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청학련 관련 양심수들의 구명운동에 적극 나섰던 김수환 추기경(왼쪽 둘째)은 1976년 9월 김지하 반공법 위반 재판 때 직접 특별변호인으로 나설 결심까지 했다. 사진은 그 무렵 김 시인 재판 방청을 마치고 나온 김 추기경이 홍성우 변호사(맨 오른쪽)에게 담배를 나눠주는 모습. 송건호 한겨레신문사 초대 대표이사(맨 왼쪽)와 황인철 변호사(오른쪽 둘째)가 지켜보고 있다.
김정남의 ‘증언, 박정희 시대’
⑬김지하 보안법 재판
⑬김지하 보안법 재판
■ 인권변론의 한 전형
1975년 6월29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아시아·아프리카 작가회의는 ‘제3세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로터스상 특별상’을 김지하에게 수여하기로 결정했다. 이어 ‘김지하는 현재 아시아뿐 아니라 전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시인의 한 사람으로서 한국의 다른 정치범들과 함께 자유와 민주주의의 상징이다’라는 내용의 석방 요청서를 박정희 앞으로 발송했다. 그 무렵 그는 75년도 노벨문학상 후보로도 추천받았다. 앞서 3월13일 석방 27일 만에 재구속된 김지하는 재판부 기피 신청에 대한 법원의 판결을 기다리는 중에 양심선언을 발표했다. 그로부터 한달쯤 뒤인 9월16일은 1심 구속기간(6개월)이 만료되는 날이었다. 구속영장의 효력이 정지되는 것이다. 그러자 유신정권은 비열한 편법을 썼다. 형식상으로는 김지하를 구속기간 만기로 풀어주되, 대신 지난해 민청학련 사건으로 선고받은 무기징역형에 대한 형집행정지 결정을 취소했다. 문서상으로만 석방하고 신병은 무기수로 묶어둔 셈이다. 법적으로는 불구속 상태라 김지하의 보안법 위반 재판은 하염없이 미뤄지다가 76년 5월18일 비로소 재개됐다. 김지하는 ‘말뚝’ ‘장일담’ 등 작품구상 메모와 관련한 검찰의 심문에 대해 “자신의 그때그때 상념, 기억, 착상을 자기만이 알아볼 수 있는 기호로 적어놓은 메모를 근거로 한 사람의 사상을 평가한다거나, 또는 아직도 완성되지 않고 더욱 작품화할지도 모르는 구상을 (법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마치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네 머릿속의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연행, 문제삼는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그해 9월28일 제12회 공판까지는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됐다. 검찰 쪽 감정증인으로 나온 유정회 의원 신상초는 김지하의 ‘말뚝’ 구상이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을 다룬 작품으로서 전형적인 공산주의문학이요, 따라서 김지하의 사상은 공산주의라는 억지 주장으로 일관했다. 신상초는 계속 땀을 뻘뻘 흘리면서 증언했는데 김지하가 “70년에 당신을 만났을 때 <오적>을 칭찬하면서, 만약 법적인 문제가 생기면 자신이 잘 아는 한아무개 변호사를 소개해 주겠다고까지 말하지 않았는가” 묻자, “그때 ‘오적’이 부패문제를 공격한 것은 맞지만 십중팔구 오해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 것”이라고 궁색한 변명을 했다. 반면 김승옥은 변호인 쪽 증인으로 나와 ‘오랫동안 지켜봐온 김지하는 결코 공산주의자일 수 없는 사람’이라고 단언했다. 비공개로 구치소에서 있었던 증인심문에서 정의구현사제단의 함세웅·문정현 신부는 “인혁당 사건이 조작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심지어 내외의 이목이 집중돼 있는 ‘3·1민주구국선언’ 사건에서조차 조작이 이뤄지고 있는 판이다. 인혁당이 조작이라는 것은 천하가 다 안다”고 증언했다. 제12회 공판에서 변호인 쪽은 시인 구상, 이한택 신부의 감정의견서와 함께 작가이자 언론인인 선우휘의 소견서를 제출하면서, 공개된 법정에서 의견을 말할 수 있도록 이들을 증인으로 채택해줄 것을 요청했다. 아울러 김수환 추기경을 특별변호인으로 선임해줄 것을 요구했다. 김지하의 작품구상 ‘말뚝’이나 ‘장일담’에서 민중의 봉기와 구원, 혁명과 종교의 통일이 과연 신학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것인지, 가톨릭 교리와 사상에 대해 말씀을 듣자는 것이었다. 김 추기경한테 허락도 받았다. 김 추기경은 “내가 법정에서 잘할 수 있을까” 하면서 다소 흥분된 어조로 그 뜻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재판부는 직권으로 이 모두를 거부했다. 김지하는 ‘첫째, 자신에게 결정적으로 유리한 증인을 채택해주지 않음으로써 공정한 재판을 기대하기 어렵고, 둘째, 사건의 성격상 충분한 심리가 요청됨에도 불구하고 이유없이 서두르는 것을 납득할 수 없다’고 또다시 재판부 기피 신청을 했다. 이로써 재판은 그해 12월14일 13회 공판이 열리기까지 무기연기됐다.
■ 구상과 선우휘의 의견서
구상 시인의 감정의견서는 황인철 변호사의 부탁으로 김병익이 썼는데, 뒷날 황 변호사에 대한 회고담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76년이었을 것인데, 그(황인철)가 반공법으로 구속중인 김지하의 옥중메모 ‘장일담’에 대한 감정을 우리에게 부탁해왔다. 그때 그와 홍성우 변호사는 고은·백낙청과 함께 나를 정릉의 한 방갈로에 초청한 자리에서 문제의 메모를 검토해서 소견서를 써달라고 했다. 주로 그가 메모의 성격과 문제점을 자상히 설명해 주었고, 우리는 밖으로 유출돼서는 안 된다는 그 두툼한 메모를 돌려가며 검토했다. 이튿날 집으로 돌아온 나는 하룻밤을 꼬박 새우며 200자 원고지로 100장을 넘을 만큼 꽤 길게 소견서를 썼다. 한없이 진지하고 뜨거웠던 그 밤, 그리고 그 글을 마치고 났을 때 창밖으로 부옇게 밝아오던 새벽빛…. 그 원고를 받고 그는 정말 대견해하고 고마워했다. 그 감정서는 법정에서 한 원로 문인의 이름으로 제출되었다고 한다.”
구속 이듬해에야 재개
6개월 구속기간 만료되자
문서로만 석방하고
민청학련 사건 집행정지취소
몸은 무기수로 묶어 이 감정서는 “문학 작품이라는 것은 사회과학 이론과 달라 바로 현실적 수단으로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이 상식이다. 하물며 작품으로 구성되기 전의 창작 메모를 놓고 어떤 정치운동·폭력활동의 예비행위로 단정하는 것은 메모 자체뿐 아니라 인간의 사상, 문학 창작의 심리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데서 빚어진 것”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예수회신학원 원장이던 이한택 신부의 감정서는 사실은 내(김정남)가 썼다. 가톨릭 역대 교황의 회칙,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 등을 토대로 정리해 이 신부의 감수를 받은 것이다. 구속자가족협의회 김한림 총무가 인철지에 먹지를 대고 옮겨적은 감정서의 요지는 이렇다. “증거로 제출된 4권의 메모첩을 관통하는 사상은 ‘자유·민주주의는 중요하다. 그러나 참된 자유란 주리는 자가 배부르고, 묶인 자가 풀리며, 헐벗은 자가 입고, 병든 자가 나으며, 죽은 자가 영생하고, 절망한 자가 영원한 희망을 얻는 것이다’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리고 김지하의 작품 구상은 모두가 ‘네 이웃이 주리는 한 너는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다’는 말씀으로부터 출발한다.” 선우휘의 소견서는 독특했다. 그는 굳이 옥중메모를 읽어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의 논지는 간결하고 명확했다. “김지하의 사상적 판단에 있어서 나에게 적지 않게 충격을 안겨준 것은 그가 명백히, 그리고 강렬하게 자기는 결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는 바로 그 점입니다. 나의 직관적인 판단임과 동시에 논리적인 사고를 거친 결론부터 말한다면 ‘김지하는 결코 공산주의자는 아니다’고 확신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가 법정에서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단언한 이상, 그는 공산주의자가 아닙니다. … 그는 시인입니다. 시인은 말할 나위도 없이 진실을 읊는 사람입니다. 갖은 세속의 영욕을 도외시하며 때로 도덕가가 위선을 하며 성직자가 독선으로 행동하는 시대상황 속에서도 인간의 진실을 읊는 것이 시인입니다. 독실한 신앙심을 갖고 끊임없이 진실을 추구하는 시인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습니다.” ■ 4시간에 걸친 변론
76년 12월14일 제13회 공판에서 김지하는 징역 10년에 자격정지 10년을 구형받았다. 12월23일 오후 제14회 공판에서는 변호인의 최종변론과 김지하의 최후진술이 이루어졌다. 변론요지서는 내가 썼는데, 재판기록을 집에 가져가기가 부담스러워 무교동에 있는 한 여관을 잡아 며칠 동안 작업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법정에서 변호인 6명이 4시간에 걸쳐 나눠 낭독해야 할 만큼의 분량이었다.
또 재판부 기피신청
시인 구상 등 증인채택 요구
김수환 추기경은
특별변호인 신청했으나
재판부 직권으로 모두 거부 박세경 변호사로부터 시작된 변론은 이돈명·이세중·조준희·황인철·홍성우의 순으로 이어졌다. 변론의 결론이랄까, 그 마지막은 이러했다. “변호인 쪽은 끝내 가족 접견과 통신, 독서가 일체 허용되지 않은 채 진행된 이 재판에 대해 심심한 유감을 표시하는 바이며, 아울러 그러한 혹독한 상황하에서 변호인 쪽이 피고인에게 조금도 도움이 못 되어 주었던 점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면서 한편으로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당당하게 자신의 소견을 피력·진술해준 피고인의 용기에 대해 경탄해 마지않는 바입니다. … 본 사건은 피고인의 구체적 행위, 즉 옥중메모 작성 및 인혁당 관계 발언이 반공법에 저촉되는 예비행위냐 아니냐를 가리는 재판인 동시에 피고인의 사상이 공산주의적이냐 아니냐를 가리는 재판입니다. 이 두 가지를 따로 떼어서 하나하나를 증거와 법리에 의해 냉정히 검토해 본다면 그 어느 쪽에서도 피고인은 무죄를 선고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습니다. 변호인 쪽은 일체의 선입관 없이 피고인의 정확하고도 정직한 진술에 따라 그 내용들이 평가되고 분석될 것을 희망합니다. 본 변호인 쪽은 본건에 대하여 단호히 무죄를 주장합니다. 자유를 사랑하고 민주주의를 사랑하며 누가 보아도 그 용기와 재능과 식견에는 탄복할 수밖에 없는 대한민국의 한 젊은 시인이 공산주의자의 누명을 쓰고 반공법 위반자로서 처벌되어야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사법사에 크나큰 오점을 남기는 일이며, 또한 국가적으로도 크나큰 손실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날의 재판은 밤 10시까지 계속되었다. 변론에 이어 김지하의 최후진술에 3시간15분이 걸렸다. 76년 12월31일 그에게는 기왕의 무기징역에 덧보태어 징역 7년에 자격정지 7년이 선고되었다. 김지하의 재판은 인권변론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우여와 곡절은 있었지만, 비교적 충분한 진술기회가 주어졌고, 변론은 성실했으며 재판기록도 완벽하게 정리되었다. 김 추기경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애정 어린 성원과 세계적인 관심 속에 진행됐다. 첫 재판은 죽음의 공포를 안고 시작되었지만, 최후진술이 끝났을 때는 모두가 감동이었다. 나로서는 인권변론에 깊이 관여하게 되는 첫 사건이었다. ■ ‘박정희 선생의 머리 위에도 은총을’
“나는 시인입니다. 시인이라는 것은 본래부터가 가난한 이웃들의 저주받은 생의 한복판에 서서 그들과 똑같이 고통받고 신음하며 또 그것을 표현하고 그 고통과 신음의 원인들을 찾아 방황하고 그 고통을 없애며 미래의 축복받은 아름다운 세계를 꿈꾸고, 그 꿈의 열매를 가난한 이웃들에게 선사함으로써 가난한 이웃들을 희망과 결합시켜 주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참된 시인을 민중의 꽃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최후진술 3시간15분
“인혁당 사람들은 억울
비극은 원한을 만들어내…
하늘은 머지않은 장래에
역사를 통해서 심판할 것” “인혁당 사람들은 억울합니다. 그것은 비극입니다. 이 비극은 반드시 원한을 만들어냅니다. 그들과 그들 가족들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칠 때 하늘은 분명히 머지않은 장래에 역사를 통해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우리 세대 전체를 명백한 불의를 보고서도 일신의 더러운 안전과 평안을 위해서 침묵을 선택한 불의의 공범집단으로서 단죄할 것입니다. 여러분(방청객과 모든 사람들)! 노력을 아끼지 말아 주십시오.” 그날 밤 김지하의 최후진술은 절절하게 이어졌다. 이는 김지하의 양심선언과 함께 시대적 증언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 마지막 부분은 더 감동적이다. “하느님의 은총이 이 불행한 민족 위에 폭포수처럼 쏟아져서 다시는 샛별 같은 청년들이 이 더러운 분단의 비극 때문에 법정에 끌려와서 청춘이 시들게 되는 일이 없도록 끝없이 기원하겠습니다. 그리고 내일 주의 성탄절을 맞이해서 여러분에게 축복이 내리고 나를 박해하고 그렇게 미워하는 현 정부 최고 지도자 박정희 선생과 중앙정보부의 고급요원들에게도 가슴과 머리 위에 흰 눈처럼 은총이 폭폭 쏟아지기를 빕니다. 자비로운 은총이. 그래서 용서하시고 모두 축복받기를 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수석 <한겨레 인기기사>
■ 김진표·최인기·강봉균 떨고 있다
■ ‘오류 통계’로 무역협 “한국 세계 8위” 발표할 뻔
■ 대만계 MBA 스타 린한테 ‘찢어진 눈’
■ 정부, 비판적 전문가는 빼고 4대강 특별점검
■ 한약·기체조도 중국에 사용료 지불?
1975년 6월29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아시아·아프리카 작가회의는 ‘제3세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로터스상 특별상’을 김지하에게 수여하기로 결정했다. 이어 ‘김지하는 현재 아시아뿐 아니라 전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시인의 한 사람으로서 한국의 다른 정치범들과 함께 자유와 민주주의의 상징이다’라는 내용의 석방 요청서를 박정희 앞으로 발송했다. 그 무렵 그는 75년도 노벨문학상 후보로도 추천받았다. 앞서 3월13일 석방 27일 만에 재구속된 김지하는 재판부 기피 신청에 대한 법원의 판결을 기다리는 중에 양심선언을 발표했다. 그로부터 한달쯤 뒤인 9월16일은 1심 구속기간(6개월)이 만료되는 날이었다. 구속영장의 효력이 정지되는 것이다. 그러자 유신정권은 비열한 편법을 썼다. 형식상으로는 김지하를 구속기간 만기로 풀어주되, 대신 지난해 민청학련 사건으로 선고받은 무기징역형에 대한 형집행정지 결정을 취소했다. 문서상으로만 석방하고 신병은 무기수로 묶어둔 셈이다. 법적으로는 불구속 상태라 김지하의 보안법 위반 재판은 하염없이 미뤄지다가 76년 5월18일 비로소 재개됐다. 김지하는 ‘말뚝’ ‘장일담’ 등 작품구상 메모와 관련한 검찰의 심문에 대해 “자신의 그때그때 상념, 기억, 착상을 자기만이 알아볼 수 있는 기호로 적어놓은 메모를 근거로 한 사람의 사상을 평가한다거나, 또는 아직도 완성되지 않고 더욱 작품화할지도 모르는 구상을 (법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마치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네 머릿속의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연행, 문제삼는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그해 9월28일 제12회 공판까지는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됐다. 검찰 쪽 감정증인으로 나온 유정회 의원 신상초는 김지하의 ‘말뚝’ 구상이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을 다룬 작품으로서 전형적인 공산주의문학이요, 따라서 김지하의 사상은 공산주의라는 억지 주장으로 일관했다. 신상초는 계속 땀을 뻘뻘 흘리면서 증언했는데 김지하가 “70년에 당신을 만났을 때 <오적>을 칭찬하면서, 만약 법적인 문제가 생기면 자신이 잘 아는 한아무개 변호사를 소개해 주겠다고까지 말하지 않았는가” 묻자, “그때 ‘오적’이 부패문제를 공격한 것은 맞지만 십중팔구 오해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 것”이라고 궁색한 변명을 했다. 반면 김승옥은 변호인 쪽 증인으로 나와 ‘오랫동안 지켜봐온 김지하는 결코 공산주의자일 수 없는 사람’이라고 단언했다. 비공개로 구치소에서 있었던 증인심문에서 정의구현사제단의 함세웅·문정현 신부는 “인혁당 사건이 조작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심지어 내외의 이목이 집중돼 있는 ‘3·1민주구국선언’ 사건에서조차 조작이 이뤄지고 있는 판이다. 인혁당이 조작이라는 것은 천하가 다 안다”고 증언했다. 제12회 공판에서 변호인 쪽은 시인 구상, 이한택 신부의 감정의견서와 함께 작가이자 언론인인 선우휘의 소견서를 제출하면서, 공개된 법정에서 의견을 말할 수 있도록 이들을 증인으로 채택해줄 것을 요청했다. 아울러 김수환 추기경을 특별변호인으로 선임해줄 것을 요구했다. 김지하의 작품구상 ‘말뚝’이나 ‘장일담’에서 민중의 봉기와 구원, 혁명과 종교의 통일이 과연 신학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것인지, 가톨릭 교리와 사상에 대해 말씀을 듣자는 것이었다. 김 추기경한테 허락도 받았다. 김 추기경은 “내가 법정에서 잘할 수 있을까” 하면서 다소 흥분된 어조로 그 뜻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재판부는 직권으로 이 모두를 거부했다. 김지하는 ‘첫째, 자신에게 결정적으로 유리한 증인을 채택해주지 않음으로써 공정한 재판을 기대하기 어렵고, 둘째, 사건의 성격상 충분한 심리가 요청됨에도 불구하고 이유없이 서두르는 것을 납득할 수 없다’고 또다시 재판부 기피 신청을 했다. 이로써 재판은 그해 12월14일 13회 공판이 열리기까지 무기연기됐다.
■ 구상과 선우휘의 의견서
구상 시인의 감정의견서는 황인철 변호사의 부탁으로 김병익이 썼는데, 뒷날 황 변호사에 대한 회고담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76년이었을 것인데, 그(황인철)가 반공법으로 구속중인 김지하의 옥중메모 ‘장일담’에 대한 감정을 우리에게 부탁해왔다. 그때 그와 홍성우 변호사는 고은·백낙청과 함께 나를 정릉의 한 방갈로에 초청한 자리에서 문제의 메모를 검토해서 소견서를 써달라고 했다. 주로 그가 메모의 성격과 문제점을 자상히 설명해 주었고, 우리는 밖으로 유출돼서는 안 된다는 그 두툼한 메모를 돌려가며 검토했다. 이튿날 집으로 돌아온 나는 하룻밤을 꼬박 새우며 200자 원고지로 100장을 넘을 만큼 꽤 길게 소견서를 썼다. 한없이 진지하고 뜨거웠던 그 밤, 그리고 그 글을 마치고 났을 때 창밖으로 부옇게 밝아오던 새벽빛…. 그 원고를 받고 그는 정말 대견해하고 고마워했다. 그 감정서는 법정에서 한 원로 문인의 이름으로 제출되었다고 한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중심으로 1978년 3월 결성된 ‘김지하 구출 위원회’가 그해 12월22일 서울 동대문성당에서 ‘김지하 문학의 밤’을 열어, 고은 시인이 ‘타는 목마름으로’를 비롯한 김 시인의 작품을 낭송하고 있다. 김 시인 구명운동은 가톨릭과 문단의 연대 속에 70년대 후반 나라 안팎에서 광범위하게 전개됐다.
6개월 구속기간 만료되자
문서로만 석방하고
민청학련 사건 집행정지취소
몸은 무기수로 묶어 이 감정서는 “문학 작품이라는 것은 사회과학 이론과 달라 바로 현실적 수단으로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이 상식이다. 하물며 작품으로 구성되기 전의 창작 메모를 놓고 어떤 정치운동·폭력활동의 예비행위로 단정하는 것은 메모 자체뿐 아니라 인간의 사상, 문학 창작의 심리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데서 빚어진 것”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예수회신학원 원장이던 이한택 신부의 감정서는 사실은 내(김정남)가 썼다. 가톨릭 역대 교황의 회칙,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 등을 토대로 정리해 이 신부의 감수를 받은 것이다. 구속자가족협의회 김한림 총무가 인철지에 먹지를 대고 옮겨적은 감정서의 요지는 이렇다. “증거로 제출된 4권의 메모첩을 관통하는 사상은 ‘자유·민주주의는 중요하다. 그러나 참된 자유란 주리는 자가 배부르고, 묶인 자가 풀리며, 헐벗은 자가 입고, 병든 자가 나으며, 죽은 자가 영생하고, 절망한 자가 영원한 희망을 얻는 것이다’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리고 김지하의 작품 구상은 모두가 ‘네 이웃이 주리는 한 너는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다’는 말씀으로부터 출발한다.” 선우휘의 소견서는 독특했다. 그는 굳이 옥중메모를 읽어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의 논지는 간결하고 명확했다. “김지하의 사상적 판단에 있어서 나에게 적지 않게 충격을 안겨준 것은 그가 명백히, 그리고 강렬하게 자기는 결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는 바로 그 점입니다. 나의 직관적인 판단임과 동시에 논리적인 사고를 거친 결론부터 말한다면 ‘김지하는 결코 공산주의자는 아니다’고 확신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가 법정에서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단언한 이상, 그는 공산주의자가 아닙니다. … 그는 시인입니다. 시인은 말할 나위도 없이 진실을 읊는 사람입니다. 갖은 세속의 영욕을 도외시하며 때로 도덕가가 위선을 하며 성직자가 독선으로 행동하는 시대상황 속에서도 인간의 진실을 읊는 것이 시인입니다. 독실한 신앙심을 갖고 끊임없이 진실을 추구하는 시인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습니다.” ■ 4시간에 걸친 변론
76년 12월14일 제13회 공판에서 김지하는 징역 10년에 자격정지 10년을 구형받았다. 12월23일 오후 제14회 공판에서는 변호인의 최종변론과 김지하의 최후진술이 이루어졌다. 변론요지서는 내가 썼는데, 재판기록을 집에 가져가기가 부담스러워 무교동에 있는 한 여관을 잡아 며칠 동안 작업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법정에서 변호인 6명이 4시간에 걸쳐 나눠 낭독해야 할 만큼의 분량이었다.
필자 김정남 선생이 선교사 등을 통해 몰래 반출한 원고를 토대로 1979년 일본 가톨릭정의평화협의회에서 한글로 펴낸 <김지하는 누구인가-그 옥중투쟁의 기록>과 시집 <불귀>. 91년에야 국내로 들어왔다.
시인 구상 등 증인채택 요구
김수환 추기경은
특별변호인 신청했으나
재판부 직권으로 모두 거부 박세경 변호사로부터 시작된 변론은 이돈명·이세중·조준희·황인철·홍성우의 순으로 이어졌다. 변론의 결론이랄까, 그 마지막은 이러했다. “변호인 쪽은 끝내 가족 접견과 통신, 독서가 일체 허용되지 않은 채 진행된 이 재판에 대해 심심한 유감을 표시하는 바이며, 아울러 그러한 혹독한 상황하에서 변호인 쪽이 피고인에게 조금도 도움이 못 되어 주었던 점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면서 한편으로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당당하게 자신의 소견을 피력·진술해준 피고인의 용기에 대해 경탄해 마지않는 바입니다. … 본 사건은 피고인의 구체적 행위, 즉 옥중메모 작성 및 인혁당 관계 발언이 반공법에 저촉되는 예비행위냐 아니냐를 가리는 재판인 동시에 피고인의 사상이 공산주의적이냐 아니냐를 가리는 재판입니다. 이 두 가지를 따로 떼어서 하나하나를 증거와 법리에 의해 냉정히 검토해 본다면 그 어느 쪽에서도 피고인은 무죄를 선고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습니다. 변호인 쪽은 일체의 선입관 없이 피고인의 정확하고도 정직한 진술에 따라 그 내용들이 평가되고 분석될 것을 희망합니다. 본 변호인 쪽은 본건에 대하여 단호히 무죄를 주장합니다. 자유를 사랑하고 민주주의를 사랑하며 누가 보아도 그 용기와 재능과 식견에는 탄복할 수밖에 없는 대한민국의 한 젊은 시인이 공산주의자의 누명을 쓰고 반공법 위반자로서 처벌되어야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사법사에 크나큰 오점을 남기는 일이며, 또한 국가적으로도 크나큰 손실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날의 재판은 밤 10시까지 계속되었다. 변론에 이어 김지하의 최후진술에 3시간15분이 걸렸다. 76년 12월31일 그에게는 기왕의 무기징역에 덧보태어 징역 7년에 자격정지 7년이 선고되었다. 김지하의 재판은 인권변론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우여와 곡절은 있었지만, 비교적 충분한 진술기회가 주어졌고, 변론은 성실했으며 재판기록도 완벽하게 정리되었다. 김 추기경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애정 어린 성원과 세계적인 관심 속에 진행됐다. 첫 재판은 죽음의 공포를 안고 시작되었지만, 최후진술이 끝났을 때는 모두가 감동이었다. 나로서는 인권변론에 깊이 관여하게 되는 첫 사건이었다. ■ ‘박정희 선생의 머리 위에도 은총을’
“나는 시인입니다. 시인이라는 것은 본래부터가 가난한 이웃들의 저주받은 생의 한복판에 서서 그들과 똑같이 고통받고 신음하며 또 그것을 표현하고 그 고통과 신음의 원인들을 찾아 방황하고 그 고통을 없애며 미래의 축복받은 아름다운 세계를 꿈꾸고, 그 꿈의 열매를 가난한 이웃들에게 선사함으로써 가난한 이웃들을 희망과 결합시켜 주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참된 시인을 민중의 꽃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최후진술 3시간15분
“인혁당 사람들은 억울
비극은 원한을 만들어내…
하늘은 머지않은 장래에
역사를 통해서 심판할 것” “인혁당 사람들은 억울합니다. 그것은 비극입니다. 이 비극은 반드시 원한을 만들어냅니다. 그들과 그들 가족들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칠 때 하늘은 분명히 머지않은 장래에 역사를 통해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우리 세대 전체를 명백한 불의를 보고서도 일신의 더러운 안전과 평안을 위해서 침묵을 선택한 불의의 공범집단으로서 단죄할 것입니다. 여러분(방청객과 모든 사람들)! 노력을 아끼지 말아 주십시오.” 그날 밤 김지하의 최후진술은 절절하게 이어졌다. 이는 김지하의 양심선언과 함께 시대적 증언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 마지막 부분은 더 감동적이다. “하느님의 은총이 이 불행한 민족 위에 폭포수처럼 쏟아져서 다시는 샛별 같은 청년들이 이 더러운 분단의 비극 때문에 법정에 끌려와서 청춘이 시들게 되는 일이 없도록 끝없이 기원하겠습니다. 그리고 내일 주의 성탄절을 맞이해서 여러분에게 축복이 내리고 나를 박해하고 그렇게 미워하는 현 정부 최고 지도자 박정희 선생과 중앙정보부의 고급요원들에게도 가슴과 머리 위에 흰 눈처럼 은총이 폭폭 쏟아지기를 빕니다. 자비로운 은총이. 그래서 용서하시고 모두 축복받기를 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수석 <한겨레 인기기사>
■ 김진표·최인기·강봉균 떨고 있다
■ ‘오류 통계’로 무역협 “한국 세계 8위” 발표할 뻔
■ 대만계 MBA 스타 린한테 ‘찢어진 눈’
■ 정부, 비판적 전문가는 빼고 4대강 특별점검
■ 한약·기체조도 중국에 사용료 지불?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