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적 독립운동가인 안창호 사진 밑에는 아무런 설명도 없지만, 친일파인 이종린 사진 밑에는 긴 설명을 하면서도 친일 행적에 대한 지적이 담겨 있지 않다.
이승만과 대립한 안창호 깎아내려
김활란·유치진 등 친일 침묵
김활란·유치진 등 친일 침묵
친일·독재 미화는 물론 각종 오류가 드러나면서 논란을 일으킨 교학사의 고교 한국사 교과서가 교육부의 수정명령 절차를 거쳐 최종 승인을 받은 뒤에도 같은 문제를 숱하게 안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학교 현장에서 이 교과서로 역사를 가르쳐도 될지 의구심이 일 정도다.
민족문제연구소가 17일 공개한 교학사 교과서의 문제점을 보면,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에 대한 서술은 축소하거나 왜곡한 반면 친일파에 대해선 친일 행적을 제외한 채 많은 지면을 할애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표적인 경우가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에 대한 설명이 미흡한 점이다. 교학사 교과서는 210쪽에 안창호 사진을 싣고 있는데, 사진 아래 설명에는 ‘안창호(1878~1938)’라고만 적혀 있을 뿐, 아무런 설명도 없다. 안창호는 건국훈장 중 최고 등급인 ‘대한민국장’을 받은 인물이다. 대조적으로 265쪽에 실은 거물 친일파 이종린의 사진에는 두 문장 정도의 설명이 달려 있는데, 친일 행위에 대한 지적은 빠졌다.
또 교학사 교과서는 ‘수양동우회(안창호가 조직한 민족운동단체) 사건’을 설명하면서 “안창호의 뜻에 따라 이광수, 주요한 등이 중심으로 활동하였는데 (중략) 이광수 등은 출옥하여 친일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서술했다. 안창호와 친일파 이광수의 관계에 주목하는 듯한 서술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쪽은 안창호가 당시 이승만과 대립관계였다는 점에서, 이승만을 미화하려는 저자들이 안창호의 업적을 축소·왜곡하려 한 것이라는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일제는 모든 한국인들에게 굴종과 전쟁에 대한 협력을 요구하였고, 강요를 이기지 못한 이들은 이에 따랐다”는 대목은 일제 때의 친일이 오로지 강요에 의한 것이었을 뿐 자발적인 친일은 아니었다는 친일파의 논리를 대변하는 듯하다.
교학사 교과서는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선정한 친일파 가운데 김성수·김활란·유치진·안익태·이광수·이병도·이상범·이종린·장덕수·최남선·최린·최승희·현상윤·홍난파 등 14명을 다루면서 김성수·이광수·최남선·최린 등 일부에 대해서만 친일 경력을 조금 소개할 뿐 나머지 인물의 친일 행위에 대해서는 설명조차 하지 않았다.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총장은 “정부가 교학사 쪽에 특혜를 주려다 보니 검정은 물론 수정명령 등의 과정이 졸속으로 이뤄져 이런 황당한 교과서가 나왔다. 어제 수능 세계지리 문제 오류 논란에 대한 판결에서 법원이 ‘교과서대로 공부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해 교과서의 중요성이 더 커진 상황에서 우려가 크다”고 말했다.
음성원 기자 es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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