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혁(가명·33)씨는 29살이었던 2018년 7월3일 다리 건설 공사 현장에서 일을 하다 5m 높이에서 떨어진 2톤 무게의 스크루에 맞아 하반신이 마비되었다. 일러스트 김대중
일터에서 죽음을 가까스로 피했지만 노동력을 100% 잃은 중장해 1~3급은 1만1533명(2022년 4월 기준)이다. 이 중 20~30대 청년은 187명(1.6%)으로 2018년 12월 충남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숨진 스물네살의 김용균처럼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무리하게 일하다가 다쳤다. 청년 산업재해는 오랫동안 살아가야 할 피해자에게도, 그들을 돌봐야 하는 가족에게도 크나큰 고통이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는 산재의 경영자 책임을 줄이는 방향으로 중대재해처벌법 시행령을 개정하겠다고 나섰다. <한겨레>가 ‘살아남은 김용균’ 187명을 기록하며 ‘일터에서 죽지 않고 다치지 않을 권리’를 다시 말하는 이유다. <한겨레>는 네 차례에 걸쳐 살아남은 김용균들의 목소리를 전한다. 그 두번째는 케이티 자회사 노동자로 일하다 감전 당해 두 팔을 잃은 세 아이의 아빠에 대한 이야기다.
187명의 사고 경위를 담은 별도의 인터랙티브 페이지도 만들었다.
양말에 자꾸 물이 묻어나왔다. 무슨 일인가 해서 양말을 벗었더니, 복사뼈 뒤가 붉게 익어 있었다.
“욕조에서 샤워를 하다가 물을 틀어놓고 양치를 했어요. 그러다가 물에 손을 가져다 대보니까 엄청 뜨겁더라고요. 그래서 샤워기를 껐는데 그사이 화상을 입었나 봐요.” 물집이 잡히는 화상을 입을 정도로 물은 뜨거웠지만, 김준혁(가명·33)씨는 발뒤꿈치의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건설 현장에서 떨어져 구른 2톤 무게의 스크루에 맞아 하반신이 마비됐기 때문이다.
준혁씨는 항타 일을 했다. 건축이나 토목 공사 등에서 구조물의 기초를 튼튼하게 하기 위해 암반까지 쇠말뚝을 박는 작업이었다. 준혁씨가 단단히 박아둔 쇠말뚝 위로 아파트도 섰고 다리도 이어졌고 케이블카도 오갔다. 2015년 친구 아버지 회사에서 항타 일을 시작한 준혁씨는 ㅅ건설로 옮겨 장비보조원이 됐다. 자격증이 있는 친구는 같은 회사에서 항타기 크레인 기사로 근무하는 중이었다.
2018년 7월3일, 준혁씨는 빙빙 돌아다녀야 했던 마을버스가 하천을 건널 수 있게 작은 다리를 만드는 공사 현장에 참여했다. 전체 공사비 10억원 남짓한 소규모 현장이었다. 2~3일 만에 끝나야 하는 작업이었지만,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았다. 항타기 크레인은 최대한 많은 현장에 투입해야 돈을 벌 수 있다. 더구나 다음 일정을 미리 잡아둔 터라 사장은 속이 탔다고 한다. 회사는 준혁씨를 재촉했다.
그날, 수도권은 장마였다. 6월26일부터 시작된 장마로 경기 이천에는 계속 비가 내렸다. 강수량은 1일 81.8㎜, 2일 40.7㎜. 공사장은 진창이었다. 이날도 부슬비가 내렸지만, 공사를 강행했다. 땅이 질척여 속도가 나지 않았다. 땅부터 고르게 펴야 진도를 뺄 수 있었다. “아침 7시쯤이었을 거예요. 바닥이 워낙 질척거리니까 포클레인이 땅을 ‘나라시’(평평하게 만드는 작업의 건설업계 은어)해줘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포클레인을 꺼내려면 일단 앞에 쌓여 있는 자재를 치워야 했죠. 크레인을 운전하던 친구가 2t짜리 스크루를 5m 정도 들어올렸어요. 근데 (유압식 조절 레버인) 안전장치가 풀려 있었죠. 그걸 모르고 조작을 하다가 (스크루가) 떨어진 거예요. 스크루가 그 밑에 있던 철판에 부딪혀 한번 튀어오른 다음에 제 오른쪽을 덮쳤어요.” 친구는 안전장치를 항상 채워놔 크레인과 체결된 중량물(작업자가 현장에서 취급하는 물건)이 떨어지지 않도록 작업해왔는데, 사고 전날 다른 작업자가 크레인을 몰면서 안전장치를 풀어놨던 것이다. 크레인에 탄 뒤 이를 체크하지 않아 사고가 발생했다.
스크루에 맞아 쓰러진 준혁씨는 너무 추웠다. 눈이 스르르 감겼다. 정신을 잃은 사이 준혁씨는 응급차에 실려 가다가 헬기로 옮겨졌다. 준혁씨는 친구가 “자면 안 돼”라며 뺨을 때리던 장면 정도만 생각난다고 했다.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 몇번 심정지가 왔고 피를 16리터나 흘렸다. 사고 한달 뒤인 8월6일 그의 진단서에는 “환자는 의식이 없는 상태로 중환자실에서 각종 생명유지장치를 포함한 집중치료를 시행하였으며, 현시점에서 환자의 상태는 극히 가변적이고 생존하더라도 장애의 가능성이 매우 높은 위험한 상태임”이라고 적혔다. 여러차례 수술 끝에 준혁씨는 살아남았다. 하지만 대퇴부를 심하게 다쳐 하반신 마비 판정을 받았다.
사고로 인생이 바뀐 것은 준혁씨만이 아니었다. 사고가 있던 날은 누나의 생일이었다. 공장에서 사무직으로 일하던 누나는 야간근무를 마치고 새벽 집에 가는 길에 준혁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누나 생일인 건 아냐?”로 시작한 통화는 “어제 비가 많이 왔더라. 조심해”로 끝났다. 며칠 전 공사 현장에서 물을 잔뜩 먹은 흙이 덩이째 준혁씨 옆 바닥으로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누나는 불안한 마음을 그렇게 달랬다. 집으로 돌아와 잠든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침 9시께 전화가 걸려왔다. 준혁씨가 다쳐서 병원으로 옮겨졌는데 보호자가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장난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함께 살던 고모, 고모부와 함께 택시를 잡아타고 준혁씨가 이송된 경기 수원의 한 병원으로 향했다. “아침 10시 반쯤에 병원에 도착했는데 응급처치 때문에 준혁이를 만날 수 없었어요. 낮 12시쯤 응급실에서 준혁이 보호자를 찾더라고요. 옷을 모아서 담아 줬는데 작업복이 피로 범벅이 된 채 찢어져 있는 거예요. 조금 있다가 뭐가 칭칭 감겨 있고 이것저것 달려 있는 준혁이를 볼 수 있었어요.”
준혁이 앞에 있던 의사는 누나에게 말했다. “척추가 절단됐고 사람 몸 중에 제일 큰 뼈가 허벅지뼈인데 그쪽도 절단됐습니다. 지금 수술을 할 건데 그건 그냥 형태 유지를 위해서예요. 하반신은 못 쓰고 그 이상의 상황도 준비하셔야 합니다.” 의사의 말투는 건조했다. 그 말을 들은 누나는 주저앉았다.
다행히 수술은 잘 끝났다. 남매는 부모와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낸 지 오래됐다. 간병은 누나의 몫이 됐다. 욕창을 막기 위해선 몸을 돌려줘야 했지만, 동생은 온몸이 부서진 터라 쉽게 손댈 수 없었다. 곳곳에 고름이 생겨 살을 파고들었다. 시술이 잘못돼 한 대야씩 피를 흘린 적도 있었다. 그렇게 남매는 수원의 병원에서 50일이 넘는 악전고투를 벌였다. 그리고 경기도 안산에 있는 산재전문병원으로 이동했다. 재활 등을 위해 이후에도 병원을 몇차례 옮겨야 했다.
2톤 무게의 스크루에 맞아 하반신 마비 판정을 받은 준혁씨는 다치기 전까지 야구를 즐겨 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글러브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지만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김준혁씨 제공
동생이 다친 뒤로 누나의 인생이 바뀌었다. “준혁이가 다쳤을 때가 이직한 지 한달밖에 안 됐을 때였거든요. 퇴근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울면서 전화해가지고 그만두겠다고 하니까 회사가 당황해하는 거예요. 거짓말하는 줄 알아서 제가 ‘동생 목숨 가지고 거짓말을 하겠냐’며 한참을 울었어요.” 누나는 오래전 교통사고를 당한 뒤 장롱에 넣어둔 운전면허증을 꺼냈다. 서울과 경기를 오가며 병원과 병원, 그리고 집을 “거의 울면서” 운전했다. 동생을 돌보기 위해 요양보호사 자격증도 땄다.
동생과 밥을 먹으러 갈 식당을 정할 때면 지도 애플리케이션의 로드뷰를 먼저 본다. “휠체어가 올라갈 수 있는 곳인지 꼭 확인을 해야 해요. 부슬비 내리는 날 한번 어떤 식당을 가려다가 경사로가 가팔라서 같이 넘어졌거든요. 동생은 이제 팔로만 생활해야 하는데, 팔까지 다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오랜 간병을 이기는 장사는 없다. 온갖 병원을 옮겨다니던 누나도 간병하다 싸우는 가족들을 숱하게 목격했다. 준혁씨의 뾰족한 말에 누나도 상처를 받는다. 그렇게 티격태격하지만, 이제 하늘 아래 둘뿐인 남매다. “결국 준혁이 옆에 있게 되는 건 저겠죠. 이미 마음을 먹었어요.”
두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사고에는 징후가 있었다. 돌이켜보면 사고가 나지 않는 것이 이상한 환경이었다. “사고가 나는 현장은 누가 봐도 사고가 날 것 같아요. 일단 원청에서 현장에 나오지 않았어요. 안전을 준수하는지 지켜보지도 않으니, 저희는 무조건 빨리하려고 하는 거죠. 손가락 잘린 사람은 진짜 많고, 머리가 잘린 사람도 있었어요. 현장이 험해서 젊은 사람들이 살아남기 힘들어요.”
준혁씨는 ㅅ건설에서 일을 시작한 지 한두달 정도 만에 손이 잘릴 뻔했다고 한다. 포클레인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 작업 속도가 느려지자 준혁씨가 나섰다가 철제에 손이 찍혔다. 시작이 좋지 않았다. 건설업은 산재 신청에 예민하다. 일이 바빴던 준혁씨는 개인 보험 처리만 한 뒤 손이 불편한 채 출근했다. 스크루가 덮친 날도 장비 점검 등 제대로 된 안전조처 없이 작업을 강행하다 사고가 난 것이다. ㅅ건설 사장은 업무상 과실치상 및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혐의로, 항타기 크레인을 운전했던 친구는 업무상과실치상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2020년 10월 1심에서 각각 징역 6개월과 금고 6개월을 선고받았다. 준혁씨와 합의가 이뤄진 뒤인 2021년 7월 항소심에서는 같은 형량에 2년의 집행유예가 선고돼 두 사람은 감옥행을 면했다.
2021년 10월7일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된 두 사람의 집행유예 기간은 곧 끝난다. 하지만 남매의 ‘희망’은 형기가 없는 감옥에 갇혔다. 누나는 눈물만 늘었다. “1년 전까지만 해도 의사 선생님이랑 상담할 때마다 펑펑 울었어요. 의사 선생님과 눈을 마주칠 때부터 눈물이 나는 거예요. 어떻게 더 좋은 소식이 없을까 기대를 하고 들어가는데, 결국에는 몸 상태가 더 나아지기 어렵다는 말만 들으니까….”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누나는 새로운 직장을 잡았다. 친구들과 어울리기 좋아하고 운동을 잘하던 준혁씨는 역도를 시작했다. 남매는 안간힘을 다해 무거운 삶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 더 많은 기사를 담은 인터랙티브 페이지는 여기서 보실 수 있습니다 : https://bit.ly/3AIbWzo
■ 건설업이 산재사망 최다…“영세할수록 더 잦아”
건설업은 산업재해 사망 사고가 가장 많이 일어나는 업종이다. 17일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2021년 산업재해 현황’을 보면 지난해 산재로 사망한 2080명(사고 828, 질병 1252명) 가운데 26.5%인 551명이 건설업에서 사고를 당했다. 건설업 산재 사망자 551명(사고 417명, 질병 134명) 중 42%인 231명이 5인 미만 사업장에서 숨졌다. 특히 건설현장에서 사고로 사망한 417명 중 298명(71.5%)은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적용이 유예된 공사금액 50억원 미만(2024년 1월부터 적용)의 사업장에서 산재를 당했다. 2018년 7월3일 다리 공사 현장에서 일하다 2톤 무게의 스크루에 부딪혀 하반신 마비가 된 김준혁(가명·33)씨가 일한 ㅅ건설 역시 직원이 10명 남짓한 영세한 회사였으며 당시 공사 규모는 10억원 남짓이었다. 건설업체가 영세할수록 산재 사고가 많은데 처벌은 비껴가는 구조인 셈이다.
노동부가 올해 1~2월 2941곳의 건설현장을 안전점검한 결과 58.4%인 1718곳에서 3962건의 3대 안전조치(추락 방지, 끼임 방지, 보호구 지급) 위반 사항이 적발됐다. 3962건 중 1952건(49.3%)은 추락사고를 예방하는 가장 기본적인 시설물인 안전난간 미설치였다. 개인 보호구 미지급은 904건(22.8%), 작업 발판 미설치는 540건(13.6%) 지적됐다. 영세할수록 위험하다는 사실은 노동부 점검에서도 거듭 확인됐다. 공사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는 64.4%(2131곳 중 1373곳)가 노동부 지적을 받은 반면 50억 이상은 42.6%(810곳 중 345곳)에서 위반 사례가 적발됐다.
20%포인트 넘는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큰 공사현장에서는 산재를 막기 위한 여러 조처가 시행되지만 영세 건설업체가 주로 참여하는 중소규모 사업장은 감시의 사각지대에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원청의 압박이나 여력 부족 등으로 안전보다 공사기간 단축, 비용 절감 등을 중요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실제 사업장 안전을 담당하는 안전관리자 배치 의무 역시 현재는 80억원 이상 규모(2022년 7월 이후 60억원 이상, 2023년 7월 이후 50억원 이상)의 공사현장에만 적용되고 있다. 노동부는 중소규모 건설 사업장을 대상으로 한 안전점검을 집중 실시하고 안전보건공단은 공사금액 50억원 미만 소규모 건설현장에 추락방지용 안전시설 임차나 구입 비용을 보조하는 정책 등을 펼치지만 아직 그 효과는 미지수다.
정환봉 김가윤 기자
김가윤 기자
gayo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