 때도 망설였고, 누가 초대해도 망설였고, 놀이 규칙을 정할 때도 망설였다. 대답은 늘 한결같았다. “그냥, 아무거나 해. 난 괜찮아.”
스스로 선택하는 결정의 순간, 책임이 생기고, 그 책임을 감당할 때 존재감이 드러난다. 자존감은 우연에 의한 행동들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잘못된 선택이든, 잘한 선택이든 자신이 직접 판단하고 선택하고 결정하는 과정을 묵묵히 걸어갈 때 견고해진다.
초등학생들에게 어떤 선택의 기회를 줄 때 서너 가지 정도 예시를 주면서 결정하라고 하는 것이 좋다. 예를 들어 오늘 글쓰기 주제는 자유니까 아무거나 쓰라고 하는 것은 좋지 않다. 너무 범위가 넓어서 어디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망설이는 시간이 길어진다. 또는 한 가지 주제를 주고 쓰라고 하는 것도, 선택의 폭이 제한되기 때문에 흥미를 느끼기 어렵다.
하지만 서너 가지 예시를 주고, 그중 한 가지 주제를 선택해 글을 쓰라고 하면 앞의 두 경우에 비해 더 호기심을 갖고 글쓰기에 임한다. 실제로 고려대 연구팀이 초등학생들을 세 그룹으로 나누어 위 방법대로 실험했을 때,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자유롭게 선택하라고 했던 그룹이 가장 흥미가 낮았고, 선택지 없이 한 가지 주제가 정해진 그룹은 중간 정도의 호기심을 보였다.
자주 망설이고 선택을 자꾸 뒤로 미루는 아이들은, 완벽한 선택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어서 그렇게 한다. 일상에서 선택은 계속 수정된다. 선택하고 잘못됐으면 또다시 선택하고, 또 수정하고,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점점 완성에 가까워진다.
그냥 한 번에 완벽함에 가까운 선택을 하려는 시도는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게 만든다.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우연에 의지하는 과정은 자존감에 긍정적이지 않다. 자존감은 ‘선택’과 ‘결정’ ‘실행’에 이르는 단계까지 자주 경험해볼수록 높아진다. 그 과정은 실패했든 성공했든 자신이 생생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자녀에게 서너 가지의 선택거리를 자주 제시해보자. 자존감이 쑥쑥 크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김선호 ㅣ 서울 유석초등학교 교사, <초등 자존감의 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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