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워크레인 조종실에 놓인 컵라면과 커피포트. 타워크레인 기사들은 점심 시간에 추가 근무를 요구받으면, 고공 크레인 조종실에서 점심을 해결한다. 사진 독자 제공
“월례비 받고 그 대신 7일 걸릴 일을 2~3일로 줄이고, 7명이 할 일을 2~3명이 할 수 있게 줄여주는 겁니다.”
인천의 한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7년차 타워크레인 기사 이은규(43)씨는 임금 외에 다른 하청업체로부터 매달 450만원의 ‘월례비’를 받았다. 건설 현장에서 타워크레인 기사들에게 업무를 지시하는 이들은 기사를 고용한 타워크레인 임대업체가 아닌, 종합건설업체(원청)로부터 하청을 받아 여러 공정을 담당하는 전문건설업체(하청) 관계자들이다. 이씨와 근로계약을 맺지도 않은 하청업체가 ‘월례비’를 주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청업체는 월례비를 주는 대신 이씨에게 불법 작업을 요구했다. 벽에 들어갈 철근은 현장 작업자들이 일일이 손으로 세우며 고정하는 게 원칙이지만 하청업체는 이씨에게 크레인을 이용해 다발로 철근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건설기계 안전기준에 관한 규칙’에 따르면 무게와 규격 등 제한이 있지만, 이런 규정은 현장에서 사문화된 지 오래다. “100㎏ 제한인데 무리하게 120㎏도 올리고, 그런 식으로 일하다가 와이어가 터져 크레인이 뒤집힐 뻔한 적도 있습니다.” 이씨는 하청업체들이 이런 방식으로 인력과 공사기간을 줄여 수익을 낸다고 했다.
하지만 이씨는 이번달부터 월례비를 받지 않는다. 윤석열 대통령이 월례비 수수를 대표적인 건설현장 폭력 행위 ‘건폭’으로 규정하고, 월례비를 요구할 경우 타워크레인 기사의 면허를 정지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이씨는 “마음이 편하다. 법대로 안전하게 일할 수 있다”고 말했다.
1일 <한겨레>가 취재한 5명의 타워크레인 기사들은 ‘건폭’에 집중하는 정부와 달리, 그런 관행을 낳은 건설 현장의 구조적 문제를 짚어냈다.
건설 현장은 ‘다단계 하도급’으로 요약된다. 발주자에게서 공사를 따내는 건 종합건설업체(원청)지만, 원청은 직접 시공하지 않는다. 시공은 분야별로 세분화된 전문건설업체(1차 하청업체)가 맡는다. 법은 재하도급을 금지하고 있지만, 현실은 2차·3차 하도급이 비일비재하다. 다단계 하도급이 반복될수록 공사비는 줄고, 업체들은 수익을 남기기 위해 인력과 공사기간을 쥐어짠다.
타워크레인 노동자는 주로 타워크레인 임대 업체와 근로계약을 맺기 때문에, 재하도급 작업으로 내려가는 경우가 많지 않지만 소속 업체가 사용자로서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노동조합이 타워크레인 업체와 단체협상을 해 노동 조건을 결정하는데, 비노조원은 단협 적용에서 배제된다. 28년차 타워크레인 기사 박아무개(48)씨는 “비노조원의 경우 임금이 250만~300만원까지 낮아지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정부가 ‘노조의 강요’로 표현하는 노조의 단체협약마저 없을 경우 노동자 처우는 더 열악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나마 노조 조합원은 한 달에 500여만원 정도를 받지만, 숙련 수준과 노동 기간을 고려하면 충분한 임금은 아니다. 이상암(59)씨는 지난해까지 30년 가까이 타워크레인 기사로 일했지만 월
기본급이 300만원대였다. 각종 수당을 더해야 500만원가량을 받을 수 있었는데, 이를 위해 장시간·위험 노동을 감수해야 했다. 이씨는 “이 돈을 벌기 위해 5분도 쉼 없이 10시간씩 연속으로 100m 상공에서 일하는 날이 대다수였다”고 말했다. 주로 1년짜리 단기계약을 하는 타워크레인 기사들은 한번 일하고 나면 짧으면 5개월, 길게는 10개월까지 일 없이 버텨야 한다. 건설 경기가 안 좋으면 일감은 더욱 줄어든다.
지난 2월 인천의 한 아파트 공사현장에서 타워크레인이 제대로 고정되지 않은 자재를 옮기고 있다. 규격이 다른 일부 자재는 위에 얹혀진 상태다. 사진 독자 제공.
현장의 지시를 받아 무리한 공사를 하면서도 타워크레인 기사들은 누구나 “죽거나 죽일 수 있다”는 두려움을 안고 산다. 염태일(37)씨는 지난해 8월 비가 내리던 날 타워크레인 조종실로 올라가다 50m 높이에서 추락해 숨진 타워크레인 기사의 죽음을 잊을 수 없다. 염씨도 날마다 23층 높이의 사다리를 오른다. 염씨는 “비나 눈이 오면, 생계를 위해 올라야 하는 사다리가 목숨을 위협하는 무기 같다”고 했다.
공사기간 단축을 위해 타워크레인 기사들은 안개가 자욱한 날에도 신호수의 무전에만 의지해 자재를 들어올린다. 이영훈(34)씨는 “기사들은 내 목숨뿐 아니라 남의 목숨도 앗아갈 수 있다는 두려움에 떤다”며 “지난해 현장에서 추락 사고로 사망자를 낸 동료가 있다. 안전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환경 속에서 기사들은 늘 트라우마에 시달린다”고 했다. 지난해 산재사고 사망자 중 53%(341명)가 건설노동자였다.
이런 이유로 타워크레인 기사들은 ‘건폭’이라는 무참한 단어로 시작된 지금이 “기회”라고 말한다. 이은규씨는 “근본적으로 다단계 하도급 구조 자체를 바꿔서 이익을 위한 무리한 공사기간 단축을 없애야 한다”며 “구조적 부조리를 그대로 두면, 무리한 공사를 요구하며 건네는 ‘제2·3의 월례비’는 또 등장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장현은 기자
mix@hani.co.kr 방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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