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이 저를 살려주셨습니다” 부산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에서 309일 동안 고공농성을 벌인 김진숙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부산본부 지도위원(맨 앞)이 10일 오후 10여m 아래에서 지원 농성을 벌이던 노동자들과 함께 크레인 계단을 내려오며 환하게 웃음을 짓고 있다.
부산/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정리해고 철회”
35m 허공에서 사계절이 갔다
외롭고 아득한 나날
벼랑끝서 악마의 손짓도 봤다
몸과 마음이 다 타버릴무렵
희망버스가 밀려왔다
그리고 마침내 한진중 노사 합의
겨울보다 먼저, 김진숙이 내려왔다 마침내 땅을 밟았다. 부산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안 선박크레인의 높이 35m 고공에 올라 “정리해고 철회”를 외친 지 309일째였다. “여러분과 조합원들에 대한 믿음을 한시도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저를 살려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김진숙(51)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부산본부 지도위원은 10일 오후 지상에 발을 내려놓으며 흥분을 억누른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렵사리 마련한 노사 잠정합의안을 노조원과 정리해고자들이 받아들였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였다. 국내 첫 여성 용접공으로 1981년 한진중공업의 전신인 대한조선공사에 입사했던 그는, 지난 1월6일 새벽 85호 선박크레인 출입문 쇠사슬을 끊은 뒤 사다리를 타고 35m 높이 운전석에 올라갔다. 2003년 10월 김주익 전 한진중공업 노조 위원장이 회사 쪽의 소극적인 임금·단체교섭 태도에 항의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바로 그 크레인이었다. 주변 반응은 냉담했다. 노조 집행부와 사전 협의도 없이 단독으로 결행한 그의 행동을 모험주의라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었다. 더러는 그의 무모한 행동이 노사 협상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했다. 농성이 길어지면서 그의 존재는 잊혀져 가는 듯했다. 노사 협상은 줄다리기만 계속했다. 생활고를 견디지 못한 노조원들은 회사가 교육에 참여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고 통보하자 농성을 벌이던 영도조선소를 하나둘 빠져나갔다. 농성자들은 1000여명에서 200~300여명으로 줄었다. 세상과는 휴대전화로 만났다. 회사 쪽이 하루 한 개씩만 올려보내는 배터리가 다하면 이마저도 끊겼다. 칠흑 같은 어둠이 밀려오면 무서움이 엄습했다. 35m 높이 운전석에서 바라본 거리의 자동차와 지나가는 사람들이 유일한 친구였다. 거리의 불빛마저 꺼지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언제 경찰과 용역 경비대가 크레인 문을 부수고 끌어내릴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고립감이 커지면서 극단의 행동 쪽으로 쏠리는 ‘악마의 유혹’도 있었다. 김주익 전 위원장이 129일 동안 홀로 농성을 벌이다 오죽하면 이곳에서 스스로 목을 맸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정리해고를 철회하라는 나의 외침을 부담스러워하는 한진중공업 노조원들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을 때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다. 농성이 100일 넘게 길어지면서, 지난해 1~2월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 계획에 맞서 24일 동안 단식해 약해졌던 위가 더 나빠졌다. 몸도 마음도 지쳐갈 무렵 한줄기 햇살이 비쳤다. ‘희망버스’였다. 트위터로 소통하던 전국 시민들이 1박2일 일정으로 그를 만나려고 영도조선소로 달려온 것을 보면서 용기가 솟았다. 폭우와 경찰의 원천봉쇄를 뚫고 부산역부터 걸어서 4~10시간에 걸쳐 영도조선소에 닿은 희망버스 참가자들을 내려다보면서 나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시 다잡았다. 한달 간격으로 찾아온 희망버스는 타들어가는 속을 촉촉이 적시는 단비와 같았다. 그러면서도 희망버스를 제안한 송경동 시인 등한테 체포영장이 발부되고 거리행진을 하던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경찰에 끌려갔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가슴을 짓눌렀다. 또다시 겨울이 오기 전에 그를 땅에 내려오도록 해야 한다며 달려오는, 얼굴도 모르는 희망버스 참가자들을 멀리서 볼 때면 미안함과 고마움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9월엔 한 통의 전화에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41년 전 아들 전태일 열사를 떠나보낸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씨가 타계했다는 소식이었다. 추모글을 써달라는 <한겨레>의 청탁도 거절했다. 가슴이 너무나 아파서 글을 쓸 수 없다고 했다. 땅에서 들려오는 노사 협상 소식은 애를 태웠다. 9일 노사 잠정합의안이 나왔지만 말을 아꼈다. 장기 파업과 해고로 생활고를 겪는 해고자와 가족들의 뜻을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잠정합의안에 대한 찬반투표를 앞둔 상황에서 자신의 견해가 영향을 줘선 안 된다고 여겼다. 10일 오후 3시20분께 선박크레인 높이 15m 지점에서 106일 동안 함께 농성을 벌였던 정리해고자 박성호(49)씨 등 3명이 내려왔다. 김씨도 땅으로 내려와, 영도조선소 본관 앞에서 열린 시민환영식에 참가했다. 1차 희망버스 때 연행됐다가 풀려난 탤런트 김여진씨, 크레인 아래에서 끼니 등을 올려주던 황아무개씨와 함께 나란히 섰다.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 투쟁!~”이라고 외쳤다. 그는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떠나면서 시민들한테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309일 동안 머문 크레인에서 그를 찾아온 이름 모를 손님들한테 손을 흔들었던 것처럼. 부산/김광수 기자 kskim@hani.co.kr
35m 허공에서 사계절이 갔다
외롭고 아득한 나날
벼랑끝서 악마의 손짓도 봤다
몸과 마음이 다 타버릴무렵
희망버스가 밀려왔다
그리고 마침내 한진중 노사 합의
겨울보다 먼저, 김진숙이 내려왔다 마침내 땅을 밟았다. 부산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안 선박크레인의 높이 35m 고공에 올라 “정리해고 철회”를 외친 지 309일째였다. “여러분과 조합원들에 대한 믿음을 한시도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저를 살려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김진숙(51)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부산본부 지도위원은 10일 오후 지상에 발을 내려놓으며 흥분을 억누른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렵사리 마련한 노사 잠정합의안을 노조원과 정리해고자들이 받아들였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였다. 국내 첫 여성 용접공으로 1981년 한진중공업의 전신인 대한조선공사에 입사했던 그는, 지난 1월6일 새벽 85호 선박크레인 출입문 쇠사슬을 끊은 뒤 사다리를 타고 35m 높이 운전석에 올라갔다. 2003년 10월 김주익 전 한진중공업 노조 위원장이 회사 쪽의 소극적인 임금·단체교섭 태도에 항의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바로 그 크레인이었다. 주변 반응은 냉담했다. 노조 집행부와 사전 협의도 없이 단독으로 결행한 그의 행동을 모험주의라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었다. 더러는 그의 무모한 행동이 노사 협상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했다. 농성이 길어지면서 그의 존재는 잊혀져 가는 듯했다. 노사 협상은 줄다리기만 계속했다. 생활고를 견디지 못한 노조원들은 회사가 교육에 참여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고 통보하자 농성을 벌이던 영도조선소를 하나둘 빠져나갔다. 농성자들은 1000여명에서 200~300여명으로 줄었다. 세상과는 휴대전화로 만났다. 회사 쪽이 하루 한 개씩만 올려보내는 배터리가 다하면 이마저도 끊겼다. 칠흑 같은 어둠이 밀려오면 무서움이 엄습했다. 35m 높이 운전석에서 바라본 거리의 자동차와 지나가는 사람들이 유일한 친구였다. 거리의 불빛마저 꺼지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언제 경찰과 용역 경비대가 크레인 문을 부수고 끌어내릴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고립감이 커지면서 극단의 행동 쪽으로 쏠리는 ‘악마의 유혹’도 있었다. 김주익 전 위원장이 129일 동안 홀로 농성을 벌이다 오죽하면 이곳에서 스스로 목을 맸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정리해고를 철회하라는 나의 외침을 부담스러워하는 한진중공업 노조원들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을 때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다. 농성이 100일 넘게 길어지면서, 지난해 1~2월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 계획에 맞서 24일 동안 단식해 약해졌던 위가 더 나빠졌다. 몸도 마음도 지쳐갈 무렵 한줄기 햇살이 비쳤다. ‘희망버스’였다. 트위터로 소통하던 전국 시민들이 1박2일 일정으로 그를 만나려고 영도조선소로 달려온 것을 보면서 용기가 솟았다. 폭우와 경찰의 원천봉쇄를 뚫고 부산역부터 걸어서 4~10시간에 걸쳐 영도조선소에 닿은 희망버스 참가자들을 내려다보면서 나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시 다잡았다. 한달 간격으로 찾아온 희망버스는 타들어가는 속을 촉촉이 적시는 단비와 같았다. 그러면서도 희망버스를 제안한 송경동 시인 등한테 체포영장이 발부되고 거리행진을 하던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경찰에 끌려갔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가슴을 짓눌렀다. 또다시 겨울이 오기 전에 그를 땅에 내려오도록 해야 한다며 달려오는, 얼굴도 모르는 희망버스 참가자들을 멀리서 볼 때면 미안함과 고마움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9월엔 한 통의 전화에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41년 전 아들 전태일 열사를 떠나보낸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씨가 타계했다는 소식이었다. 추모글을 써달라는 <한겨레>의 청탁도 거절했다. 가슴이 너무나 아파서 글을 쓸 수 없다고 했다. 땅에서 들려오는 노사 협상 소식은 애를 태웠다. 9일 노사 잠정합의안이 나왔지만 말을 아꼈다. 장기 파업과 해고로 생활고를 겪는 해고자와 가족들의 뜻을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잠정합의안에 대한 찬반투표를 앞둔 상황에서 자신의 견해가 영향을 줘선 안 된다고 여겼다. 10일 오후 3시20분께 선박크레인 높이 15m 지점에서 106일 동안 함께 농성을 벌였던 정리해고자 박성호(49)씨 등 3명이 내려왔다. 김씨도 땅으로 내려와, 영도조선소 본관 앞에서 열린 시민환영식에 참가했다. 1차 희망버스 때 연행됐다가 풀려난 탤런트 김여진씨, 크레인 아래에서 끼니 등을 올려주던 황아무개씨와 함께 나란히 섰다.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 투쟁!~”이라고 외쳤다. 그는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떠나면서 시민들한테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309일 동안 머문 크레인에서 그를 찾아온 이름 모를 손님들한테 손을 흔들었던 것처럼. 부산/김광수 기자 k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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