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톨리 차솝스키흐(50) 러시아 모스크바 국립대 부설 콜모고로프 과학영재고 교장
[교육 인터뷰] 러시아 콜모고로프 영재고 아나톨리 차솝스키흐 교장
4개 국립대에 부속고교…과학강국 ‘밑거름’
교수들이 ‘숨은 영재’ 찾아 직접 교육까지
협동과 경쟁 ‘팀플레이’로 역량 극대화 우리한테는 ‘노벨상 콤플렉스’가 있다. 교육열은 세계 1등이지만 교육의 결과는 초라하기 짝이 없다는 게 콤플렉스의 실체다. 지난 2000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것은 우리나라 정치 현실의 산물이지 우리 교육의 열매라고 주장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지난해까지 과학 분야 노벨상(생리의학, 물리, 화학)을 받은 일본인이 13명에 달한다는 사실은 우리의 콤플렉스를 더욱 자극한다. 아나톨리 차솝스키흐(50·사진) 러시아 모스크바 국립대 부설 콜모고로프 과학영재고 교장을 만나러 가는 길에도 콤플렉스는 어김없이 꿈틀거렸다. 러시아 역시 수학·과학 분야의 강국이다. 과학 분야 노벨상에서 일본과 마찬가지로 13명의 수상자를 냈다. ‘수학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필즈상’에서는 미국, 프랑스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수상자가 나왔다. 수학의 ‘밀레니엄 7대 난제’ 가운데 하나인 ‘푸앵카레 추측’을 해결하는 실마리를 제시한 뒤 자취를 감춰 화제를 모았던 그리고리 페렐만이 러시아 출신이다. 무엇이 러시아의 페렐만을 가능하게 했을까. 지난 12일 경기도 평택을 방문한 차솝스키흐 교장을 만나 맨 먼저 물을 수밖에 없던 질문이다. “러시아는 1950년대와 1960년대 우주산업과 방위산업 쪽으로 크게 발전했다. 그만큼 기초과학 분야 인재가 많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때 학자들뿐만 아니라 정치가들도 영재교육이 국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됐다.” 차솝스키흐 교장은 수학 강국 러시아를 만든 원동력이 ‘영재교육’에 있다고 말했다. 모든 학생들한테 고른 기회와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는 러시아 공교육에 해답이 있을 거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동등한 교육의 기회를 주는 것은 중요하지만 모든 학생들한테 똑같은 기회를 줄 수는 없다. 저마다 재능이 다르기 때문이다. 결국 선택된 아이들이 영재교육을 받는다. 공교육에는 특별한 프로그램이 없다.” 콜모고로프 영재과학고는 러시아의 대표적인 영재교육기관이다. 러시아 전역에서 ‘엄선된’ 350여명의 수학·과학 분야 영재들이 공부하는 곳이다. 1963년 저명한 수학자 콜모고로프의 이름을 따 개교했다. 러시아 최고 대학인 모스크바 국립대의 교수들이 주축이 됐다. “러시아 영재교육의 중심에는 대학이 있다. 영재를 발굴하는 것부터 가르치는 것까지 대학교수들의 몫이다.” 러시아 영재교육의 주도권은 대학이 쥐고 있다. 1950년대 영재교육 초창기부터 그랬다. 그때는 교수들이 대학에 수학·과학 동아리를 만들어 중고생을 지도하는 방식이었다. 이른바 ‘서클’을 통한 심화교육이다. 콜모고로프 과학영재고가 생긴 것은 그 뒤의 일인데 대도시 대학의 서클에서 활동할 수 없는 지방에도 영재가 숨어 있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다고 한다. “깊은 시골에도 인재는 숨어 있다. 다만 대도시와 같은 교육 여건을 누리지 못해서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그런 학생들을 발굴해 키우기 위해 과학영재고는 기숙학교 형태로 만들었다.” 사실 과학영재고의 모태도 대학이다. 1960년대 초반 모스크바, 레닌그라드(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 키예프, 노보시비르스크 등 주요 도시 네 곳에 있는 국립대에 과학영재고가 생겼다. 러시아 교육부에 속한 일반 고교와는 달리 과학영재고가 국립대에 속하게 된 배경이다. 차솝스키흐 교장도 대학의 교직원이며 단과대학의 학장과 동등한 위상을 지닌다. 대학에 기반을 둔 러시아 영재교육의 특성은 교수들이 직접 과학영재고 학생들의 교사가 된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콜모고로프의 교사 120여명은 모두 모스크바 국립 대학교의 수학·과학 분야 교수 또는 박사급 연구원이다. “영재를 발굴해 놓고 다른 사람한테 맡겨 놓으면 그사이에 영재성이 퇴행할 수도 있다. 영재성을 발견한 순간부터 교수들이 책임지고 가르친 뒤 대학에 오면 바로 연구 파트너로 함께 일하는 게 러시아의 시스템이다.” 뭣보다 러시아 영재교육은 영재를 길러내는 것보다 영재를 찾아내는 데 무게가 실려 있다. 교수들이 힘을 쏟는 것은 숨은 영재를 찾는 일이라고 한다. 통역을 도운 정인선 모스크바대 한국어문학과 교수는 “영재에 대한 러시아와 우리나라의 인식이나 개념이 완전히 다르다”며 “우리는 영재를 후천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러시아에서 영재는 선천적으로 자질을 타고난 아이들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따라서 우리는 만들어진 영재를 골라내지만 러시아는 타고난 영재를 찾는 데 영재교육의 성패를 건다. 선발 방식에서 차이가 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엄격한 지원자격을 내걸고 그에 해당하는 소수를 심사해 뽑지만 콜모고로프는 지원자격을 따로 두지 않고 최대한 많은 학생들을 심사한다. 선발 경로는 매우 다양하다. 가장 전통적인 선발 방식은 교수들이 러시아 전역으로 파견돼 직접 그 지역의 학생을 만나고 선발하는 것이다. 중앙일간지와 손을 잡고 신문에 문제를 출제한 뒤 풀이법을 보내오는 학생들 가운데 ‘싹’이 보이는 학생들을 추려 캠프를 진행하기도 한다. 인터넷으로도 문제를 공지해 원하는 학생이 풀이법을 보내오면 그들 가운데에서도 대상자를 뽑아 따로 여는 캠프도 있다. 교수들은 캠프에서 학생들을 밀착 관찰하면서 진짜 영재를 가려낸다. “최근에는 우수한 인재를 이용해 자기 학교의 이름을 떨치거나 교사 개인의 명예를 높이려는 분위기가 있어 과학영재고가 인재를 찾으러 가도 협조가 잘 안될 때가 있다. 일간지나 인터넷을 통한 모집 방식을 개발한 것은 이 때문이며 이 밖에도 숨은 영재를 발굴하기 위한 다양한 아이디어를 고민하고 있다.” 이렇게 발굴한 학생들의 영재성을 지키고 또 키우는 콜모고로프식 영재교육의 고갱이는 ‘협동학습’이다. “학생들을 팀으로 묶어 과제를 내주고 해결하는 수업을 많이 한다. 원래 대학이나 사회에서 진행되는 모든 연구가 팀 단위로 이뤄지기 때문에 고교 때부터 팀으로 학습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에서다. 학생들은 팀플레이를 하면서 경쟁과 협동을 동시에 배운다. 무임승차를 하는 학생들도 있지만 이는 교수들이 개입해 적절히 통제할 수 있다.” 차솝스키흐 교장은 이런 협동학습의 전통 덕분에 팀으로 참가하는 경시대회에서는 상을 휩쓸다시피 한다며 웃었다. 러시아에서는 다양한 방식의 수학경시대회가 열리는데 수학 경기, 수학 하키, 수학 경매 등 대개 팀 단위로 진행된다고 한다. 차솝스키흐 교장은 우리나라에서 영재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다는 사실을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어렸을 때부터 학생들한테 영재교육을 하는 것은 좋다고 본다. 그러나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할 때는 늘 신중해야 한다. 두세 살 때 글을 읽었다고 해서 영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대여섯 살이 되도록 글을 못 깨친다고 둔재인 것도 아니다. 영재성은 인생의 어느 시기에 나타날지 모른다. 아이들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보고 기다려야 한다.” 영재교육원 이력이 국제중과 특목고, 나아가 명문대 입시의 도구로 전락해버린 우리나라에서 영재교육 열풍이 수학 강국, 과학 강국으로 열매 맺을 수 있을까. 우리나라와의 차이점만 확인한 인터뷰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글·사진 진명선 기자 edu@hani.co.kr
평택시와 ‘열린’ 수학대회 공동개최 자격제한 없앤 첫 대회 700명 참여
입상자 20명, 러시아에서 영재연수 차솝스키흐 교장은 우리나라 영재교육에 대해 큰 오해를 하고 있었다. 지난 9일 평택시청과 콜모고로프 과학영재고가 공동으로 개최한 ‘제1회 평택시 수학경시대회’ 때문이었다. “한국의 시스템이 좋은 것은 수학경시대회가 모든 학생한테 열려 있다는 점이다. 700명이 넘는 학생이 참여한 것도 놀랐지만 그 가운데 훌륭한 아이디어를 가진 학생들이 많다는 점에 더 놀랐다. 영재교육이라는 게 꼭 소수의 학생들만을 위해 이뤄지는 게 좋은 건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모두 알다시피 우리나라의 모든 수학경시대회가 그런 건 아니다. 학생들의 참여에 제한을 두지 않기로 한 것은 이번 대회의 도전이었다. 정인순 모스크바대 한국어문학과 교수는 “하고 싶은 사람을 배제하지 말자는 게 이번 경시대회의 원칙이었다”며 “교수들이 보기에도 기발한 아이디어들이 많았던 모양”이라고 말했다. 정 교수는 모스크바 국립대의 우리나라 관련 대외협력 업무를 맡고 있으며 우리나라와 러시아의 국제 교류를 돕는 엔아이에스 컨설팅의 대표이기도 하다. 이번 수학경시대회에서 선발된 20명의 학생은 오는 7월 모스크바 현지의 콜모고로프 과학영재고에서 연수를 받게 된다. 그때 다시 성적우수자로 선발된 2명의 학생은 11월에 있을 러시아 수학 올림피아드에 콜모고로프 학생들과 팀을 꾸려 참가한다. 올해 평택시 학생들을 대상으로 치러진 경시대회는 2회 대회부터 전국 규모의 행사로 확대될 계획이다. 차솝스키흐 교장은 “앞으로 한국의 수학 영재들과 러시아의 수학 영재들로 한·러 연합팀을 꾸린다면 세계의 모든 경시대회를 제패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냐”며 웃었다. 평택시는 수학경시대회 말고도 지난해 여름부터 열고 있는 ‘평택시 청소년 국제학교’를 통해서도 러시아와 교육 분야 교류를 확대하고 있다. 청소년 국제학교는 우주천문학, 생물화학, 수학, 발레, 음악, 러시아 문학 등 여섯 교과에 대해 모스크바 국립대를 비롯한 그네신 음대, 볼쇼이 발레 스쿨 등에서 파견돼온 교수진이 직접 수업을 하는 프로그램이다. 오는 7월에 열리는 제2회 국제학교에는 바이올린과 미술 교과가 추가됐다. 진명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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