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정치 정치일반

구속자 가족들 찾아가 위안받았던 공간 ‘가톨릭여학생관’
모든 수발 다 해준 천사…“당신들이 있어 행복했습니다”

등록 2012-02-27 20:50수정 2012-02-28 10:58

1987년 ‘6·29 선언’ 이후에야 출입국이 자유로워진 송영순씨가 일본에서 귀국했을 때 서울 명동 가톨릭여학생관에서 민주화운동의 숨은 조력자들이 함께했다. 왼쪽부터 여학생관장 콜레트 수녀, 김정남 선생, 오도 하스 아빠스, 재일동포 송영순씨.
1987년 ‘6·29 선언’ 이후에야 출입국이 자유로워진 송영순씨가 일본에서 귀국했을 때 서울 명동 가톨릭여학생관에서 민주화운동의 숨은 조력자들이 함께했다. 왼쪽부터 여학생관장 콜레트 수녀, 김정남 선생, 오도 하스 아빠스, 재일동포 송영순씨.
[그때 그 사람] 콜레트 노정혜 수녀와 동료들
‘프랑스 리옹에서 태어난 콜레트 자매/ 세속 수녀 되어/ 동생은 베트남에 있다가 일본에 있고 언니는 서울에 온 지 몇 십 년/ 척 한국말/ 척 한국음식 창자에까지 익어/ 치즈 없이도 여기가 내 나라이다/ 얼마나 거룩한가 놀라운가/ 이 치열한 일치에의 도달이야말로 … 한국 이름 노정혜/ 민청학련 사건 이래/ 아니 그 이전부터/ 한국 인권운동에 숨은 공 크다/ 성명서 몰래 빼돌리고/ 성금 모으고/ 숨겨주고/ 나도 숨겨주기로 약속했다. … 마음이야 벌판/ 이제는 신림동 빈민굴에 둥지 틀고/ 그 가난 속에서 / 라면 한 그릇도 잔치로 여기며 산다./ 이런 언니 하나로 종교가 있어야 할 이유가 있다.’

시인 고은이 그의 전작시 <만인보>에서 노래한 명동 가톨릭여학생관의 콜레트 노정혜 수녀 이야기는 모두가 진실이다. 작가 송기원이 쫓길 때 그를 숨겨주기 위해 노심초사하던 그였다. 1976년인가 내가 쫓기는 신동수를 원주교구 신현봉 신부를 따라 보낼 때 남대문시장에서 닭털침낭을 사서 들려준 이도 그였다.

그러나 콜레트에게는 ‘숨은 공’이 훨씬 더 많고 또 크다. 그 ‘숨은 공’을 언젠가는 세상에 밝혀야 할 책임이 그에게 빚을 진 사람들에게 남아 있다. 나도 그중의 하나다. 70년대 그 옛적 충무로에는 ‘기쁜 소리사’라는 유명한 전축·음향기기 전문 판매점이 있었다. 그 네거리에서 북쪽으로 들어오자마자 오른쪽으로 꺾어지면 ‘챔피언’ 다방이 있었다. 한국 최초의 복싱 세계챔피언이 된 김기수가 운영하던 그 다방 바로 옆에 가톨릭여학생관이 있었다. 지금은 전진상교육관이라 불리는 그곳은 애초 서울로 유학 온 지방 여학생들의 기숙사로 출발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산하 사회교육기관으로서, 국제가톨릭형제회(AFI) 회원들이 운영하고 있다. 올해 10월로 창립 50돌을 맞는다.

지금도 서울 신림동에서 빈민구조 활동에 헌신하고 있는 콜레트 수녀의 최근 모습.
지금도 서울 신림동에서 빈민구조 활동에 헌신하고 있는 콜레트 수녀의 최근 모습.
74년 여름 민청학련 사건이 터져 수많은 사람들이 수배자로 거리를 방황하고 있을 때 나는 김지하의 어머니 정금성 여사의 손에 끌려 그곳에 처음 갔다. 거기서 벽안의 국제가톨릭형제회 회원 콜레트(프랑스)·시그리도(독일)·안젤라(이탈리아)와 손아가다·박원다 등 여러 한국인 회원들을 만났다.

훗날 안 일이지만, 이들은 민청학련 사건 때 남대문시장에서 침낭을 사서 허둥대고 있던 구속자 가족들에게 영치시키게 했고, 이 엄청난 시련을 전세계에 알리고 성금을 모아 구속자 가족들과 도피중인 사람들에게 전했다. 그 살벌했던 시기에 이들이야말로 천사들이 아닌가 싶었다.

가톨릭여학생관은 그때 구속자 가족들이 찾아가 위안받고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특히 인혁당사건 가족들이 찾아갈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그러다 보니 점차 구속자 가족들의 집회 장소가 되어 갔다. 구속자가족협의회를 결성한 어머니 50여명이 74년 11월 3박4일 금식기도회를 하고 시국결의문을 발표하고 첫 거리시위를 벌이기까지 그 모든 준비가 이루어진 곳이었다.

가톨릭노동청년회와 가톨릭농민회의 출범의 산실도 바로 여기였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신부들도 여기서 여러 차례에 걸쳐 밤샘모임을 했다. 75년 2월 인혁당 사건에 대한 첫 공개 항의였던 진상조사 발표를 위한 모임도 여기서 했다.

70년대 내내 여학생관의 월요강좌는 시국토론의 산실이었다. 지학순 주교, 김지하 시인, 박형규 목사, 문익환 목사, 신영복 선생 등 민주화운동 때문에 투옥됐던 인사들은 모두 다 거쳐 갔다. 71년 10월부터 80년대 말까지 매주 한차례 시대의 징표와 진실을 전달하고 전달받는 비밀통로였다.


그것은 콜레트를 비롯한 여학생관 운영 회원들의 헌신적인 협조 덕분에 가능했다.

나는 ‘남 선생’이라는 이름으로 여학생관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거기서 명동성당에서 건너온 김수환 추기경과도 조우했다. 아주 가끔이었지만 추기경은 세상 소식을 듣고 싶을 때면 여학생관을 만남의 장소로 이용했다. 그 2층의 온돌방에서 먹던 식사는 맛있었고, 대화는 언제나 진지했다.

긴급조치로 언론이 죽어가던 그 시절 여학생관은 정보 소통의 장소였다. 구속자 가족들을 비롯한 교회 밖 사람들이 보고 들은 세상의 소식을 가져왔고, 외국인 선교사들은 나라 밖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들을 알려왔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최세구 신부는 <미국의 소리> 방송을 비롯해 전세계의 방송을 청취해 전해줬다.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고 난 뒤부터 일본 가톨릭에서는 산하 정의평화협의회를 통해 한국 민주화운동을 지원하고 나섰다. 외국의 선교사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면 마땅히 명동성동 기도회에 참석한 뒤 여학생관을 들러서 나갔다.

민주화운동 30여년의 역정에서 이렇게 가톨릭여학생관은 숨어서 너무 많은 일을 해냈다. 그 기간 동안 나는 수백통의 편지를 자료와 함께 일본 등으로 보내고 그만큼에 해당하는 편지와 자료를 받을 수 있었다. 그 모든 수발을 다 들어준 것이 콜레트 노정혜 수녀였다.

그 모든 활동이 30년간 군사독재권력의 눈에 발각되지 않은 것은 천행이었다. 분명 하늘의 도움이 있었던 것이다. 위기도 여러번 있었다. 콜레트는 79년 김해공항을 통해 외국인 선교사가 품고 나온 자료가 발각되는 바람에 조사를 받았고, 고려대 강사직을 이유없이 박탈당했다. 80년에는 국제친선회 회원 한명과 신부들이 광주항쟁 등 자료를 국외로 내보냈다는 이유로 구속되기도 했다. 그때마다 우리는 얼마나 숨을 죽여야 했던가. 뒤늦게나마 콜레트와 그의 동료들, 그리고 관계된 수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우리는 당신들이 있어 행복했습니다.” <끝>

정리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공천위-비대위 4시간 기싸움 끝에 ‘도로 한나라당’
새누리 ‘광우병 파동’ 농림부장관 정운천 공천
한명숙 “투신사건 송구” 사과
[김정운의 남자에게] ‘벗’과 ‘퍽’ 사이
‘해품달’ PD도 “파업 적극지지, 사쪽은 곡해 말라”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정치 많이 보는 기사

‘부정선거 전도사’ 황교안, 윤 대리인으로 헌재서 또 ‘형상기억종이’ 1.

‘부정선거 전도사’ 황교안, 윤 대리인으로 헌재서 또 ‘형상기억종이’

선관위 “선거망 처음부터 외부와 분리” 국정원 전 차장 주장 반박 2.

선관위 “선거망 처음부터 외부와 분리” 국정원 전 차장 주장 반박

오세훈, ‘명태균 특검법’ 수사대상 거론되자 ‘검찰 수사’ 재촉 3.

오세훈, ‘명태균 특검법’ 수사대상 거론되자 ‘검찰 수사’ 재촉

이재명 “국힘, 어떻게 하면 야당 헐뜯을까 생각밖에 없어” 4.

이재명 “국힘, 어떻게 하면 야당 헐뜯을까 생각밖에 없어”

이재명, 내일 김경수 만난다…김부겸·임종석도 곧 만날 듯 5.

이재명, 내일 김경수 만난다…김부겸·임종석도 곧 만날 듯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