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전 대통령이 2008년 8월15일 오전 경복궁에서 열린 제63주년 광복절 및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경축행사에 참석해 경축사를 하고 있다. 이날 이 전 대통령은 새로운 국가전략으로 ‘저탄소 녹색성장’을 선포했다. 연합뉴스
대학을 다니며 환경 문제에 관심이 늘었다. 그때가 이명박 정부였다. 2008년 광복절, 연분홍색 두루마기를 입은 이 전 대통령이 새로운 국가전략으로 ‘저탄소 녹색성장’을 말했던 순간의 감정은 기억에 오래 남았다. 일종의 패배감 같은 것이었다. 철학과 가치보다 실용과 돈을 앞세운 정부가 녹색의 숨은 가치를 먼저 길어올렸다니…. 주변의 환경운동가와 전문가들은 자주 분노하고 종종 좌절했다.
물론 이명박 정부가 녹색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봤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발 빠르게 국제사회의 변화를 포착하고 수용한 것으로 봐야 했다. 2007년 가을 앨 고어 미국 전 부통령이 기후변화 방지 전도사로 노벨평화상을 받고, 이듬해 주요 8개국(G8) 정상회의 등에서는 각국 녹색성장 전략 마련이 화두였다.
녹색성장은 이명박 정부의 ‘만능키’였다. 물 확보, 지역경제 살리기 등을 앞세웠지만 실상은 건설경기 활성화로 경기부양을 해보려던 4대강 사업을 녹색성장의 핵심 사업으로 내세웠다. 한국 역사 최초로 정부가 온실가스 저감 기술 개발을 추진한다는 미래 이미지도 선점했고 ‘저탄소 녹색성장 기본법’을 제정했다.
결과는 실패였다. 4대강 사업은 폐기 수순을 밟고 있다. 2010년 국가 온실가스 배출량은 전년보다 10% 이상 뛰어올라 6억5천만톤을 넘겼고 상승세가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이 전 대통령이 자금횡령과 뇌물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고 구속 수감되면서 녹색성장의 생명력도 다한 줄 알았다.
이명박 정부가 오염시켜 한국에서는 사장되어버린 녹색성장 개념이 문재인 정부 들어 다시 주목받았다. 평행이론처럼 10여년 전과 상황이 유사했다. 전세계가 코로나19 극복과 기후위기 대응, 경제성장이라는 여러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녹색의 가치에 다시 집중하고 있다. 지난해 문 대통령은 유럽의 그린딜을 벤치마킹한 그린뉴딜 정책을 발표했고,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이루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2050 탄소중립을 명문화하는 법 제정 절차를 밟아왔다.
지난 10개월 동안의 논의가 다음주 국회에서 일단락될 예정이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여당 의원들은 19일 새벽 전체회의에서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 녹색성장법’을 단독 처리했다. 여당 의원들만으로도 법 제정이 가능하기 때문에 여당은 25일 열리는 본회의에서 가급적 이 법을 통과시킨다는 계획이다. 이 경우 한국은 탄소중립을 법제화한 13번째 나라가 된다. 또한 사실상 수명을 다했던 녹색성장도 부활한다.
‘탄소중립법’이 아닌 ‘탄소중립 녹색성장법’이라는 법안 이름은 여야 합작품이다. 국민의힘은 2030년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 등 다른 쟁점 때문에 반대했지만, ‘기후위기 대응의 원조는 우리’였다며 법안 이름과 주요 개념으로 녹색성장을 담을 것을 주장했다. 법 통과가 급했던 정부·여당에서는 지난봄부터 “이 전 대통령 때문에 잘못 기억되지만, 녹색성장 개념 자체는 문제가 없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그때는 틀렸지만 지금은 맞다는 긴 설명과 함께.
이런 평가가 일면 맞을 수 있다. 그러나 녹색보다는 성장에 방점을 찍은 과거의 과오를 재현할 우려는 없는 걸까. 화석연료를 활용한 신에너지도 ‘녹색기술’ 중 하나로 새 법에 담길 예정이다. 온실가스 배출량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이유로 원자력발전이 청정에너지란 주장은 여전히 힘이 세다. 길어진 법안 이름은 질문을 남기지만, 답을 찾는 것은 이명박 정부의 이름뿐인 녹색성장을 보며 일종의 트라우마를 겪은 시민들의 몫이다.
최우리 기후변화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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