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 민주화투쟁의 기지로 찍힌 박형규 목사의 서울제일교회는 80년대 들어서도 6년간 예배방해라는 초유의 탄압을 겪었다. 방북 며칠 전인 89년 3월19일 문익환 목사(오른쪽)가 노상예배에서 설교를 하고 있다.(왼쪽 사진)박형규 목사(왼쪽)와 그의 6차례에 걸친 옥살이를 뒷바라지하면서 투사로 변신한 부인 조정하씨. 지난해 10월 부인이 작고할 때까지 66년간 해로한 부부의 삶은 개신교 민주화운동사 그 자체였다.
그때 그 사람 민주화운동길 ‘백제의 미소’ 박형규 목사
지난해 5월 박형규 목사의 회고록 <나의 믿음은 길 위에 있다>(창비)를 읽으며 나는 시인 민영이 4·19혁명 때 읊었던 노래를 떠올렸다. “저 이름 없는/ 풀포기 아래/ 돌멩이 밑에/ 잠 못 이루며/흐느끼는/ 귀뚜라미 울음.”(‘수유리 2’)
한국 기독교회의 오늘이 있기까지, 박형규 목사가 우리 앞에 저렇게 ‘백제의 미소’로 서 있기까지 얼마나 ‘잠 못 이루며 흐느끼는 귀뚜라미 울음’이 있었는지 새삼 놀라웠다.
1970년대 초반 한국 기독교회가 신구 교회 막론하고 민주화 투쟁이라는 현실 역사로 뛰어들었을 때, 그것은 분명 천군만마의 구원이었으되, 뜻밖이었다. 거기에 박형규 목사가 있었지만, 사람들에겐 낯설었다.
59년 목사 안수를 받을 때도 썩 기쁘지만은 않았다던 그는 1년 뒤 ‘4·19혁명’을 겪으며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일”에 자신을 바치기로 결심한다. 64년 한일회담 반대투쟁에 참여한 뒤 교회갱신운동을 벌이더니, 한국기독학생회 총무를 맡아서는 ‘한국의 복음화’라는 구호와 목표를 ‘기독교의 한국화’로 바꾸는 일대 혁신을 시도한다. 도시빈민 문제를 계기로 ‘교회의 선교’에서 ‘하나님의 선교’로 나아갔다. 개인의 구원 중심에서 하나님의 피조물인 사회 전체의 구원, 즉 정치·사회·경제 등 총체적 구원을 목적으로 삼았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인권위원장 때는 <인권소식>을 발간해 교회가 언론의 구실까지 담당했다.
그는 이런 ‘하나님 선교’ 활동을 통해 “선교와 정치가 분리될 수 없다는 것”, “자유가 없는 곳에서는 선교의 자유도 없고 이웃사랑도 할 수 없다는 것”, “정치적 투쟁 없이는 자유를 얻을 수 없다”는 확신을 다졌다.
그러나 그 길은 고난의 행진이었다. 73년 남산 야외음악당 사건, 74년 민청학련 사건, 75년 수도권 선교자금 사건…, 여섯차례나 옥살이를 했다. 하지만 그는 ‘목사로서 감옥에 가는 것은 성경적으로 보면 당연하다. 구약시대부터 예언자들은 항상 감옥 출입하는 것을 당연히 여겼다. 원래 한국에 들어온 기독교도 역사에 참여하는 종교였다’며 기꺼이 감내했다.
가장 혹독했던 시련은 그가 72년부터 목회를 맡은 서울제일교회 박해사건이었다. 83년 예배방해로 시작해 장장 6년간 노상예배로 내몰렸던 그는 총 60시간에 걸친 감금에 살해 위협, 백주의 테러까지 당했다. 하지만 서울 오장동 제일교회 근처에서 신자들과 함께 모여 중부경찰서 앞으로 예배를 드리러 가는 ‘정의와 평화를 위한 십자가 행진’을 하면서 노상예배는 끈질기게 계속되었다. 그곳은 ‘세상에서 가장 큰 교회’이자 시대의 아픔을 나누는 광장이자 민주화운동의 현장이 되었다. 박해를 받을수록 기쁨이 되는 신앙의 신비가, 마침내 비폭력이 폭력을 이긴 것이다.
박형규 목사는 함석헌 선생이 붙여준 “하나님의 발길에 차인 사람”이란 말을 좋아하는데, 이는 자신의 의지로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겸양의 뜻이다. 그 말은 어쩌면 그의 부인 고 조정하님의 삶에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18살에 중매결혼해 시어머니가 96살로 돌아가실 때까지 오랜 시집살이를 해낸 그는 남편이 처음 구속됐을 때만 해도 울기만 했다. 회고록에서 “험난한 시대가 가져다준 시련이 얌전하고 착한 주부를 맹렬한 여성투사로 바꾸어놓았다”고 썼듯이, 남편의 고난에 동참하면서 그는 두 아들과 함께 투옥까지 당하며 구속자가족협의회 대표와 기독교장로회 총회장으로 활약했다. 지난해 12월 추도사를 썼던 고인의 영전에 일찍이 83년 박 목사가 했던 강론의 한마디를 다시 올린다.
“영원한 생명은 죽음을 통해 온다. 축복은 가난을 통해 오고 부활은 죽음에서부터 온다. 힘없는 사람만이 죽음의 세력을 극복한다. … 이것이 생명의 역설이다.”
정리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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