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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노동

살처분 노동자 “피 튀기고 산 채로 기계에 갈리는 닭의 비명 끔찍”

등록 2019-02-13 05:00수정 2019-02-21 10:27

[살처분 트라우마 리포트] ①나는 살처분 노동자입니다
2000년 이후 AI·구제역 반복…반경 3㎞ ‘예방적 살처분’ 확대
2014년부터 일용직 투입…한해 많게는 수천만마리 ‘죽임’ 당해
닭 목 비트는 악몽에도, 굴착기에 치이고도…‘학살노동’ 강행군
살처분된 닭들을 포클레인으로 미리 파둔 구덩이로 옮기고 있다. 살처분 노동자 제공
살처분된 닭들을 포클레인으로 미리 파둔 구덩이로 옮기고 있다. 살처분 노동자 제공

구제역과 조류 인플루엔자(AI)는 국가재난형 가축 전염병이다. 정부는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해 병에 걸린 가축과 함께 주변의 멀쩡한 가축도 살처분한다. 2000년대 들어 살처분된 가축은 모두 9806만마리. 매년 544만마리 넘게 죽임을 당했다. 죽어야 하는 가축 건너편엔 죽여야 하는 사람이 있다. ‘살처분 노동자’들이다. 초기에 공무원을 동원했던 정부는 이제 일용직 노동자들에게 작업을 외주화한다. ‘대량 학살’의 경험은 살처분 노동자들에게 심각한 트라우마를 남기지만, 국가는 이들의 고통을 외면해왔다. <한겨레>는 살처분에 5차례 이상 참여했던 노동자 38명(공무원 17명, 일용직 16명, 방역업체 소속 5명)을 만나 1명당 최소 2시간 이상 인터뷰했다. 살처분 노동자의 트라우마를 깊이 들여다보고 살처분 산업의 외주화, 구멍 난 국가방역 시스템, 그리고 대안을 4차례에 걸쳐 짚어본다.

피가 2~3m 솟구쳐 올랐다. 오리의 창자가 툭 하고 터지더니 사체 안에 있던 알이 뿜어져 나왔다. 고글을 쓰지 않은 맨눈에 이물질이 들어왔다. 박선호(가명·67)는 아무렇지 않게 물로 눈을 씻어낸 뒤 다시 오리를 기계에 욱여넣었다. 병에 걸린, 때로는 병에 걸리지 않은 가축까지 분쇄해 가루로 만드는 작업이다. 가축 전염병이 창궐하면, 박선호는 그렇게 ‘살해’에 무감해진다.

박선호는 사무직으로 일하다 쉰여덟의 나이에 정년퇴직했다. 2014년 인력사무소에 나갔는데 경황없이 살처분 현장에 투입됐다. 2014년 1월부터 이듬해 11월까지 고병원성 조류 인플루엔자(AI)가 517일 동안 창궐하던 때였다. 박선호는 다른 일용직 노동자들과 함께 이산화탄소(CO₂) 가스로 오리들을 죽인 뒤 땅에 묻었다. 처음 작업에 투입됐을 때 기분을 묻는 말에 박선호는 오래 침묵했다. “살아 있는 생물을 가스로 죽인다는 게… 거북하고… 마음이 안 좋았어요.”

이산화탄소 가스를 주입한 비닐 안에 질식한 닭들이 쌓여 있다. 살처분 노동자 제공
이산화탄소 가스를 주입한 비닐 안에 질식한 닭들이 쌓여 있다. 살처분 노동자 제공
2016년 다시 에이아이가 대한민국을 강타했다. 국가는 다시 박선호를 찾았다. 한번 해본 탓일까. 박선호는 살생에 면역이 생겼다. 전북 김제·익산·부안, 전남 무안·영암 등 에이아이를 따라 박선호도 살처분 현장을 떠돌았다. 이산화탄소 가스를 쏴도 죽지 않은 동물을 발견하면 몽둥이를 휘두르고 목을 비틀어 숨을 끊었다. 하루 15만원. 자정까지 일하면 30만원. 밤을 새워 일한 날은 45만원을 손에 쥐었다고 한다. 꼬박 6개월을 그렇게 일했다.

“렌더링이 가장 잔인해요. 기계가 돌아가면 갈아진 것들이 막 튀어 나와요. 작업이 끝나면 새하얀 방역복 앞이 빨개요. 고기 살점도 튕겨 나오고 피도 튕겨 나오고… 범벅이 되죠. 차라리 땅에 묻는 게 쉽죠. 비위 안 좋은 사람은 조금 하다가 못 하겠다고 그만두고들 그래요.” 박선호가 크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렌더링은 살처분한 가축 사체를 분쇄한 뒤 고온·고압으로 멸균 처리하고 미생물과 함께 발효시켜 퇴비로 활용하는 작업이다. 정부는 전염병에 걸린 동물 사체를 땅에 매몰하지 않기 때문에 렌더링이 2차 오염 없는 친환경 처리법이라고 설명한다. 친환경적인지는 몰라도 정작 살처분 노동자들의 마음이 파괴된다는 사실을, 정부는 말하지 않는다.

렌더링 작업에는 한번에 4명이 필요하다. 기계 양쪽에 각각 2명이 서서 닭과 오리의 사체를 기계에 계속해서 집어넣는다. 박선호는 “가끔 살아 있는 닭과 오리를 렌더링 기계에 넣었다”고 고백했다. 전염병에 걸린 동물은 이산화탄소 가스 등으로 질식시켜 숨을 끊은 뒤 렌더링해야 한다. 현장에서 그 같은 원칙은 쉽게 무시됐다. 가스로 잠시 정신을 잃었던 오리가 깨어나면 산 채로 기계에 던져 넣었다. “깨깨갱” 3~6㎏ 되는 오리가 괴성을 질렀지만, 3~4초면 기계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박선호는 눈으로 그 장면을 보고 귀로 비명을 들어야 했다. 그뿐만 아니다. “피가 막 튀니까… 사람이든 동물이든 누구 피가 됐든 피를 보면 좀 그렇잖아요. 방역복을 입어도 손에 몸에 피 냄새도 배고….” 박선호는 시각과 청각, 후각과 촉각까지 모든 감각에서 생명을 짓이기는 듯한 이물감을 느꼈다.

지난 1월30일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오산리에서 살처분 노동자들이 렌더링 작업을 준비하고 있다. 오연서 기자 loveletter@hani.co.kr
지난 1월30일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오산리에서 살처분 노동자들이 렌더링 작업을 준비하고 있다. 오연서 기자 lovelett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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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고 더러운 일’ 살처분 노동자의 등장

가축 전염병의 시대. 에이아이와 구제역 등 2000년 이후 매년 반복되는 가축 전염병으로 한해 적게는 수백만, 많게는 수천만마리의 가축이 죽는다. 대부분은 질병에 걸리진 않았지만, 만약을 대비해 죽임을 당한다. 정부가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해 감염 농가 주변의 가축을 죽이는 ‘예방적 살처분’ 정책을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염병이 잦아질수록 정부는 예방적 살처분 범위를 넓혔다. 2011년 반경 500m였던 예방적 살처분 범위는 2016년 3㎞까지 확대됐다. 예방적 살처분 범위가 넓어질수록 죽임을 당하는 가축이 늘었다. 일용직 노동자들이 살처분 현장에 투입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른바 살처분 노동자의 탄생. 박선호가 바로 그중 한명이다.

아파트 3층. 10단짜리 배터리 케이지(밀집형 닭장)의 높이가 대략 그 정도다. 안전줄도 없이, 박선호는 먹이통을 밟고 조심조심 케이지를 탔다. 안전 대책은 발을 내딛기 전 툭툭 먹이통을 건드려보는 일이 전부다. 30차례 넘게 살처분에 참여했지만 닭장 타기는 늘 아슬아슬하다. “더 힘든 건 막상 올라갔는데 닭이 (가스를 먹고) 죽지 않고 살아 있을 때예요.”

살처분 작업의 시작은 우선 살아 있는 동물을 안락사시키는 것에서 시작한다. 평지에서 키우는 오리나 육계는 한쪽으로 몰아서 비닐을 덮어 밀폐한 뒤 이산화탄소 가스를 주입하고, 배터리 케이지에서 키우는 산란계는 케이지에 그대로 둔 채 계사 전체를 밀폐한 뒤 온도를 올리거나 이산화탄소 가스를 주입하는 방식으로 안락사시킨다. 하지만 가스를 주입해도, 보통 10마리 가운데 3마리는 살아 있다. “바쁘게 하려니까 두마리씩 확확 (다리를) 잡아채서 케이지에서 끄집어내거든요. 그럼 펴진 날개가 입구에 걸려서 ‘우두둑’ 날개 꺾이는 소리가 나요. 꽤애액 소리 지르면서 푸닥거리는데도 그냥 아래로 집어 던지죠.”

닭과 오리의 사체는 트럭에 실어 매몰지에 붓거나 렌더링 기계로 갈았다. 하지만 생명은 그렇게 쉽게 꺾이지 않는다. 이 과정까지 와도 늘 죽지 않은 동물은 있다. 그럴 때는 포클레인으로 살아 있는 닭들을 내리찍었다. 매몰지 구덩이 속으로 사람이 들어갈 순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도 살겠다고 경사를 타고 땅 위로 기어 올라오는 동물들이 아직 있다. 구덩이를 타고 올라오는 닭과 오리들을, 박선호 같은 이들이 잡아서 모가지를 비틀고 다시 구덩이로 던졌다.

죽은 닭도 간단치 않다. 2016년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일용직 노동자 알부카리(가명·33)가 투입된 농장은 농장주가 늑장 신고를 한 곳이었다. 부패가 시작돼 흐물흐물해진 사체를 처리하는 게 쉽지 않았다. 다리를 낚아채면 몸에서 다리만 분리되어 빠져나왔다. “똥 냄새에 피비린내가 섞이면 식욕이 없어지는 것보다 더한 느낌이야. 땅에 붙어 있는 내장도 떼야 하는데 떼려고 하면 또 부서지고….”

살처분 ‘마감시각’은 열악한 노동환경을 더욱 악화시켰다. 농림축산식품부의 ‘조류 인플루엔자 긴급행동지침’(AI SOP, 이하 긴급행동지침)을 보면, 에이아이 발생 농장은 24시간 안에, 반경 3㎞ 이내의 농장은 72시간 안에 살처분을 마쳐야 한다.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살처분을 하청받은 방역업체도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살처분을 서둘렀다. 야간작업으로 넘어가면 인건비가 50%가량 뛴다. 박선호가 지침을 어기고 살아 있는 닭과 오리를 렌더링 기계에 집어넣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다시 가스를 넣어서 죽이고 렌더링한다? ‘빨리빨리’가 미덕인 살처분 현장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또 다른 우즈베키스탄 일용직 노동자 아잠(가명·64) 역시 “우리는 너무 열심히 일해야 했다”며 “포클레인에 치여 다쳐도 2~3시간 현장에 앉아 있다가 다시 일하곤 했다”고 말했다. 고려인 노동자 마흐무드(가명·49)는 “나는 방법도 모르는데 계속 뛰고 덥고 정신적으로도 힘들었다”며 헛웃음을 지었다.

반복되는 살처분과 시간의 압박은 죽음에 무감해진 노동자들을 폭력적으로 변하게 했다. “가스를 넣으려고 살아 있는 닭을 비닐로 싸면 비닐 가장자리로 닭이 빠져나오려고 하거든요. 그러면 비닐을 잡고 있던 사람들이 닭을 막 발로 밟는 거야. 내가 ‘야 좀 밟지 마’ 했더니 무덤덤한 얼굴로 ‘어차피 죽는데 뭘’ 이러더라고요. 사람들은 닭뼈가 뚝 부러지면 머리카락이 쭉 올라가고 ‘마음이’가 아프다면서도 계속 밟았어요. 위험하고 힘들고 혐오스러운 일이죠.” 마흐무드가 말했다.

2016년 12월 경기도의 한 농장. 이 농장의 닭들은 조류 인플루엔자에 감염되지 않았지만 전염병 확산을 막으려 예방적 살처분이 결정됐다. 살처분 노동자 제공
2016년 12월 경기도의 한 농장. 이 농장의 닭들은 조류 인플루엔자에 감염되지 않았지만 전염병 확산을 막으려 예방적 살처분이 결정됐다. 살처분 노동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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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히 못 하겠다” 도망자 속출…악몽 호소도

살처분 현장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빨리 다 죽이는 것’이다. 일용직 노동자들은 농장 안에서 씻지도, 제대로 자지도 못했다. 이틀밤을 꼬박 일한 날 마흐무드는 4~5시간 쪽잠을 잤다. “농장 안에서 씻고 밥도 그 안에서 먹었어요. 왜냐면 (다 잡을 때까지) 못 나가요. 잠은 밥 먹고 30~40분씩? 그리고 일어나서 커피 한잔 하고 다시 일했어요.”

식사도 엉망이었다. 한겨울에 초코파이와 차가운 우유가 나왔다. 그것도 최악은 아니었다. ‘닭고기’가 도시락으로 나오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저녁 도시락에 닭고기가 있는 거예요. 닭 잡고 나면 닭고기 쳐다보기도 싫은데… 어떤 사람이 ‘이거 우리가 잡은 닭으로 만들어 가져왔냐’고 했다니까요.”

건설 현장보다 1.5배 많은 일당에도 ‘도망자’가 속출했다. 축산직 공무원과 방역업체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일한 지 1시간 만에 ‘나 못 하겠다’며 두손 두발 드는 사람, 농장 앞까지 왔다가 돌아서는 사람이 현장마다 꼭 있다고 했다. “점심도 안 먹고 물도 안 마신 사람도 있었어요. 다음날 가자고 했더니 일당 50만원 줘도 안 간대요. 살처분 첫날 70명 중에 절반이 ‘못 하겠다’고 나가더라고요.”(알부카리)

“뭔지 모르지만 그냥… 식욕이 사라졌어요. 지독했어요. 지독해요. 병에 걸려서 사지가 갈라진 모습, 내장이 흩뿌려져 땅에 들러붙어 있는 모습….”(우즈베키스탄 이주노동자 아잠)

<한겨레>와 만난 일용직 노동자들은 끔찍한 기억을 토로했다. 살처분 이후 악몽을 꿨다는 이들도 다수였다. 충북에서 태어난 정재혁(가명·32)도 그런 경우다. 2006년 그곳에서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기계회사에 취업해 용접을 하고 싶었다. 취업을 위해 서울에서 1년을 버텼지만 취업은 쉽지 않았다. 군 제대 뒤 고향에 내려와 1년 정도 편의점과 피시방을 전전했다. 이후 3년간 아버지의 고추 농사를 돕다가 “집에 눈치가 보여서” 다시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27살 정재혁이 인력사무소에 나가게 된 까닭이다. 건설 현장, 공장 등 주는 일은 뭐든 마다치 않았던 정재혁은 2016년 처음 살처분 현장에 나갔다. “처음에, 충격, 많이 받았어요. 막 죽이고… 땅속에 묻는 그런 게 제일 싫었어요. 그 생각만 해도….” 정재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첫날 이후 다시는 살처분 현장에 가지 않기로 다짐했었어요.” 그러나 정재혁은 이후에도 살처분 현장에 20여번 더 나갔다.

정재혁은 살처분 둘째 날 제 손으로 닭의 모가지를 비틀었다. 스트레스 때문이었다. 처리해야 할 닭은 끝도 없이 쏟아졌다. 그러자 갑자기 어차피 죽을 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하면) 기분이 나아질 줄 알았어요.” 하지만 정재혁의 두 손에는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촉감만 남았다. 그날 밤 악몽을 꿨다. 이후로도 살처분 현장에 나갈 때마다 꿈자리가 사나웠다. 온몸에 식은땀이 나는 꿈이었다. 종교가 없는 정재혁은 생전 처음 절을 찾았다. “악몽을 꾸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어요.”

정재혁은 인터뷰 내내 자신이 겪었던 일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힘들었다”는 단순 형용사만 반복했다. 스무번 이상 살처분 현장에 나가도 아픔은 익숙해지지 않았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현장에 나갔던 날 엄습한 고통의 크기가 처음 현장에 나갔던 날의 고통의 크기와 다르지 않았다. 거듭 마음이 아팠던 이유를 묻자 “매몰지”라는 짧은 답이 돌아왔다. 정재혁은 2016년 11월 대규모로 닭을 묻은 매몰 작업을 한 뒤 지금까지 닭고기를 먹지 못한다. 달걀도 마찬가지다. 한참 침묵하던 정재혁이 어렵게 입을 뗐다. “제게 트라우마가 있는 것 같아요. 심리검사를 받고 싶어요. 제가 왜 이런 건지 설명을 듣고 싶어요.” 정재혁은 자신의 마음속이 얼마나 곪아 있는지 알지 못했다.

오랜 고통에도 정재혁은 누구에게도 이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다고 했다. “가족들에게 살처분했다는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어요. 걱정할까 봐. 닭 못 먹겠다는 이야기도 아무한테도 안 했어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어요.”

살처분 현장에서 일하는 일용직 노동자들의 정신건강에 대한 우려는 여러번 제기됐다. “이제 일하는 방법은 아니까 육체적으로는 힘이 별로 안 들어요. 근데 렌더링은 끝까지 익숙해지지 않더라고요. 피가 막 튀는 걸 보잖아요. 하다 보면 안 좋은 느낌이 없어질 줄 알았어. 근데 끝까지 안 없어져.”(마흐무드)

살처분된 닭들을 흙 구덩이에 묻고 있다. 살처분 노동자 제공.
살처분된 닭들을 흙 구덩이에 묻고 있다. 살처분 노동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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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의 노동환경 버티는 이유 ‘돈’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이 지배하는 살육의 현장에 일용직 노동자들이 다시 설 수밖에 없는 이유는 ‘돈’이다. <한겨레>가 인터뷰한 살처분 경험이 있는 일용직 노동자 16명은 산업 현장의 최하층을 구성하는 외국인 이주노동자이거나 겨울철 마땅한 소득이 없는 농촌 지역 주변부 노동자였다. 지역별로 차이가 있지만, 살처분 작업의 하루 일당은 18만원 안팎이다. 건설 현장의 1.5배다.

특히 미등록 상태여서 공장 취업이 어려운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에게 살처분 현장은 신변의 위협 없이 고임금을 벌 수 있는 일자리다. 외국인 이주노동자의 경우 합법적 체류 기간은 최장 4년10개월이지만, “한국에 들어오기 위해 큰돈을 쓴” 외국인 노동자들은 그 기간을 넘겨도 가능하면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길 원한다. ‘손이 부족한’ 살처분 현장에선 이들의 신분을 일일이 확인하지 않았다. 체류를 허락하지 않았던 국가는 이런 곳에서 위선을 드러냈다.

“예전 아이디(ID)가 있으니까 그걸 내면 됐어요.” 2013년 한국에 들어온 무사예프(가명·37)는 주물공장 용광로에서 일하다 위장병을 얻었다. 한국 의사는 “암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무사예프는 치료를 위해 고국에 갔다가 한국 공장에서 해고돼 미등록 상태가 됐다. 지금도 일주일에 3만원가량을 내고 위장약을 먹는다. 고향을 오가느라 돈을 모으지 못했다. “밤 12시까지 일하면 ‘샴십만원’(30만원) 준다. 겨울에 일이 없는데 무슨 일이든 잘 잡아야지.” 또 다른 미등록 이주노동자 알부카리는 “닭을 잡아서” 한달에 600만원 넘게 벌었다고 강조했다. 알부카리는 닭의 떼죽음을 보고 한달간 식욕이 사라졌지만 에이아이가 터지면 “또 갈 것”이라고 했다.

각자의 이유로 한곳에 정착하지 못한 한국인들도 살처분 현장에 모였다. 살처분 현장에서 흔치 않은 여성인 김진경(가명·37)은 ‘학습지’ 때문에 작업에 참여했다. 15살·13살·11살 삼형제의 엄마인 김진경은 납품 배달일을 하는 남편의 벌이만으론 생계가 빠듯했다. 학원은 못 보내더라도 학습지라도 계속 시키고 싶었다. 자동차 부품으로 들어가는 전선을 조립하고 편의점 아르바이트도 했다. “한달 벌어 한달 생활하면 저축이란 걸 할 수 없으니까. 저도 벌어야죠.” 공장 일도 없던 2016년 겨울, 때마침 에이아이가 터졌다. 김진경은 인력사무소 소장에게 “만약 여자도 쓰면 살처분 현장에 가보고 싶다”고 선수를 쳤다. “순대공장에선 하루에 6만~7만원 벌었는데, 여기선 하루에 10만원가량을 받았어요.”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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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하겠으면 그만둬”…트라우마조차 호소할 수 없는 현실

“억지로 시키지 않는다. 정신적으로 힘들다고 불평하려면 돈 벌러 오지 말아야 한다.”(박선호)

“나는 돈 때문에 하고 있잖아. 돈 벌러 왔으니까 힘들어도, 좀 불편해도 (참아야지).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어.”(마흐무드)

일용직 노동자들은 ‘돈’을 받는다는 이유로, 자발적 선택으로 살처분 현장에 남았다는 이유로 고통을 호소할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 이런 이유 때문일까. <한겨레>가 만난 노동자들은 자신의 트라우마를 털어놓으면서도 자기 안에 트라우마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했다. 30번쯤 살처분에 참여한 일용직 노동자 김성철(가명·37)은 “살아 있는 닭을 죽이는 꿈을 반복적으로 꾼다”고 했다. 그럼에도 ‘트라우마가 있냐’는 질문에 김성철은 이렇게 답했다. “자다가 깰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트라우마는 전혀 없어요.”

살처분 작업의 특수성을 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산업안전보건공단은 ‘살처분 매몰처리 작업자 건강관리지침’에서 “살처분 작업은 급성 스트레스 반응,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우울 장애, 수면 장애, 공황 발작 등을 일으킬 수 있는 정신적 충격이 큰 작업”이라며 ‘직무 스트레스 회복 센터’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우려에도 살처분 참여자들의 고통은 관리되지 않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17년 ‘가축매몰(살처분) 참여자 트라우마 현황 실태조사’ 보고서에서 “일용직 노동자들은 가장 많은 위험에 노출되지만 이런 위험에 대해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하고 현장에 투입되는 경우가 많다. 사후관리도 전혀 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수명(가명·59)은 살처분 현장에서 일하다 도망쳤다. 그는 박선호가 말한 ‘비위 안 좋은 사람’ 가운데 한명이다. 순대국도 잘 먹지 못한다는 이수명은 2017년 겨울 생계를 위해 보름 정도 살처분에 참여했다. 근근이 현장을 버티던 이수명은 박선호가 렌더링 작업을 시킨 직후 일을 그만뒀다.

‘가슴에 꽂혀서 지금도 잊히질 않는다’는 어떤 소리 때문이었다. “아직 숨이 붙은 닭들이 제 운명을 아는지 스크루에 빨려들어 가면서 비명을 질러댔어요.” 건강할수록, 살아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 비참하게 죽는 살처분의 역설을 이수명은 금세 알아챘다. “가장 밑바닥(인생)이라 더 물러설 데가 없어서 농장, 공장 닥치는 대로 다 했어요. 그런데 렌더링만큼은 내 손으로 할 수가 없더라고요. 아무리 먹고살기 위해 하는 일이지만 기본적인 양심, 마음은 갖고 살아야 하지 않겠어요?”

이수명은 트라우마에 대해 말해주겠다며 <한겨레>와 추가 인터뷰 약속을 잡았다. 하지만 이수명은 인터뷰 당일 “오전에 면접에서 떨어졌다. 다시 오후에 일을 구해야 한다”는 문자메시지를 끝으로 더는 연락을 해 오지 않았다. 삶은 이수명에게 가슴속 응어리를 토해낼 잠시의 짬도 허락하지 않았다.

특별취재팀 황춘화 이유진 오연서 이정규 이주빈 장예지 전광준 기자 sflow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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