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공공연구노조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비정규직 지부 간부들이 지난달 18일 ‘자회사 설립을 통한 정규직 반대’와 ‘직접고용’을 요구하는 삭발식을 열었다. 비정규직지부는 세종시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앞에서 무기한 천막농성을 벌이고 있다. 세종/이정아 기자
문재인 정부의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정책에 구멍이 뚫렸습니다. 정규직 전환을 명목으로 우후죽순 생겨난 자회사 때문입니다. 공공기관이 자회사를 만들어 정규직으로 채용하는 게 뭐가 문제냐고요? 속을 들여다보면 정책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갈등 요인을 많이 담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최근 연재된 ‘비정규직 제로 선언, 그 후’ 기사를 취재한 <한겨레> 탐사팀 옥기원입니다. 앞에서 운을 뗀 것처럼 오늘은 정규직 전환 정책의 ‘아픈 손가락’인 자회사 난립 문제를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새해 초부터 복잡한 주제로 독자분들을 찾아뵙는 게 송구스럽습니다. 하지만 공공부문의 노동정책은 모든 노동자에게 영향을 끼칠 중요한 문제입니다. 지난 2개월 남짓 취재해 만든 5가지 통계로 자회사 문제를 이야기하겠습니다.
20만명 대 5만명. 앞은 공공부문 정규직 전환 목표치이고, 뒤는 자회사 정규직으로 간 노동자 추산치입니다. 정규직 전환자 넷 중 한명이 자회사로 간 겁니다. 보건복지부, 산업통상자원부 등 자회사를 만들 수 없는 중앙행정기관을 제외하면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 둘 중 한명이 자회사로 갔다는 통계가 나옵니다. 모회사에 직접고용이 됐어도 ‘진짜 정규직’이 된 건 아닙니다. 대다수의 전환자가 기존 정규직과 연봉·승급 체계가 다른 무기계약직이 됐습니다. 박근혜 정부 시절 노동계가 ‘중규직’이라고 비판하던 직군입니다. 수많은 자회사와 무기계약직을 낳은 정책을 ‘정규직화’라고 하는 것이 적절한지 의문입니다.
62개. 현 정부 들어서 공공기관들이 정규직 전환을 명목으로 세웠거나 세울 자회사 수입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자회사가 모회사의 건물과 시설을 청소·관리하는 ‘인력 공급형 용역회사’처럼 운영된다는 사실입니다. 직원 수 300명 미만의 자회사도 31개나 됐습니다. 전문가들은 공공부문에 이런 소규모 청소·관리 자회사 수십개가 생긴 건 이례가 없다고 평가합니다. 출자금 규모가 6억원대 미만으로 허약하고 전문성 확보 가능성도 작아 언제든 다시 외주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옵니다.
87억. 공공기관 90여개가 자회사 설립 과정에서 지출한 민간 컨설팅 비용입니다. 정부가 지원하는 무료 전문가 컨설팅도 있었지만, 공공기관들은 수억원짜리 민간 컨설팅을 찾았습니다. 보고서 분석 결과, 자회사 전환 결론을 얻기 위해 컨설팅 보고서를 중복 발주한 기관도 있었고 합리적인 근거 없이 자회사 결론으로 몰아간 ‘맞춤형 보고서’도 다수 발견됐습니다. 비정규직 인건비 인상에 벌벌 떨던 기관들이 자회사 결론을 얻기 위해 수억원의 컨설팅 비용을 쉽게 지출한 모습에 모순이 느껴졌습니다.
206만원. 자회사로 간 노동자들의 평균 월급입니다. 최저임금에 준하는 기본급에 당직비와 법적 상여금 등을 더한 액수입니다. 정규직이 됐다지만, 진짜 정규직 임금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입니다. 정부는 정규직 전환 후 임금이 15% 이상 올랐다고 발표했지만, 내막을 살펴보면 최근 몇년 사이 10% 이상 오른 최저임금 인상분을 반영한 결과였습니다. 정규직 전환 때문에 많은 세금이 낭비된다는 주장은 근거가 빈약합니다.
1만명. 자회사로 가게 될 생명·안전직 노동자의 수입니다. 국가보안시설을 지키는 특수경비, 발전시설 정비, 소방(시설)직 노동자 다수가 인건비 인상 문제 등을 이유로 자회사로 이직됐습니다. 이는 국민의 생명·안전에 영향을 미치는 직군은 직접고용해야 한다는 정규직 전환 가이드라인과 현 정부의 국정 과제와도 방향이 다릅니다. 세월호 참사와 김용균 사망 사고 이후에 정부가 강조한 생명·안전 직군의 중요성은 사실상 구호에 지나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정부는 분기마다 정규직 전환 실적을 발표합니다. 지난해 7월 기준 18만5천명의 정규직 전환이 결정돼 목표치 90%를 달성했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이 숫자에 가려진 불편한 진실이 있습니다. 5가지 통계가 말해주듯이 많은 공공기관이 변형된 외주화 방법인 자회사안을 선택했고, 노동자들은 자회사에 갇혀 비정규직일 때와 다르지 않은 차별을 받고 있다고 말합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자회사 노동자들은 “용역 때와 다르지 않다. 더는 희망이 없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자회사 설립이 바람직한 정규직 전환”이라는 공공기관과 정부의 자평이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입니다.
옥기원 탐사팀 기자
o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