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노동자의 밥상] ⑫부산 부두 노동자들의 밥상
어시장 골목의 간판 없는 판잣집
고등어 운반선 타는 박씨가 오자
할매는 집처럼 익숙한 아침밥을
꽃무늬 쟁반에 소담히 담아낸다
그냥 ‘할매집’ 주인장인 이분이씨
“아들들은 일 고만하라 카지만…”
동도 트기 전에 불 피운지 50년째
어시장 골목의 간판 없는 판잣집
고등어 운반선 타는 박씨가 오자
할매는 집처럼 익숙한 아침밥을
꽃무늬 쟁반에 소담히 담아낸다
그냥 ‘할매집’ 주인장인 이분이씨
“아들들은 일 고만하라 카지만…”
동도 트기 전에 불 피운지 50년째
부산 서구 남부민동 자갈치 부두에서 50년째 부두 노동자들을 위한 밥집 ‘할매집’을 운영하고 있는 이분이씨가 지난달 21일 새벽 숯불 화덕에 올린 냄비에 두부와 애호박을 가득 넣고 된장국을 끓이고 있다.
할매집의 밥상. 된장국과 김치, 무생채, 미역줄기볶음, 시금치무침, 박나물볶음, 달걀프라이가 소담하게 담겨 있다.
부산 서구 남부민동 자갈치 부두에서 50년째 부두 노동자들을 위한 밥집 ‘할매집’을 운영하고 있는 이분이씨가 선박 조리사 박웅진씨에게 은갈치 두 마리를 받아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화덕에 구운 고등어 밥상 3시간 앞선 새벽 3시50분. 바닷바람과 파도 소리를 등지고 이분이가 굽은 허리에 손을 짚은 채 밥집에 출근했다. 고무줄 바지에 털고무신을 신었는데, 두꺼운 양말과 덧신, 무릎 밑까지 올라오는 발토시까지 겹겹이 덧입었다. 파란색 체크무늬 앞치마를 두르더니, 낡은 숯불화덕을 밥집 앞으로 가지고 나와 숯과 망치로 조각낸 나무판자를 집어넣었다. 신문지 한장을 구겨넣고 라이터로 불을 피우니 곧 매캐한 연기가 올라왔다. 이분이는 부채질을 하며 매운 연기를 밀어냈다. 15분 정도 화덕을 두고 끙끙대더니 다시 밥집에 들어가 얼음장처럼 찬물에 쌀을 씻어 가스 불에 안치고, 냉장고에서 고등어 두마리를 꺼내 도마에 놓고 비늘을 훑어냈다. 새벽시장에 들러 싸 들고 온 두부와 파, 고추와 무를 넣고 언 조갯살을 풀어 넣은 된장국과 화덕에 구운 고등어가 오늘의 5천원 밥상 주메뉴다.
부산 서구 남부민동 자갈치 부두에서 50년째 부두 노동자들을 위한 밥집 ‘할매집’을 운영하고 있는 이분이씨가 지난달 21일 새벽 4시께 화덕에 불을 피우고 가게 문을 열 준비를 하고 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밥상 경남 거제가 고향인 이분이는 4살 때 부산으로 넘어왔다. 아버지는 “가시내는 공부시키면 건방져진다”며 오빠 셋, 남동생과 달리 언니와 이분이에겐 국민학교도 못 가게 했다. 속옷공장에서 일하던 17살 때 4살 많은 남편을 만나 이듬해 결혼했다. 남편은 툭하면 술을 마시고 이분이와 아들들에게 손찌검을 했다. 남편이 던진 도마에 갈비뼈가 부러지고, 머리가 찢어졌다. 결국 막내아들이 걸음마를 할 무렵, 이분이는 다섯 아들을 데리고 남편을 떠났다. 그때부터 전쟁같은 밥벌이가 시작됐다. 공사장 막노동부터 술집 주방일, 호텔 요정 주방일, 식당 보조를 전전했다. “옛날에는 묵을 기 없어도 아들 뭐라도 해묵일라꼬 시래기밥도 해 묵고, 무시밥(무채를 섞어 지은 밥)도 해묵고, 죽도 끼리고 했는데, 없을 때는 콩국시 2천원어치 사서 여섯 식구가 묵었지. 콩나물 사다 국 한 냄비 끼려서 건더기는 아들들 떠주고 국물 남은 거는 내 차지인기라.” 그러니 이분이에게 밥상은 삶을 위한 분투 그 자체다. 그래서일까. 매일 저녁 8시께 잠자리에 들고, 같은 시간에 일어나 새벽 4시면 출근해 밥을 짓는다. 할매집을 찾는 이들의 밥상만큼은 부족하거나 가난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밥과 국, 여섯 가지 밑반찬에 매일 다른 요리까지 양은 쟁반에 가지런히 올린다. 구걸하는 이가 오면 국수라도 한그릇 말아 먹여서 보냈다. 무허가 밥집이다 보니 단속도 수십번 나왔고, 누가 질렀는지도 모르는 불도 다섯번이나 났으며, 동네 건달들이 셀 수 없이 돈을 뜯어갔다. 구청에서 단속 나와선 “할매요, 이거 엔간히 씨게도(단단히도) 지어놨네”라고 말하면 “아저씨요, 우리도 묵고 살아야 안 되겠나. 나는 남편도 없이 아들들 데꼬 살라카이”라고 사정해 돌려보내기도 했다. 그렇게 대통령이 여러 번 바뀐 50년 동안 똑같은 하루들이 이어졌고, 그 사이에 오빠 셋과 남동생, 언니는 모두 세상을 등졌다. 막내아들이 61살이 됐다. 그리고 이분이의 몸에는 뇌졸중이 숨어들었다. “심하면 중풍이 온대요. 사람이 말도 이상해지고 그런다대. 의사가 ‘할매는 나이가 들어가 수술도 몬하고 약 가지고 한번 해보입시다’ 캅디다. 아들들은 일 고만하라꼬 말리는데, 내는 이게 낙이다. 말리지 마라칸다. 일 안하고 집에 있으면 병들어 죽는다.”
생선 운반선 기관사로 일하고 있는 박한용(가명)씨가 지난달 21일 할매집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있다.
자갈치시장 상인들이 지난달 21일 아침 부산 서구 남부민동 공동어시장에서 구매한 생선을 수레에 실어나르며 ‘할매집’ 앞을 지나고 있다.
바다가 일터, 배가 직장 박한용도 16살 때 고향 거제를 떠나 이듬해부터 배를 탔다. 가난 탓에 중학교만 졸업하고 일을 찾았는데, 부산에서는 바다가 일터였고 배가 직장이었다. “그때는 가정 형편이 다 너무 어려버서 배만 타면 됐지 다른 꿈을 꿀 수도 없었어요.” 그렇게 서툰 손으로 ‘그물질’하며 월 6만원 손에 쥐던 소년은, 40년 세월이 지난 지금 월 350만원을 버는 선박 기관사가 됐다. 하지만 그는 취업을 준비하는 아들에게 이 일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아들이 이제 막 대학 졸업했는데, 배 타는 게 뭐가 좋다꼬 대학 나와가지고 배 타게 하나. 직장 취업 준비하게 해야지.” 박한용은 1천원짜리 다섯장을 이분이에게 건넨 뒤 서둘러 배를 타러 떠났다. 선박 조리사 박웅진이 태어난 곳은 통영의 섬 욕지도다. 10살 되던 해 아버지를 따라 처음 배를 탔다. “욕지도에서 태어나믄요. 국민학교 4~5학년이 되믄 아버지 따라 뱃일을 해야 합니다. 믿기지 않지요? 그 어린아가 그물 가지고 고기도 잡고, 낚시도 하고, 그런 게 아직도 생생해요.” 배운 게 뱃일뿐이라 박웅진은 배를 타고 돈을 벌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갔다. 29살엔 난생처음 비행기를 타고 콜롬비아로 가 10년 동안 ‘새우 트롤선’을 탔다. 콜롬비아를 시작으로 25년 동안 13개국을 떠돌았다. “우리 친구들이 지금 외국 가자카면 나는 비행기 타는 게 언서시러버(지겨워)갖고 가자캐도 안 갑니다. 진짜 부끄러운 거는, 내가 에이비시(ABC)도 모르고 콜롬비아에 갔거든. 말이 안 통해가 진짜 답답했지요. 그런데 더 답답한 건 낯선 밥이었어요. 한국 부식이 없으니까 애로사항이 많았지. 밥을 해묵는데, 쌀도 완전 밭에서 나는 쌀, 뭐라캐야 되노. 날라다니는 쌀, 팔팔팔 날리는 쌀. 김치 간장 고추장 된장도 없고. 양념이 없으니까 그 맛이 안 나는 거지. 고춧가루 만들라꼬 외국 고추를 따다 빻았는데, 그 나라는 고추나무가 커요. 고추가 이리 집(깁)니다. 그거 하나 넣었다가 매워가 음식 하나도 못 묵었지.” 그러다 16년 전 시력이 나빠져 더는 배를 몰지 못할 것 같았고, 안경을 맞추는 동시에 기관사 직책을 내려놓고 한국에 돌아왔다. 그래도 여전히 배가 직장이라, 3년 전부터 뱃사람 밥상 차려주는 일을 한다. 타국에서의 낯선 밥상을 떠올리며, 뱃사람 밥상만큼은 누구보다 정성을 쏟는다.
20년째 ‘할매집’ 앞에서 커피 노점을 해온 천금남씨가 21일 아침 손님에게 유자차를 타주고 있다. 인근 어시장과 냉동창고 노동자, 선원 등에게는 커피와 꿀물, 유자차 등이 또 하나의 밥이다.
부산 서구 남부민동 자갈치 부두에서 50년째 부두 노동자들을 위한 밥집 ‘할매집’을 운영하고 있는 이분이씨가 밥솥에서 밥을 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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