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규 ㅣ 화성노동인권센터 소장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의 ‘희망뚜벅이’ 행진이 수도권에 들어섰다. 암 투병 중인 몸으로 이 먼 고행길에 나선 김 지도위원 곁에 함께 서기 위해, 화성시로 진입하는 2월3일 행진에 참여했다.
이날 행진단은 경기도의 평택시, 오산시, 화성시 등 모두 세 곳 지방자치단체의 경계를 넘었다. 평택시 진위역에서 출발할 때부터 시 경계를 넘을 때마다 어김없이 길을 막아선 것은 수많은 경찰대오였다. 행진을 시작할 때부터 사실 조금 놀랐다. 최근 이렇게 많은 경찰 병력은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마치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판에 박은 듯 똑같은 실랑이가 매번 30분씩 반복되었다. 김 지도위원을 선두로 오직 인도를 이용해 뚜벅뚜벅 걷고 있는 행렬 앞을 막아선 경찰은 확성기를 들고 “다중이 몸자보를 하고 함께 걷는 것은 신고되지 않은 불법집회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 즉각 해산하라. 세 차례의 경고방송 후 공식 채증을 시작하겠다”는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며 수많은 채증 카메라를 들이댔다.
‘행진을 포함한 집회신고를 미리 하지 그랬냐’라는 질문은 첫째, 애초 이 행진은 김 지도위원이 홀로 인도를 통해 걷겠다는 것이었고 함께 걷는 이들은 해당 지역마다 자발적으로 모였다는 점과 둘째, 코로나 방역을 이유로 최소한 수도권 내에서는 집회신고 자체를 아예 접수하지 않았을 것이란 점에서 효력을 잃는다.
‘다중의 몸자보’라 했는데, 최소한 이날 ‘김진숙 복직’을 촉구하는 공통의 몸자보는 없었다. 다양한 이유로 투쟁 중인 노동자들이 많이 참여했으나 이들은 일상복으로 그들의 투쟁구호를 적은 조끼나 몸자보를 착용하고 다닌다. 경찰은 이것마저도 벗으라며 고집을 피웠다.
‘코로나 방역지침 준수’를 내밀기도 했으나, 사회적 거리두기를 유지하며 길게 늘어선 대열이 촘촘하게 뭉쳐진 것은 바로 경찰의 ‘통행방해’ 때뿐이었다. 물론 이 행진 대오는 출발하기 전에 명부를 작성하고 발열 체크도 꼼꼼히 마쳤다.
엄격한 법집행을 강조하는 듯하던 경찰은 마치 시간이나 재고 있던 것처럼 30여분이 지나면 스르르 길을 열었다. 김 지도위원이 다시 앞에 서고 함께 걷는 대오는 수백미터에 이르도록 길게 그 뒤를 따랐다. 공권력이 매섭게 내밀었던 ‘법규’들은 하나도 ‘준수’되지 않았다. 경찰이 채증한 영상에 따라 ‘불법집회’ 참가자로 수사를 받을 것이라 예상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렇다면 대체 경찰은 왜 이 행진을 주기적으로 가로막고 나선 것일까? 마치 영화 속 ‘분노유발자’들처럼, 왜 일부러 이 평화롭고 평범한 시민들의 항의와 욕설과 분노를 촉발시켰던 것일까?
이날 4시간의 길지 않은 행진 중에 무려 세 차례나 경찰 대열과 실랑이하는 것을 보고 문득 들었던 생각은 바로 ‘시민 모욕주기’였다.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보면 대한민국의 경찰은 집회와 시위 모든 현장에서 늘 똑같았다. 확성기를 들고 따박따박 법규를 제시하는 것 같던 그들의 태도는 언제나 ‘시민들에게 모욕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 목적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고 보니, 해방 이후 지난 75년여간 이 나라 공권력의 기본 행태도 마찬가지였다. 경찰뿐 아니라 검찰, 법원, 관공서 등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시대 모든 행정기관이 그대로 존속되어왔던 비참한 역사 속에서, 우리 평범한 시민들을 ‘불령선인’이라 취급하며 적대시했던 못된 버릇은 사라지지 않고 이어졌다.
‘검찰 개혁’이니 ‘경찰 개혁’이니 지금도 온 나라가 시끄럽다. 그러나 이 못된 버릇, ‘시민 모욕주기’를 뿌리부터 뽑아내지 않고서야 그 무슨 소용이겠나. 제도 몇개 바꾼다고 개혁이 시작되어 ‘민중의 지팡이’로 거듭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