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반도체 피해자 가족들이 3월6일 오전 서울 서초동 삼성본관 앞에서 삼성 직업병 해결 촉구 1만 서명 전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지난해 7월, 반도체 직업병 문제에 관하여 매우 의미있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이 지난 10년간 거리와 법정에서 주장했던 내용들이 촘촘히 박혀 있는 ‘종합선물세트’ 같은 판결문을 받았다. 반향도 컸다. 근로복지공단은 판결 직후 그 내용을 산하기관에 전파했고, 공단 이사장은 국정감사장에서 “이번 대법원 판결을 적극 반영하여 제도를 개선하겠다”고 약속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과 <경향신문>, <한겨레21>은 일제히 이 판결을 2017년 최고의 판결로 꼽았다. 선정에 참여한 김태욱 변호사는 “산재보험 제도의 존재 이유를 명확히 한 올해 최고의 판결”이라 평했다.
삼성전자 희귀질환 피해자인 희진씨에 대한 판결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을 돌아보면 서로 다른 세 사건이 얽히고설켜 있다. 그 안에서 나는 참담하게 패하기도 했고 가슴 졸인 끝에 승리하기도 했다. 지금부터 그 사건들에 대해 두 차례에 걸쳐 얘기하려 한다.
‘다발성경화증’이라는 희귀질환
‘다발성경화증’이라는 병이 있다. 중추신경계를 구성하는 세포조직에 다발적 손상이 일어나는 병이다. 중추신경계는 뇌, 척수, 시신경을 포함하고 있어 그중 어디에 손상이 발생하는지에 따라 증상도 다양하다. 시력을 잃거나 하반신이 마비되기도 하고 인지 장애를 겪기도 한다. 그만큼 병을 발견하는 것도 쉽지 않다. 아직 명확한 발병 원인도 확실한 치료 기술도 알려지지 않았다. 증상을 약화시키기 위해 스테로이드를 투여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에 따른 부작용으로 뼈와 장기에 손상을 입기도 한다.
이 병은 희귀질환이다. 국내에서 이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은 10만명당 3.5명, 20대 중에서는 10만명당 1.4명에 불과하다. 그런데 삼성전자 반도체·엘시디(LCD) 공장에서만 3명의 피해자가 나왔다. 희진씨와 수연(가명)씨, 그리고 소정씨다. 모두 생산직 오퍼레이터였고 20대에 다발성경화증 진단을 받았다.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근로복지공단은 이들의 산재 보상 신청을 모두 거부했다. 주된 이유는 “병의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삼성이 제출한 자료만 들여다본 뒤 “유해물질에 노출된 정도가 확인되지 않았다”고도 했다.
2011년 4월, 희진씨부터 소송을 제기했다. 조지훈 변호사(법무법인 다산)가 소송 대리를 맡았다. 2013년 5월, 수연씨와 소정씨도 소송을 시작했다. 두 사건은 나에게 맡겨졌다. 나는 희진씨 소송에도 합류했다. 당시 나는 막 사법연수원을 졸업하고 반올림 활동가가 된 ‘초짜’ 변호사였다. 부담이 컸지만 피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계속되는 삼성의 거짓과 은폐
이들의 업무에 대한 삼성의 주장은 분명했다. “직접 사용한 화학물질 없음” “화학물질에 대해 교육했고 환기장치가 늘 정상 가동되었음” “업무 관련 스트레스 요인은 없었음” “근무 중 얼마든지 화장실을 가거나 휴식을 취할 수 있었음”. 물론 피해자들의 진술은 완전히 달랐다. 화학물질을 자주 취급했지만 그 위험성에 대한 교육은 없었고 환기장치는 수시로 고장났다고 했다. 조별로 생산량 경쟁을 시켜 과로·스트레스도 심했고 근무 중 휴식시간은 없었으며 화장실도 가기 어려웠다고 했다.
한편 삼성은 한 사건에 판사 출신 변호사 세명을 고용했다. 그중 한명은 법원장, 또 한명은 고등법원 부장판사까지 거친 변호사였다. 그들은 소송에서 피해자의 진술을 거짓으로 몰았고 피해자의 개인적 생활 습관과 체중을 문제 삼기도 했다.
우리는 피해자들의 업무 내용을 정리하고 그 안에서 노출된 유해물질들을 강조했다. 그 유해물질이 다발성경화증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전문가의 소견을 제출하기도 했다. 그렇게 업무와 질병의 관련성을 입증하고자 했지만 쉽지 않았다. 피해자들의 업무에 은폐된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소송에서 삼성은 법원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해당 사업장에 대한 ‘가스누출 감지 시스템 작동 내역’ ‘작업환경 측정 보고서’ ‘안전보건 진단 보고서’를 끝내 제출하지 않았다. 원고들이 취급한 화학제품들의 성분도 그 생산업체의 ‘영업비밀’을 이유로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잇따른 패소 판결
2014년 9월, 희진씨 사건 1심 판결이 나왔다. 결과는 원고 패소. 법원은 희진씨의 유해물질 노출과 과로·스트레스를 인정하면서도 “다발성경화증은 그 발병 원인이 정확하게 밝혀진 바 없고” “원고가 유해물질에 노출된 정도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도 없다”며 질병의 업무관련성을 부인했다. 우리는 고등법원에 항소했다.
2015년 10월, 희진씨 사건 2심 판결이 나왔다. 다시 원고 패소. 고등법원도 “원고가 어떤 유해물질에 어느 정도 노출되었는지를 알 수 없으므로 유해물질 노출을 발병 원인으로 단정할 수 없다”고 했다. 우리는 다시 대법원에 상고했다.
2015년 11월, 소정씨 사건 1심 판결도 나왔다. 역시 원고 패소. 패소 이유는 희진씨 사건 때와 비슷했다. 우리는 이 사건도 고등법원에 항소했다.
다음에는 수연씨 사건 1심 판결이 나올 차례였다. 전망은 밝지 않았다. 사실 암담할 정도였다. 같은 사업장에서 발생한 같은 질병에 대해 연이어 ‘원고 패소’ 판결이 나온 것은 수연씨 사건에도 나쁜 영향을 미칠 게 분명했다. 물론 그렇다고 포기할 수 있는 싸움은 아니었다.
수연씨는 만 17세에 공장에 들어가 20세에 다발성경화증 진단을 받았다. 병의 악화는 수연씨의 시력을 급격하게 떨어뜨렸고 잦은 스테로이드제 투여는 고관절을 심하게 망가뜨렸다. 투병한 지 15년이 되던 해, 의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고 한다. 시력을 살리고 싶은지, 다리를 살리고 싶은지. 결국 수연씨는 1급 시각장애인이 되었고 목발에 의지하며 걷고 있다. 일을 할 수 없어 기초생활수급자로 생계를 잇는다. 그런데 삼성은 수연씨와 같은 다발성경화증 피해자들에게 병원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보상금을 제시하며 합의를 종용해왔다. 나는 반올림 활동가로서 그리고 변호사로서, 어떻게든 이 싸움을 이겨야 했다.
수연씨는 3년간 엘시디 패널에 인쇄회로기판(PCB)을 부착하는 일을 했다. 접합 부위인 패널의 가장자리를 각종 유기용제로 닦아내야 했고, 접착제로는 에폭시 물질과 납을 썼다. 유기용제(다른 물질을 녹이는 성질이 있는 유기 화합물)는 대표적인 신경독성 물질이고 에폭시 물질(ACF)과 납땜 물질(와이어솔더, 플럭스)에도 독성이 있었다. 나는 소송에서 이들의 유해성을 강조했다.
다발성경화증의 발병 원인에 대한 연구 결과들도 최대한 끌어모았다. 직업환경의학 전문의이자 반올림 활동가인 공유정옥의 도움으로 최근 논문까지 찾았다. ‘유기용제 노출’과 ‘20세 이전에 시작된 교대근무’가 이 병의 발병 위험을 높인다는 연구 결과가 꽤 있었다. 10여개의 논문을 추려 그 내용을 정리해서 제출했다.
2016년 7월, 나로서도 더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었을 때, 재판부는 변론을 종결하며 한달 후에 판결을 선고하겠다고 했다. 가슴 졸이며 기다렸다. 그런데 막상 한달 후가 되자 재판부는 또 한달 뒤로 선고를 연기했고, 그 후로도 세 차례 더 선고를 미뤘다. 결국 해를 넘기고 2017년 1월이 되자, 재판부는 양측을 다시 불렀다. 판사는 희진씨에 대한 대법원 판결을 기다렸다고 했다. 그런데 그 판결이 나오지 않으니 최종 변론을 듣고 자체 판단을 해보겠다며, 법정에서 프레젠테이션(PT)을 해볼 것을 권했다. 나는 기꺼이 하겠다고 했다.
법정 프레젠테이션
2017년 1월25일, 법정에서 최종 변론에 갈음한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나는 40여장의 파워포인트 자료를 이용하여 그동안 재판에서 나왔던 주장과 증거를 요약했다. 삼성이 수연씨의 업무에 관해 무엇을 은폐했고, 그것이 어떻게 평가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피고 측이 가장 강조했던, “다발성경화증의 명확한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는 주장에 대해 말했다. 이것은 앞서 희진씨, 소정씨 재판에서 우리가 패소하게 된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이미 유기용제, 교대근무 등과 다발성경화증의 관련성을 긍정하는 10여개의 논문을 제출했지만, 피고는 이에 대해서도 “그러한 연구는 아직 명확하거나 일관되지 못하다”고 했다. 피고의 이러한 주장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분명하게 밝혀야 했다.
중추신경계 세포 손상 ‘다발성경화증’
10만명당 3.5명 앓는 희귀성질환
삼성공장에서만 피해자 3명 나와
생산직 오퍼레이터에 20대 ‘공통점’
17살 입사, 20살에 진단받은 수연씨
삼성 “사용한 화학물질 없음” 주장
영업비밀 이유로 성분 공개도 거부
법원, 지난해 2월 원고 쪽 손들어줘
질병의 원인은 주로 ‘역학연구’에 의해 밝혀진다. 특정 인구집단 내 질병의 빈도, 분포 따위를 다른 인구집단과 비교하는 연구다. 이를테면 흡연과 폐암의 관련성은 흡연 집단과 비흡연 집단 사이의 폐암 발병 빈도를 비교함으로써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연구를 위해서는 충분한 수의 유병자가 필요하다. 통계적 검증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희귀’질환의 경우 연구 자체가 어렵다. 설령 연구를 하더라도 그 결과가 명확하거나 일관되지 못한 경우가 많다.
다발성경화증의 경우 다른 희귀질환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역학 연구가 있었다. 특히 유기용제와 관련하여 꽤 일관되고 명확한 결론이 도출되고 있었다. 그런데 근로복지공단은 그조차 불명확하다고 했다. 그런 논리대로라면 결국 모든 희귀질환은 직업병이 아니게 된다. 그럼 어떤 문제가 발생할까. 희귀질환 피해자들 중에는 평생을 질병과 싸워야 하는 사람들이 많다. 희귀질환은 대부분 ‘완치’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들을 모두 배제하는 것은 곧 산재보험 제도의 도움이 가장 절실한 사람들을 그 제도 밖으로 내쫓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산재보험 제도는 대체 왜 존재하는가.
나는 이 사건에서마저 진다면 모든 희귀질환 사건에서 노동자는 이길 수 없게 된다고 생각했다. 변론 마지막에 이런 말까지 하게 된 것은 그런 절박함 때문이었다.
“이 사건 원고가 지금 법정에서 요구하는 게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질병의 의학적 원인을 규명해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회사에게 민형사상 책임을 묻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산재보험에 따른 치료비·생계비 지원을 요구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 문제를 판단하는 데 도대체 얼마나 명확하고 일관된 연구 결과가 필요한지, 도대체 얼마나 더 죽고 병들어야 하는지, 저는 되묻고 싶습니다.”
반격의 시작
2017년 2월, 수연씨 1심 판결이 나왔다. 나는 판결 내용을 듣고 바로 수연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루 종일 연락을 기다렸을 수연씨는 어두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어쩌면 내가 안 좋은 소식을 전할 거라 미리 짐작하고 배려한 것일지 모른다.
“우리가 이겼어요” “네…” “수연씨, 우리가 이겼다고요” “네?” “우리가 이겼어요”.
수연씨는 그제서야 소리를 질렀다. 수연씨는 나와 동갑이다. 예전에는 농담도 주고받고 그랬는데, 최근에는 병세가 나빠져서인지 웃는 모습을 볼 수 없었고 말투도 무척 건조해졌다. 그런 수연씨가 수화기에 대고 한참 동안 소리를 질렀다. 그토록 듣고 싶었던 환호 소리였다.
법원은 “다발성경화증이 희귀질환인 관계로 원인 규명에 대한 연구에 어려움이 있으나, 유기용제 노출, 20세 이전에 시작된 교대근무 등이 이 병의 직업적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의학적으로 어느 정도 인정된 견해”라고 했다. 아울러 원고의 업무 환경을 지적하며 “고농도의 유해물질에 빈번하게 노출되었을 개연성이 높다”고 했고, 만 17세에 교대근무를 시작한 점과 업무상 과로·스트레스에 시달렸던 점도 질병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았다. 또한 “사업주 측이 작업환경 측정을 하지 않거나 관련 자료를 보관하지 않고 이 사건 소송에서 자료 제출에 적극 협조하지 않았다”는 점, “원고가 사업주로부터 취급 물질의 유해성 등에 대해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고 그 물질에 대한 제대로 된 보호장구도 착용하지 않았다”는 점까지 판결문에 명시했다.
그렇게 반격이 시작되었다.(다음에 계속)
삼성 쪽이 피해자들의 업무 환경과 관련해 근로복지공단 재해조사 과정에서 제출한 문답 형식의 진술서. 임자운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