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노동자의 밥상’ 기획 시리즈에 15차례에 걸쳐 실린 현장 노동자들과 밥상.
“거기서 거기야. 다 똑같아.”
첫차를 타고 강남 빌딩을 청소하러 가는 노동자들은 가방 속 도시락에 무엇이 들었는지 묻자 한결같이 말했다. 고봉밥에 찬 몇 가지. “거기서 거기”다. 지하 650m의 갱도에서도, 아이들 밥을 차려주는 급식실에서도, 덜컹거리는 기차 위에서도, 노동자의 끼니는 대개 비슷했다. 이들에게 밥은 시장을 반찬 삼아 들이켜는 연료 같은 것이었다.
지난해 12월부터 이달까지 석달 동안 <한겨레>는 밤새 새벽배송 상품을 전하는 택배 노동자를 시작으로 15명의 노동자를 만나 그들의 밥과 일과 삶을 신년기획 ‘2020 노동자의 밥상’에 담았다. 그간 노동 현장을 들여다보는 기사는 많았다. ‘2020 노동자의 밥상’은 그 너머를 들여다보려고 한 기획이다. 그 사람의 노동이 그 사람의 삶을 직조하고 육체를 길들인다면, 그 사람의 밥상은 그 사람의 삶을 은유하고 계급을 전시한다. 노동자는 무엇을 어떻게 어디에서 먹고사는가. <한겨레>는 이를 담기 위해 땅과 하늘, 바다와 땅 밑에서 노동자를 만났고 강원도 태백에서 제주도 성산 앞바다까지 전국을 누볐다.
고관대작의 식탁은 자주 미디어에 등장한다. 어떤 정치인이 즐겨 찾는 식당은 어디인지, 어느 기업의 회장이 계절마다 찾는 보양식은 무엇인지 늘 관심의 대상이 된다. 그들의 밥상은 매끼 요란하다. 여의도에 자리 잡은 한정식집 방마다 점심 저녁 정치인과 기자, 각종 기관·기업체의 대관 담당자들이 빼곡히 들어찬다. 그 방에서 몇 숟갈 뜨지도 않은 접시들은 밥상에 올랐다가 이내 다른 접시로 바뀐다. 이 밥상에 오르는 것은 ‘끼니’가 아니다. 거래되는 욕망이다.
끼니가 끼니로 작동하는 곳에 노동자들이 있었다. 밥상도, 산해진미도 없이 살기 위해 밥술을 뜨는 이들이다. <한겨레>가 취재 중 만난 이들은 거리에서 헌 종이상자를 밥상 삼아 펼쳐놓고 빵과 두유를 삼켰고(5회 폐지 줍는 노인), 비닐하우스 냉골에 찬을 늘어놓았고(7회 농촌 이주노동자), 한끼 밥값 19원을 받고 지하철 역사 자루걸레를 빠는 화장실 개수대에서 쌀을 씻어(4회 부산지하철 청소노동자) 밥을 지었다. 무허가 건물에서 50년 동안 새벽일을 하는 부두노동자를 위해 밥을 지은 할머니(12회 부산 부두노동자들의 밥집)가 있었고, 갱도에서 쥐를 피해 탄가루와 함께 도시락 밥을 삼키는 이(15회 태백 광업 노동자)도 있었다.
그러나 <한겨레>가 취재 과정에서 만난 것은 가난이나 비참이 아니라 밥의 숭고함이다. 노동과 일대일로 거래되는 밥이어서다. 고된 노동 끝에 넘기는 밥은 욕망이 아니라 생명이다. 혀끝의 쾌락이 아니라 나를 살리고 남을 살리는 밥이다. 철도 기관사가 35년 동안 덜컹대는 철길 위에서 도시락(3회 철도 기관사의 4천원 도시락 밥상)을 삼킨 건 승객을 제때 안전하게 옮기기 위해서다. 생명이 오가는 찰나에 반응해야 하는 응급실 간호사들에겐 컵밥을 데워 먹는 몇분(11회 응급실 간호사들)조차 사치다. 일하는 사람에게 먹이려 짓는 밥을 우리말에선 ‘일밥’이라고 한다. 이 사회를 지탱하는 이들의 일밥만큼 신성한 것은 없다.
독자들도 그 취지에 공감했다. ‘2020 노동자의 밥상’ 기사에는 노동자를 응원하는 댓글들이 잇따랐다. “인간의 행동 중 노동만큼 신성한 것은 없다”, “존경하고 경의를 표합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미안합니다. 당신들의 목숨 건 수고로 오늘도 따뜻한 하루를 보냅니다”, “이런 분들이 대우받고 존경받는 날이 와야 합니다”, “대한민국을 받쳐오신 분들입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외롭게 밤을 지키는 당신은 아름다운 노동자입니다. 사회에서 소외된 약자이지만 사회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자입니다. 힘내시고 화이팅하세요”, “위급한 순간 우리를 도와주는 선생님들 덕분에 저희가 편안히 생활할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등등. 각박한 기사 댓글창에 노동과 노동자를 응원하는 목소리들이 쏟아진 것은 흔치 않은 기억이었다. “대통령, 국무총리, 장관에 대한 넘치는 기사 말고 이런 기사를 좀 더 자주 보면 좋겠다”고 청한 독자도 있었다.
가까이에서 일하고 밥 먹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취재의 특성상, 담고 싶어도 담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었다. 컵라면을 들고 발전소에 들어갔던 ‘김용균’의 동료들, 김밥 한 줄로 새벽을 버티는 방송 현장의 보조인력, 빨래가 쌓여 있는 구석 휴게실에서 삭은 김치에 물 말아 밥을 넘기는 요양보호사와 같은 이들이다. 고용주에게 드러내지 않고 취재할 방법이 없었던 탓이다. 어쩌면 <한겨레>가 가닿지 못한 곳에 더 열악한 처지에 놓인 노동자들이 있을 것이다.
소설가 김훈은 2002년 거리의 칼럼 ‘밥에 대한 단상’에서 “밥은 누구나 다 먹어야 하는 것이지만, 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밥만이 각자의 고픈 배를 채워줄 수가 있다. 밥은 개별적이면서도 보편적이다”라고 말했다. 시위대나 거기에 맞서는 전경이나, 그 장면을 취재하는 기자나 누구나 밥을 먹어야 산다. 그 피할 수 없는 명제에서 개별성과 보편성이 같은 것이 된다는 이야기다. 18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밥은 개별적이면서도 보편적일지 몰라도, 밥상만큼은 철저하게 개별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한겨레>는 각자 다른 직업을 지닌 노동자 15명의 밥상을 기사에 담았지만, 그 밥상에는 택배 노동자나 대리운전기사가 아니라 택배 노동자 조찬호(44)와 대리운전기사 김병운(가명·56)의 이야기가 담겼다. 세계 인구가 77억명이라면, 우리가 전할 수 있는 이야기도 77억개가 존재한다. ‘2020 노동자의 밥상’은 그 일상사의 기록이고, 보편적이지 않고 개별적이기에 함께 살아가는 우리가 방치할 수 없는 삶들을 담고 있다.
의도하지 않았으나 공교롭게도 취재는 대개 새벽이나 밤중에 진행됐다. 새벽배송을 약속한 쿠팡의 노동자는 밤새도록 달렸고, 지하철과 빌딩의 청소노동자, 고려인 공장 노동자와 캄보디아 출신의 농촌 이주노동자는 모두 깜깜한 새벽에 하루를 시작했다. 경기도 시흥에서 강남까지 폐지를 주우러 ‘출근’하는 할머니도, 부두노동자의 밥상을 차리는 할머니도 새벽에 길을 나섰다. 아직 다른 이들이 기지개를 켜기 전, 또는 다른 이들이 집에 와서 따뜻한 잠자리에 들 때 우리 사회가 돌아가도록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들이다.
‘2020 노동자의 밥상’은 못 먹고 사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진짜 ‘잘’ 먹고 사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먹은 만큼 세상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여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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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