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당사자이자 동료 상담가인 유진우씨가 19일 서울 동숭로 노들장애인 자립생활 센터에서 밝게 웃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제가 하는 일은 이윤 창출 노동은 아니지만 ‘권리를 창출하는 노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노들센터) 소속 동료 상담가인 유진우(27) 활동가는 장애인의 날을 하루 앞둔 19일 <한겨레>와 만나 자신의 일을 이렇게 소개했다. 뇌병변 장애가 있는 유 활동가는 같은 유형의 장애를 가진 동료 장애인을 만나 그간 좌절됐던 일상 속 욕구를 찾고 그것을 함께 해소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장애인 권리 옹호 활동을 하며 월급을 받는, 흔치 않은 일자리다. 자신이 하는 일을 “빼앗긴 권리를 창출하는 노동”이라고 부르는 유 활동가를 <한겨레>가 서울 종로 노들센터에서 만났다.
유 활동가는 지난해 4월부터 1년 간 4명을 맡아 한 사람당 최대 30회에 달하는 상담을 진행했다. 지난해 겨울엔 동료 장애인 ㄱ씨가 연극을 보고 싶다고 하자 직접 서울 시내 극장에 전화를 걸어 엘리베이터가 있는지, 극장 안에 휠체어가 들어갈 공간이 되는지 확인하기도 했다. 비장애인이 연극을 관람하는 덴 아무런 장벽이 없지만 장애인이 연극을 보려면 자신이 갈 수 있는 극장부터 알아봐야 했다. 유 활동가는 “이렇게 전화를 다 해 봐야 하는 것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언어장애 등으로 전화를 못 하는 사람은 평생 연극을 못 보는 건가, 답답했다”고 말했다.
마침내 한 극장을 골라 연극을 보고 나왔을 때 동료는 ‘평생 못 볼 줄 알았다’며 고마워했다. “저도 휠체어 때문에 연극을 거의 못 봤는데 같이 봐서 좋았고 동료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까 보람 있더라고요.” 유 활동가가 말했다. 그는 이외에도 홀로 자립해 저녁시간을 무료하게 보내는 장애인 동료에게 유튜브 시청 방법을 알려주거나, 휠체어를 못 탔던 동료에게 타는 법을 알려주고 함께 연습하기는 일 등을 한다.
매순간 보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센터를 찾아온 장애인 ㄴ씨는 과거에 지하철을 탔다가 승강장 틈새에 휠체어 바퀴가 끼는 경험을 한 뒤로 지하철 타기를 꺼렸다. 홀로 살면서 긴급 상황에 대비하려면 대중교통을 이용할 줄 알아야 하는데 두려움 많은 ㄴ씨를 유 활동가가 매번 설득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지하철 타자’고 연락을 했는데 두 달 넘어가니 좀 힘들더라고요. 그래도 그 분이 혼자서 보다 수월하게 생활할 수 있게끔 하는 게 제 역할이라 생각해서 꾸준히 연락했고, 타는 연습도 여러 번 하게 됐어요.”
지난 1년의 동료상담은 유 활동가에게 생계노동만이 아니라 진짜 ‘동료’를 얻는 과정이기도 했다. “장애 차별이 개인 문제가 아니고 사회 문제인데 이걸 모르는 분들이 많아요. 당신 잘못이 아니라는 거, 그리고 장애 자체도 객관적 진실이 아니라 나라마다, 시대마다 기준이 다 다른 주관적 의견이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어요. 무엇보다 같은 장애인끼리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국내 장애인 운동 단체는 유 활동가처럼 장애인 권리 옹호와 장애 인식 제고 노동을 장애인이 직접 수행하는 것을 ‘권리 중심 일자리’라고 정의한다. 비장애인의 신체와 정신에 맞추는 노동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의 권리 옹호 활동과 장애 인식 개선 활동, 공연·예술 활동 등을 노동으로 인정하고 정부가 임금을 지불하는 일자리다. 국내 장애인권단체가 유엔(UN)장애인권리협약의 노동권과 평등권에 기반해 오랫동안 권리 중심 일자리를 요구한 결과 지난 2020년 서울시 사업을 시작으로 일부 지방자치단체가 시범사업을 시작했다.
장애인 당사자이자 동료 상담가인 유진우씨가 19일 서울 동숭로 노들장애인 자립생활 센터에서 다른 활동가와 대화하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사회의 장애 차별이 개인 탓이 아니다’라는 깨달음은 유 활동가가 직접 겪은 것이기도 하다. 그 역시 고등학생 때까지는 각종 차별이 다 본인이 장애인인 탓이라고 생각했다. 유 활동가는 “친구들과 맘껏 놀 수 없고 학교에서 자주 소외된 느낌이 들었는데 장애 차별이라고 인지하진 못했다”며 “고등학교 선생님이 저에게 특수학급을 추천하면서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함께 수업을 들으면 분위기를 흐리고 비장애인 학생에게 방해가 된다’고 설명했는데 그 때도 그냥 ‘맞나보다’ 했다”고 말했다.
그랬던 그도 대학에 들어와선 장애인을 사회 밖으로 밀어내려는 구조적 차별을 본격적으로 인식했다. 엘리베이터가 없다며 입사를 거부하는 기숙사며 카드를 찍어야만 열리는 출입문 등 주변 환경이 계속해서 그를 막았다. 한 번은 대학 체육대회가 열리는 운동장에 가려고 했더니, 학교가 1층 문을 잠궈두고 계단과 연결된 조회대 문만 열어둔 적도 있었다. 유 활동가가 학교 쪽에 항의했으나 문을 여는 덴 꼬박 1시간이 걸렸다. “문 너머로 학생들이 응원하고 재밌게 노는 소리가 들리는데 전 그냥 문 앞에 서서 들어가기만 기다렸어요. 똑같이 학생회비 냈는데 권리를 침해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이듬해인 2018년 학교 총동아리연합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직접 체육대회를 준비했다. 운동장으로 통하는 1층 문을 열어두는 것은 물론,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즐기는 체육 종목을 만들겠다며 수십키로미터 떨어진 ‘론볼’ 경기장을 방문해 규칙을 배우고 도구도 빌려왔다. 체육대회 당일, 생소한 종목인데도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가 손뼉 치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봤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하는 경험을 제 손으로 만들어 본” 첫 경험이었다.
그러나 끝내 좌절했던 기억도 있다. 10살 때부터 꿈꿨던 신학을 지난해 그만둬야 했던 일이다. 유씨는 목사가 되면 장애인 예배를 따로 만들지 않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드리는 예배를 만들겠다는 꿈을 키워 왔다. 민중신학과 여성신학, 퀴어신학 등을 공부하며 사회 구조에 맞서는 소수자의 세계도 폭넓게 경험했다. 그러나 학교 필수 과정인 목회 실습을 받아주는 교회가 없었다. 20여군데 이력서를 넣었지만 장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면접도 볼 수 없었다. 그는 자퇴서를 내고 고향에 내려갔지만 꿈이 없어졌다는 상실감에 두 달 간 거의 잠도 자지 못 했다. 그런 그에게 ‘장판’(장애인 운동판)이 찾아왔다.
“원래는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위계가 심하다고 들어서 ‘버틸 수 있을까’ 내심 고민했어요. 그런데 예전에 알고 지내던 장애 인권 활동가가 페이스북 메시지로 연락을 해 왔어요.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 받다가 ‘장판 같이 해보자’는 제의를 했어요. 예전부터 장애인 권리 옹호 활동에 관심도 있었고 마침 학교도 그만둔 참이라 ‘한 번 해 볼까’ 싶었습니다.”
직접 몸 담아 본 장판은 교회보다 넓었다. “교회가 장애인을 도움의 대상으로 바라본다면 장판은 장애인 한 명 한 명의 장점을 살려 무엇이든 해 보려고” 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장애를 숨기지 않아도 된다’는 게 안심이 됐다. “제가 경직이 있어서 친구들이랑 카페 갔다가 갑자기 컵을 엎지른다든지 할 때가 있어요. 그럼 어쩔 수 없이 주변 눈치를 보거든요. 그런데 장판에선 다들 ‘그런가보다’ 하더라고요. 그게 편했어요.” 유 활동가가 말했다.
유 활동가는 장판 활동을 하며 구직시장 내 차별이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도 새삼 실감했다. 그는 “장애인고용의무제가 있긴 하지만 그 비율은 전체의 3% 수준(적용 대상 사업장 전체 직원 가운데 장애인 비중)에 불과하다”며 “장애인고용의무사업장에 가지 못하는 이들은 어디서 일하겠느냐, 결국은 보호 작업장(일반 작업환경에서 일하기 어려운 장애인에게 직업훈련을 겸해 노동을 시키는 사업장) 가서 한 달에 37만원 받고 일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현행 최저임금법상 ‘정신장애나 신체장애로 근로능력이 현저히 낮은 사람’은 최저임금을 적용 받지 않는다.
유 활동가는 “장애인도 의사나 뮤지션이 될 수 있는데 지금은 장애인의 직업 선택 자유가 거의 없다시피하고 단순 업무에 치중돼 있다”고 덧붙였다. 그도 지난해 8월부터 4개월 간 장애인고용의무사업장인 온라인종합쇼핑몰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 회사가 필요로 하는 정보를 긁어다 엑셀 시트에 옮겨담는, 지극히 단순하고 또 지루한 업무였다.
비장애인 신체와 정신을 기준으로 정해지는 지금 노동의 의미를 확장할 수 있을까. 유 활동가는 이윤을 창출하는 자본주의 노동을 넘어설 것을 제안한다. “제가 하는 동료상담이나 집회 참석도 다 노동입니다. 한국 사회는 자본을 증식시키는 노동만 이야기하지만 권리를 생산하는 노동도 있습니다. 저는 장애인들의 빼앗긴 권리를 되찾는 노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유 활동가가 말했다.
중증 장애인의 일자리 요구는 단순한 고용 개선에 그치지 않고 ‘장애인이 시설 밖으로 나와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를 요구한다. 장애인 몫의 노동을 따로 정해두지 않고 장애인의 다양한 권리 옹호 활동을 노동으로 인정하고 예산을 들여 일자리를 마련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회는 현상 유지를 원하겠지요. 하지만 장애인을 한 곳에 묶어두는 ‘시설’은 더는 유효하지 않습니다. 탈시설의 흐름 속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사는 사회를 동료들과 같이 만들고 싶습니다.”
신다은 기자
down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