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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노동

약자들의 연대가 모두의 승리를 불러왔다

등록 2018-02-24 09:45수정 2021-03-21 18:23

[토요판] 임자운의 반도체 소송기
⑤ 희진씨의 승리

LCD 생산공장에서 ‘패널 검사’ 담당
유기용제로 이물질 닦아내기도

삼성, 유병률 “10만명당 3.32명” 주장
‘근무자 수’ 늘리고 연령효과도 제외
20대 유병률보다 외려 높다는 방증

1·2심 모두 졌으나 대법원에서 승소
대법원, 산보연 조사 허점 지적하며
삼성 쪽 주장 조목조목 반박 나서

삼성전자 반도체·엘시디(LCD) 공장에서 일하던 세명의 여성 노동자가 ‘다발성 경화증’이라는 희귀질환에 걸렸다. 이들의 업무환경에는 공통점이 많았다. 특히 밀폐된 공간에서 유기용제(다른 물질을 녹이는 성질이 있는 유기 화합물)를 취급한 점과 오랜 시간 야간 교대근무를 한 점, 상시적인 과로·스트레스에 시달렸다는 점이 같았다.

이들은 직업병 피해를 인정받기 위해 각각 소송을 제기했다. 나는 이들의 변호사가 되어 질병과 업무의 인과관계를 밝혀야 했다. 하지만 제일 먼저 소송을 제기한 희진씨가 1, 2심에서 졌고 소정씨도 1심에서 졌다. 가장 나중에 소를 제기한 수연(가명)씨만 1심에서 이겼다. 2017년 1월의 일이다. 연이은 패소 판결로 암담했던 상황에서 극적으로 거둔 첫 승리였지만, 여전히 불안했다. 2심에서 다시 뒤집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연씨와 소정씨 2심 판결이 중요했다. 두 사건을 먼저 이겨야 희진씨에 대한 대법원 판결도 기대를 걸어볼 수 있었다.

네번째 피해자의 등장

그러던 어느 날,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반올림) 앞으로 익명의 메일이 왔다. 기사를 통해 알게 된 수연씨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며, 본인도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다발성 경화증’에 걸렸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네번째 다발성 경화증 피해자인 은영(가명)씨를 알게 됐다. 나는 바로 답장을 보내 직접 만나줄 것을 청했다. 하지만 은영씨는 수연씨가 이 병을 이겨내는 데 도움을 주고 싶었을 뿐, 반올림을 직접 만나는 건 부담스럽다고 했다. 나는 소송 상황을 설명하며 거듭 도움을 청했고, 결국 은영씨도 마음을 열어주었다.

은영씨 집에서 은영씨와 어머님을 함께 만났다. 삼성 반도체 기흥공장에서 8년간 일했다고 했다. 자세한 업무내역을 들으니 원고들과 비슷한 점이 많았다. 역시 밀폐된 공간에서 유기용제를 많이 취급했고 야간 교대근무를 했다. 20대에 다발성 경화증 진단을 받은 점, 이 병과 관련 있는 가족력이나 다른 개인 병력이 없었던 점도 같았다.

나는 은영씨의 진술서와 의무기록을 법원에 제출하며 주장했다. 국내 유병률이 10만명당 3.5명에 불과한 희귀질환이 삼성 반도체·엘시디 여성 오퍼레이터들 중에서만 벌써 네명이 확인됐다고, 반올림에 제보한 사람의 수가 그러하니 얼마든지 더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삼성의 의도치 않은 ‘도움’

2017년 4월, 삼성전자가 법원에 뜻밖의 자료를 냈다. 수연씨 1심 판결을 뒤집어보려는 시도였지만,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매우 유리한 자료가 되었다.

수연씨 1심 판결 내용 중에 이런 표현이 있었다. “삼성전자 반도체 및 엘시디 사업장에서의 다발성 경화증 유병률은 한국인 평균 유병률을 상회한다.” 엄밀하게는 정확한 표현이 아니었다. 그 유병률(일정 기간 특정 집단에서 나타나는 그 집단 인구에 대한 환자 수의 비율)을 추산하려면 분모에 해당하는 ‘전체 근무자 수’와 분자에 해당하는 ‘유병자 수’를 모두 정확하게 알아야 하지만, 삼성은 관련 자료를 공개한 적이 없었다. 이 때문에 그 사업장에서의 유병률이 국내 평균 유병률을 상회한다는 것은 추측에 불과했다.

그런데 삼성이 판결문의 이 부분을 직접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처음으로 ‘전체 근무자 수’(지난 10년간 삼성전자 사업장 누적 근무자 수, 약 12만명)를 밝히면서 이를 분모에 놓고, 지금까지 확인된 유병자 수 네명을 분자로 삼아 직접 “당사 유병률”을 추산해보았다고 했다. 그 결과 “10만명당 3.32명”으로 한국인 평균 유병률(10만명당 3.5명)보다 오히려 낮다고 주장했다.

삼성의 이러한 유병률 추산에는 크게 두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첫째, 분모에 해당하는 ‘전체 근무자 수’를 지나치게 확대했다. 사무직 종사자와 반도체·엘시디 생산공장이 아닌 사업장의 근무자까지 그 안에 포함시켰다. 둘째, 이른바 ‘연령효과’를 고려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질병은 연령에 따라 유병률이 크게 달라진다. 다발성 경화증도 연령과 비례하여 유병률이 높아지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확인된 피해자 네명이 모두 20대에 발병했고 지금은 30대가 되었으므로, ‘비슷한 연령대의’ 유병률과 비교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삼성은 한국인 ‘평균’ 유병률과 비교했다.

그렇다면 비슷한 연령대의 유병률과 비교하면 어떻게 될까. 한국인 20대의 다발성 경화증 유병률은 ‘10만명당 1.4명’이다. 이미 삼성이 직접 추산한 “당사 유병률(10만명당 3.32명)”과 차이가 크다. 삼성이 지나치게 확대한 ‘전체 근무자 수’(약 12만명)를 그대로 분모에 두더라도 이만큼의 차이가 벌어진다는 얘기다. 만일 그 12만명 중 반도체·엘시디 생산라인에서 근무했던 20대 여성 오퍼레이터만을 추려 유병률을 추산하면, 차이는 수십배까지 벌어질 것이다. 결국 우리는 삼성이 제출한 자료를 통해 그 공장에서의 다발성 경화증 유병률이 국내 평균 유병률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분석에는 고려대학교 보건과학대학 김승섭 교수의 도움이 컸다. 그는 나의 급작스러운 요청에도 불구하고 삼성 쪽 주장의 문제점이 꼼꼼하게 정리된 소견서를 보내줬다. 3일간 학생들과 회의를 해가며 작성한 소견서라고 했다. 그의 최근 저서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는 당시의 소회가 적혀 있다. “누군가는 그들 편에 서야 한다.” 그는 ‘연구자가 거대 기업에 맞선다는 것의 의미’를 이 한 문장으로 표현했다.

“삼성노동자의 다발성 경화증은 직업병”

2017년 5월과 7월, 소정씨와 수연씨의 2심 판결이 잇따라 나왔다. 모두 우리가 이겼다.

서울고등법원은 “다발성 경화증의 요인으로서 의학적으로 인정되는 유기용제 노출, 청소년기 교대근무, 자외선 노출 부족에 중첩적으로 노출되었고 그 기간도 상당했으므로 이러한 요인들이 합쳐져 상병의 발병 또는 악화를 일으켰다”고 보았다. 법원은 ‘유병률’과 관련해서도 “삼성전자가 밝힌 누적 임직원 수를 토대로 유병률을 추산하면 우리나라 국민 20대 유병률보다 훨씬 높다”며 우리의 주장을 그대로 인용했다. 피고 근로복지공단이 두 사건에서 모두 상고를 포기하면서 두 사람의 다발성 경화증은 직업병으로 확정됐다.

이제 남은 것은 희진씨에 대한 대법원 판결뿐이었다. 가장 먼저 시작된 소송이 가장 마지막까지 남았다. 그만큼 제일 어려운 사건이었다. 너무 많은 것이 은폐되었기 때문이다. 삼성의 업무환경 은폐는 거의 모든 직업병 사건에서 벌어졌지만, 희진씨 사건에서 특히 심했다.

희진씨는 18살에 삼성전자에 입사해 엘시디 생산공장에서 ‘패널 검사’ 업무를 했다. 시간당 80여개의 패널을 보고 색상이나 패턴 불량을 골라내야 하는,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업무였다. 더욱이 회사가 조별로 성과 경쟁을 시켰고 불량 제품을 놓칠 때마다 사유서를 쓰게 하여 “항상 긴장하고 스트레스 받으며” 일했다고 한다. 근무 중 쉬는 시간은 없었고 화장실에 가기도 어려웠으며, 식사시간도 너무 짧아 잦은 소화불량에 시달렸다고도 했다. 유기용제로 패널에 묻은 이물질을 닦아내야 했고, 바로 옆 공정(패널에 열을 가해 성능을 검사하는 ‘에이징’ 공정)에서 넘어오는 온갖 좋지 않은 냄새들도 일회용 마스크 하나로 견뎠다. 그렇게 4년3개월간 일하다 건강이 나빠져 퇴사했고 이듬해에 ‘다발성 경화증’ 진단을 받았다.

하지만 삼성은 이와 같은 희진씨의 업무 관련 진술들을 거짓으로 몰았다. ‘패널 검사’ 업무는 “화학물질을 사용하지 않는”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었으며, 회사가 사유서를 쓰게 한 적도 조별 경쟁을 강요한 적도 없다고 했다. 심지어 업무 중 “자유롭게” 휴식을 취하거나 화장실을 갈 수 있었다고 했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희진씨의 업무환경을 조사하며, 삼성 쪽 진술에 무게를 실었다. 반면 희진씨가 주장한 유기용제 노출과 인근 공정에서 발생하는 화학물질 노출에 대해서는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다.

소송이 시작되자 삼성은 판사 출신 변호사들을 대거 투입했다. 이들은 희진씨의 여러 생활습관들을 문제 삼으며 그러한 개인적 요인들이 질병을 일으켰다고 했다. 아울러 삼성은 엘시디 생산공장의 업무환경을 더욱 과감하게 은폐했다. 법원이 그 공장에 관한 ‘안전보건 진단 보고서’를 요청하자, 삼성은 보고서의 주요 내용을 삭제했을 뿐 아니라 그 내용 중 상당 부분을 직접 고쳐서 법원에 제출했다.

삼성의 이러한 노력들에 힘입어 희진씨는 1, 2심에서 패소했다. 결국 대법원의 최종 판단은 산보연의 부실한 역학조사 문제와 다발성 경화증의 발병 원인에 대한 종래 연구 결과들, 그리고 삼성의 이러한 은폐 행위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달려 있었다.

삼성노동인권지킴이
삼성노동인권지킴이

대법원의 ‘분노’

2017년 8월29일.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우리가 이겼다. 결과뿐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기대 이상의 승리였다.

대법원은 먼저 반도체와 같은 “첨단산업 분야”에서 노동자들이 겪게 되는 특수한 위험들에 대해 언급했다. 직업병 연구가 부족하고 영업비밀로 감추어진 정보가 많으며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령상 규제, 안전대책 등이 불충분하므로 산재보험제도가 이처럼 “불확실한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첨단산업 분야 노동자들을 보호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를 전제로 직업병 판정에 관한 몇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이를테면 “업무와 질병의 인과관계를 명확하게 규명하는 것이 현재의 의학 수준에서 곤란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인과관계를 쉽사리 부정할 수 없다”고 했고, “사업주나 행정청의 잘못으로 작업환경을 밝힐 수 없었다면 그러한 사정은 근로자에게 유리한 간접사실로 고려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대법원은 이 사건에서 산보연의 역학조사에 어떤 문제가 있었고, 삼성이 무엇을 은폐했는지, 구체적으로 짚었다. 먼저 산보연에 대해서는 “근로자가 유해물질에 노출된 수준을 객관적으로 확인·측정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고 지적했고, 삼성에 대해서는 “공정에서 취급하는 유해화학물질, 작업환경 측정, 안전검사 실시, 보호구 지급, 근로자 건강관리 현황 등에 관한 정보를 영업비밀이라며 공개하지 않았다”고 명시했다.

판결문을 읽다 보면 간혹 재판부가 작심하고 썼구나 싶을 때가 있다. 이 대법원 판결이 그랬다. 반도체 직업병 문제를 이 지경까지 끌고 온 정부와 기업에 대한 대법원의 ‘분노’가 느껴졌다. 또한 ‘산재보험제도를 본래 목적과 취지에 맞게 운영하라’는 최고 법원의 준엄한 명령이 담겨 있었다.

결국 대법원은 희진씨의 유기용제 취급, 야간 교대근무, 업무상 과로·스트레스 등을 이유로, “원고의 업무와 다발성 경화증 사이에 상당 인과관계를 긍정할 여지가 있다”고 했고, 근로복지공단은 이 판결의 취지에 맞게 희진씨에게 다시 산재 인정 처분을 내렸다.

가를수록 뭉쳤다

그렇게 삼성 반도체·엘시디 공장에서 일하다 ‘다발성 경화증’에 걸린 세명의 노동자가 모두 소송에서 이겼다. 돌아보면 이들은 서로를 절묘하게 도왔다. 한 사람의 1심 승소가 또 한 사람의 2심 승소를 이끌었고, 두 사람의 승소는 다시 나머지 한 사람의 3심 승소를 이끌었다. 소송 중간에 나타난 은영씨의 도움도 컸다. 이들 중 한명이라도 나서지 않았거나 중간에 싸움을 포기했다면, 어쩌면 누구도 이기지 못했을지 모른다. 이들은 그렇게 함께, 이 땅의 모든 직업병 피해자들에게 큰 힘이 될 대법원 판결까지 만들어냈다.

약자들의 연대는 이처럼 큰 힘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삼성은 노동자들의 연대를 좋아하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직업병 피해 가족들이 서로를 만나는 것도 원치 않았다. 삼성이 2015년, 교섭약속마저 파기한 채 강행한 보상 절차라는 것도 결국은 피해 가족들을 일일이 찾아가 개별 합의를 종용하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피해자들을 갈라쳐 이 문제가 은폐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럴수록 피해 가족들은 더 단단하게 뭉쳤고 서로를 도왔다. 그들은 그렇게 삼성을 이겨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다음달 6일이면 삼성 직업병 문제를 처음 세상에 알린 황유미씨의 11주기가 된다. 올해도 피해 가족들과 활동가, 시민들이 함께하는 추모문화제가 서울 강남역 부근에서 열린다. 다시 또 뭉쳐야 할 시간, 많은 사람들이 함께해주면 좋겠다.

참여연대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2015년 7월30일 오전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서초사옥 앞에서 “삼성은 삼성직업병 문제 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에서 낸 권고안을 조속히 수용하라”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참여연대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2015년 7월30일 오전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서초사옥 앞에서 “삼성은 삼성직업병 문제 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에서 낸 권고안을 조속히 수용하라”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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