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2월 지부 동료들과 서울 북악산에 오른 이성대 전교조 서울지부 연대사업국장(가운데). 전교조 제공
정부, 전교조 노조지위 박탈
빌미된 해직교사 이성대씨
“내치지 않은 동료들 고마워
우리세대 더 싸워야 했나”
빌미된 해직교사 이성대씨
“내치지 않은 동료들 고마워
우리세대 더 싸워야 했나”
1987년, 처음으로 발령받은 서울 관악구 봉천중학교(현 인헌중) 교단에 섰을 때 빡빡머리 중학생들이 물었다. “서울대 나와서 왜 돈 많이 주는 회사 안 가고 선생님이 됐어요?” 27살 앳된 얼굴의 선생님은 말했다. “교사가 빛이 나는 직업은 아니지만 너희들을 만날 수 있으니 평생 보람을 느끼며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단다.”
하지만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겪으며 학생운동을 한 젊은 이성대 교사의 마음은 ‘군대와 다름없던’ 학교의 현실 앞에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 찼다. 교사들이 휘두르는 몽둥이에 학생들의 엉덩이에선 멍이 떠나지 않았다. 부장교사는 임신한 여교사 옆에서 담배를 피워댔다. 교장은 학교 물품을 구입한 것처럼 허위 문서를 만들어 오라고 교사에게 지시했다.
이 교사에게 전교조는 학교를 민주적으로 바꿀 유일한 희망이었다. 전교조가 1989년 5월 설립되고 ‘촌지 안 받기’ 등 ‘참교육 실현 운동’으로 학교엔 새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 교사가 전교조에 가입하자 교장만이 아니라 대학 때 지도교수까지 고향에 있는 이 교사의 부모를 찾아가 전교조에서 탈퇴시키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결국 4개월 만인 89년 9월 이 교사를 포함한 전교조 조합원 1527명은 거리로 내몰렸다.
4년 반 동안의 해직교사 시절은 힘들었지만 함께하는 사람이 있었다. 해직 기간 내내 가르치던 학생들이 편지를 보내고 집으로 찾아왔다. 전교조 해직교사였던 지금의 아내를 복직투쟁 현장에서 만났다. 연애 6개월 만인 1990년 결혼해 관악구 신림동 반지하방에 월세를 얻어 신혼살림을 차렸다. 그해 말 아기가 태어나자 이 교사는 출판사에 취직해 3년간 일하며 가족을 건사했다. “그 아이가 벌써 대학생이 돼서 군대를 제대했다니까요.” 이 교사는 새신랑 시절로 돌아간 듯 웃었다.
1994년 김영삼 정부에서 해직교사들이 다시 특별채용되고, 1999년 합법노조가 됐을 때는 꿈만 같았다. “저도 교사인데 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는 것이 더 좋죠. 다시는 거리에 나가지 않아도 될 거라 생각했어요. 정부와 단체교섭을 하면서 합리적으로 요구하면 교육 문제를 풀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죠.”
2008년 서울시교육감 선거 당시 전교조 서울지부 부지부장이었던 이 교사는 선거 참여를 독려하는 문자메시지를 조합원들에게 보냈다는 이유로 당시 지부 간부 6명과 함께 재판을 받고 결국 지난해 12월 해직당했다.
박근혜 정부는 24일 전교조에 ‘노조 아님’을 통보하면서, 전교조 서울지부 연대사업국장인 이 교사를 포함한 해직교사 9명을 그 이유로 지목했다. 하지만 전교조 조합원들은 지난 18일 결과가 나온 총투표에서 이들을 내치지 않았다. 이 교사는 동료 조합원들이 고맙고 자랑스럽다.
“해직의 고난을 당하고 제 젊은 시절을 다 바쳐 합법노조로 만든 전교조인데 이것마저 못하게 하는가 생각하니 밤잠이 안 왔습니다. 제 세대가 더 열심히 싸웠어야 했나 반성도 했고요.” 이 교사는 말을 잇지 못했다.
올해로 53살인 이 교사는 26년 전 처음 교단에 섰던 자신처럼 젊은 전교조 조합원 교사들을 생각한다. “오늘이 큰 시련인 것 같아도 해직교사들이 했던 대로 후배 교사들이 제자들을 참되게 가르치고 학부모님들을 진실되게 만나면 전교조는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이성대 전교조 서울지부 연대사업국장이 24일 저녁 부서울청사 앞에서 열린 ‘전교조 탄압분쇄 수도권교사 결의대회’에 참여하고 있다. 전교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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