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한번도 안 쉬고 달려왔어요. 24시간이 모자랐는데, 이제 잠깐 쉬어가라고 몸이 보낸 신호 같아요.”
지난 17일 서울 고대의료원 구로병원 병실에서 <한겨레>와 만난 유지현(50) 보건의료노조위원장은 불과 사흘 전 수술을 받은 환자로 보이지 않을 만큼 씩씩하고 밝았다. 앞서 지난 6월초 난소암 3기 판정을 받고 9시간에 걸친 대수술을 받았고, 14일엔 주변 장기를 복원하는 수술을 받았다. 두 차례 수술 모두 성공적이라지만 다섯달 새 머리카락이 다 빠질 만큼 힘겨운 항암치료를 받고 있다. 한동안 충분한 치료와 휴식이 필요한 상태다. 두번째 위원장직의 임기 만료까지 50일을 채 남기지 않은 그의 최대 관심사는 여전히 의료 공공성 확대와 보건의료 노동자의 권익개선이다. 그의 위원장 임기(2012~2017년)는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과 겹친다.
“임기 중 세 가지 과제가 있었어요. 의료 민영화 저지와 의료인력 확충 그리고 의료전달 체계의 개선이 그것이죠. 의료는 영리사업이 아니라 공공서비스인데 이명박 정부가 임기 마지막 해(2012년)에 제1호 영리병원의 삽을 뜨겠다고 해서 투쟁으로 막았죠. 의료 서비스 향상을 위해 의료인력 확충과 정규직화 등 국가 관리의 필요성에도 공감대가 커졌죠. 또 제대로 된 의료체계 구축도 중요합니다. 진주병원 사례에서 보듯 공공병원을 적자를 이유로 폐업하면서 2015년 메르스 사태가 커졌잖아요. ‘메르스의 숙주는 낙타가 아니라 한국 의료체계였다’는 걸 보여주었지요.”
2012년부터 연임해 6년째 이끌어
‘9시간 암수술’ 뒤 항암치료중
수술 전날 마석묘역 시상식 참석
“그동안 한번도 안 쉬고 달려와
회복되면 ‘인도 여행’ 하고싶어”
그는 “병원 현장 노동자의 어려움을 개선하기 위해선 근무 조건과 조직문화가 바뀌어야 한다”고도 말했다. 최근 성심병원이 간호사를 상대로 장기자랑에서 선정적 춤을 강요한 ‘갑질’과 관련해선 “예전엔 이런 일이 병원들에서 흔했지만 노조가 생긴 뒤론 사라졌는데, (전국에 5곳이 있는) 성심병원은 노조가 없거나 ‘페이퍼 노조’(유령 노조)라서 그런 일이 생겼다”며, 환자·노동·직원이 존중받는 ‘3대 존중병원’을 강조했다.
유 위원장과의 인터뷰가 한창 이어지던 중, 김영주 고용노동부 장관이 깜짝 병문안을 오면서 병실 분위기가 뜨거워졌다. 김 장관은 유 위원장의 손을 꼭 잡으며 “어서 쾌유하시라”고 빌었고, 유 위원장은 “제가 워낙 긍정적이라서요”라며 활짝 웃었다. 유 위원장은 김 장관에게 “제가 마지막으로 해결해야 할 숙제가 하나 있다”며 말을 꺼내자 김 장관은 “또 숙제를 주시려고요?”라며 놀라는 시늉을 해, 병실이 웃음으로 가득 차기도 했다. 유 위원장이 “을지병원 파업 장기화와 성심병원 갑질 등 현안에 정부가 관심을 가져달라”고 요청하자 김 장관은 “근로감독을 철저히 하고 노사교섭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유지현 보건의료노조 위원장(오른쪽)이 지난 17일 오후 입원 중인 고려대의료원 구로병원 병실에서 병문안을 온 김영주 고용노동부 장관과 두 손을 꼭 잡고 활짝 웃고 있다. 고용노동부 제공
보건의료노조는 1998년 국내 최초로 기업별 노조에서 산업별노조로 출범해 노조운동과 연대의 수준을 한 차원 끌어올렸다는 평을 받는다. 유 위원장의 삶 대부분은 보건의료노조운동의 역사와 겹친다. 1990년 모교 병원인 고대의료원에 간호사로 입사해, 1996~97년 고대의료원 노조위원장을 지낸 뒤 잠시 간호현장에 복귀했다. 1998년 보건의료노조가 산별노조로 전환하면서 그는 상급단체 전임 활동가로 파견돼 서울지역본부장(2003~2008년), 사무처장(2011년)을 거쳐 2012년부터 6년째 보건의료노조 위원장(임기 3년)을 연임하면서 조직을 이끌고 있다.
김영주 고용노동부 장관(앞줄 가운데)이 지난 17일 고려대의료원 구로병원에서 암 치료를 받고 있는 유지현 보건의료노조 위원장(앞줄 오른쪽)의 병실을 찾아 다른 위문객들과 함께 쾌유를 빌며 손가락 하트를 만들어 보이고 있다. 박민숙 보건의료노조 부위원장(맨 왼쪽)과 이주호 정책연구원장(뒷줄 왼쪽 세번째) 등이 자리를 함께 했다. 고용노동부 제공
두번째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날인 13일, 유 위원장은 담당 의사에게 몇 시간의 외출을 요청해 허락받았다. 1970년 “근로기준법을 지키라”고 외치며 분신한 청년 전태일 47주기를 맞아, 전태일재단이 보건의료노조를 제25회 ‘전태일 노동상’ 수상자로 선정했기 때문이다. 이날 유 위원장은 병실이 아닌 경기 마석 모란공원의 전태일 열사 묘역에서 5만5천명의 보건의료 조합원들을 대표해 상을 받았다.
전태일재단은 “의료공공성을 강화하고 국민의 건강권을 실현하기 위한 (보건의료노조의) 투쟁과 사회적 연대는 청년 전태일이 추구했던 인간사랑 정신이고, 노동운동의 가능성을 만든 자랑스러운 역사”라고 평가했다. 보건의료노조는 올해 산별교섭을 통해 95개 의료기관에서 신규 인력 2227명 충원과 비정규직 1만999명의 정규직 전환에 합의했다.
유 위원장은 앞으로 몸을 추스르면 “그동안 하고 싶었지만 못하고 미뤄뒀던 것들을 꼭 해보고 싶다”며 마음속에만 담아뒀던 희망을 하나둘 꺼내놨다. “책읽기, 카페에서 ‘멍 때리기’, 바다 구경, 인도 여행….” 모두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느린 삶’이다.
글 사진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