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낌없이 주는 나무/
언제나 다시 돌아가 걸어보고 싶은 길이 있다. 마음이 울적하거나 답답할 때면 더 그 길을 걸어보고 싶다. 그 길은 기억 속의 길이고 추억 속의 길이다. 그러니 어쩌면 다시는 걸어볼 수 없는 길이기도 하다.
아침이면 자욱하게 안개가 내려앉았다. 집을 나서면, 뽕나무가 늘어선 텃밭 가로 안개는 점점 짙어졌다. 해가 떠오르면 안개는 사라지지만, 사라지기 직전의 안개는 더 짙었다. 나는 안개를 발목에 휘감으며, 책보를 메고 타박타박 길을 나서곤 했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십리 길이었다. 포장이 되지 않았던 그 길에는 차도 별로 다니지 않아, 그야말로 산책길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길 가로 아름드리 미루나무들이 이열 종대로 서 있던 그 길. 바람이 좋은 날은, 미루나무 잎들이 서로 몸을 부딪치며 차라락차라락 맑은 소리를 내곤 했다. 그런 날에는 괜히 마음이 미루나무 위 하늘처럼 시리게 푸르러지곤 했다.
장하게 비가 내리던 날이었으리라. 학교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 우리 또래 몇몇은 길가 무밭으로 달려 내려갔다. 그리곤 실하고 좋은 놈으로 골라, 무를 하나씩 뽑아 들었다. 무청을 툭 잘라 버리고, 입으로 무 꼭지를 베어 낸 뒤, 때가 꼬질꼬질한 손톱으로 무의 푸른 껍질 부분을 벗겨냈다. 허기진 속으로 넘어간 무는 배를 쓰리고 아리게 만들었지만, 나는 아직도 그 무맛을 잊지 못한다. 내가 황순원의 <소나기>에 나오는 “맵고 지려.” 하는 소녀의 말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는 것도 그런 추억 때문이다.
그 길에 대한 가을날의 한 장면도 선연하다. 십리 등굣길을 따라 코스모스가 가을바람에 출렁이며 나를 따라오곤 했다. 나는 코스모스 꽃잎을 툭툭 건드리며 학교로 갔다. 연분홍색, 붉은색, 흰색 꽃잎에 노란 꽃술을 지닌 코스모스는 가을처럼 쓸쓸하면서도 순박한 꽃이었다. 주로 흰 색깔의 옷을 입고 다닌 우리들은 코스모스 꽃을 따 친구의 옷에 꽃 도장을 찍어주는 놀이를 즐겨 했다. 어떤 친구의 옷은 마치 일부러 문양을 들인 듯, 붉은색과 분홍색의 꽃잎과 노란 꽃술이 잔뜩 박혀 있곤 했다.
“얼마나 먼 길을 걸어야 아이들은 어른 되나” 하는 밥 딜런의 노래가 있다. 아마도 내게는 어린 날의 학교 가던 십리 길이 밥 딜런의 ‘얼마나 먼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길을 떠올릴 때마다, 내 삶의 중요한 정서적 깨달음이 그 길에 있었다는 생각이 드니 말이다. 만약 내게 그 길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 같은 어른이 되어 있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는 아름드리 미루나무도 다 베어지고, 멋없게 포장 미끈한 길만 놓여 있는 그 길. 그러나 그 길을 갈 때마다 나는 기억 속의 나로 돌아간다. 삭막한 도시의 폐쇄된 길을 걷는 우리 아이들은 또 어떤 ‘먼 길’을 걸어 어른이 될까?
최성수/서울 경동고 교사 borisogo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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