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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수신료 분리징수 ‘졸속’…독일 석학은 ‘합리적 논의’ 강조한다

등록 2023-06-27 18:12수정 2023-06-28 02:31

기고 l 최경진 교수

독일 공영방송인 <아에르데>(ARD) 누리집(위)과 아에르데와 <체트데에프>(ZDF), <도이칠란드라디오> 등 공영방송의 수신료 고지·징수 업무를 담당하는 기관인 바이트락서비스(아래). 바이트락서비스 등 제공
독일 공영방송인 <아에르데>(ARD) 누리집(위)과 아에르데와 <체트데에프>(ZDF), <도이칠란드라디오> 등 공영방송의 수신료 고지·징수 업무를 담당하는 기관인 바이트락서비스(아래). 바이트락서비스 등 제공

최경진 | 독일 뮌스터대 커뮤니케이션학과 방문교수

프로파간다(propaganda). ‘선전’ ‘선동’이라는 의미의 이 섬뜩한 단어가 우리 정치권에서 나왔다. 집권 여당 대표라는 인사가 공영방송인 <한국방송>(KBS)을 가리켜 특정 집단의 주장을 선전한다며 프로파간다 매체라고 규정한 것이다. 지나쳐도 너무 지나쳤다. 프로파간다는 군사독재와 권위주의 정권이 한국방송에 외압과 통제를 자행했던 시절에나 있던 이야기다.

최근 필자는 이곳 독일 뮌스터대학교의 원로 언론학자 아르민 숄(Armin Scholl) 교수와 공영방송에 대해 심층 인터뷰할 기회를 가졌다. 대담의 주된 방향은 방송 자유와 민주주의였다. 그는 대담 내내 방송과 민주주의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통찰력 깊은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먼저 <아에르데>(ARD)와 <체트데에프>(ZDF) 등 공영방송이 자리매김하기까지, 바람직한 공영방송을 위한 독일 정치권과 각계 시민단체의 노력은 주목할 만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어려움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전후 출범한 독일연방공화국이 그 체제를 갖춰가는 과정에서 공영방송은 특정 정권으로부터 정치적 압력을 받기도 했고 비민주적 언론정책으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심지어 위헌적 시도, 예컨대 독일연방공화국 초대 수상인 아데나워의 노골적인 공영방송 장악 시도가 있었고 그로 인해 야당과 시민단체의 거센 저항이 일기도 했다. 독일 정치권과 방송사간 법적 갈등도 빚어졌지만, 사법부는 방송의 언론자유에 무게를 실었다. 지난 수십년 동안 독일연방 헌법재판소가 내린 공영방송 관련 판결의 대원칙은 바로 언론자유였다.

물론 독일 공영방송의 미래를 위한 사회적 논의들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방송정책 결정을 위해 짧게는 몇년, 길게는 십수년 동안 숙의 과정을 거치기도 했다. 이를 위해 의회는 물론 전문가들과 다양한 시민단체 구성원이 머리를 맞대고 합리적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우리가 눈여겨볼 만한 지점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방송정책과 관련해 현재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논의는 논리도 체계도 갖추지 못했다. 특히 티브이 수신료 분리 징수를 졸속으로 밀어붙이려는 정부의 시도가 그렇다. 법적 판단이 나오기도 전에 방송통신위원장을 면직시킨 일, 문제투성이인 ‘국민참여 토론’이라는 이름의 여론수렴 방식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방송법 시행령 개정을 위한 의견수렴 기간마저 비상식적으로 축소한 건 정상적인 논의 절차라고 보기 어렵다. 도대체 정부는 무엇 때문에 이런 무리수를 두는 것일까.

공영방송 저널리즘을 오랫동안 연구해온 숄 교수는 현재 한국방송이 직면한 현실과 관련해 “무엇보다 정부가 충분한 시간을 갖고 진정성 있는 자세로 폭넓은 사회적 논의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며 다음의 내용을 역설했다.

먼저 수신료 징수 방식을 결정하려면 독일처럼 의회와 전문가의 심도 있는 공론화 과정이 필요한데, 한국은 그렇지 못했다는 점이다. 방송정책에 대한 정부의 비정상적인 개입은 공영방송의 근간을 흔들 수 있기에 국가적으로도 엄청난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충분한 시일을 두고 체계적이며 폭넓은 사회적 합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이유이다. 수신료 분리 징수로 야기될 막대한 재원 손실과 그 보전 문제도 마찬가지다. 분리 징수를 강행한다면 한국방송은 현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광고를 더 늘릴 것이다. 그러나 광고 시장의 현실도 예전같지 않을뿐더러 무엇보다 그 의존도가 커질수록 공영방송이 지향하는 공공성의 철학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이 온다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주체는 누구일까. 바로 시청자다. 공영방송은 점차 상업적 수익이 높은 콘텐츠 제작에 치중하게 되고 비록 수익성은 낮으나 공익성을 높게 평가받아온 양질의 공영방송 프로그램들은 설 자리를 잃을 것이다. 그러한 상황은 결국 시청자 권익 침해를 넘어 사회적으로도 엄청난 손실이 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일반 시청자 대다수는 이러한 진실을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다. 당장 내 지갑에서 수신료가 빠져나가지 않는다면 좋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끝으로 공영방송의 사회적 책무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공영방송은 공익성 높은 프로그램 제작·편성을 통해 사회의 공공적 책무를 수행한다. 그 과정에서 공영방송은 상업방송들과 달리 필요시 강도 높은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곤 한다. 그 대상이 어떤 정부든 또 어느 정당이든 말이다. 언론 선진국들의 모범적 공영방송들을 보면 왜 그들이 공영방송의 존재를 소중히 여기는지 그 이유를 잘 알 수 있다. 국가는 공영방송이 사회의 공공적 책무를 할 수 있도록 공영방송의 품격을 보장해줘야 한다. 그 기반에서 공영방송은 그들에게 위탁된 사회적 책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한국방송이 완전무결한 조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산적한 여러 가지 개혁 과제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정부는 수신료 분리 징수라는 명목으로 공영방송인 한국방송을 대안 없이 궁지에 몰아넣을 게 아니라, 차제에 한국방송의 개혁 문제를 포함해 공영방송의 미래를 합리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폭넓은 공론화 장을 마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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