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에 폭염특보가 내려지며 전기 사용량이 늘어나고 있는 14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한국전력공사 경기지역본부 전력관리처 계통운영센터에서 관계자들이 전력수급상황을 점검하고 있다. 연합뉴스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빠진 자는 죽지 않고 영원히 고통을 받게 된다.”
불교에는 팔열지옥이 있는데 가장 고통이 심한 지옥이 무간지옥이다. 아비지옥이라고도 한다. 기후위기 징후가 뚜렷한 올 여름 폭염으로 전력난이 제기되자, 친원전 언론을 필두로 ‘모든 것은 탈원전 때문’이라는 주장을 퍼뜨리고 있다. 심지어 법이 규정한 정비를 받기 위해 정지 중인 원전들까지 교묘하게 탈원전 정책이 원인이라는 듯 호도하고 있다. 전력공급을 책임진 쪽에서는 “블랙아웃(대정전)이 되기를 원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다. ‘원전 무오류’ ‘원전 무간도’를 닮은 친원전 진영의 최근 상황을 살펴봤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 19일 오후 5시께 ‘계획예방정비’ 등으로 정지 중인 원전 3기를 이달 중 순차적으로 재가동한다고 ‘깜짝’ 발표했다. 앞서 김부겸 국무총리가 문재인 대통령과의 주례회동에서 “이번 주 예비전력이 최저 수준을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정비 중인 원전의 조기 투입과 수요 관리에 적극적으로 나서겠다”고 밝힌 데 이은 것이다.
산업부가 밝힌 3기 원전은 신월성1호기, 신고리4호기, 월성3호기다. 신월성1호기는 이미 지난 16일 원자력안전위원회가 임계(핵분열 연쇄반응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상태)를 확인하고 최종 승인을 앞두고 있었다. 신고리4호기는 지난 5월 말 갑작스런 화재사고로 운전이 멈췄는데, 지난 15일 원안위는 시공 결함 때문이라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신고리4호기 역시 정비 작업이 끝나면 재가동을 승인할 예정이었다. 월성3호기는 지난 달 46일 일정으로 18차 계획예방정비에 들어간 상황이었다. 산업부는 3기를 재가동하면 2150㎿ 전력이 추가 공급된다고 설명했다.
김 총리가 ‘조기 투입’을 밝히며 선제적 대응을 강조했지만, 산업부는 시간상으로는 별 차이가 없다고 했다. 산업부 관계자는 “재가동이 시작되는 3기의 경우 원안위에서 대체로 가동 승인을 확정해둔 상황이었다. 재가동을 공식 확정·발표하기 전에 정부가 먼저 공개하는 것이 맞는지 이견이 있었다. 다만 전력 끊기라고 고사를 지내는 듯한 쪽에 정부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발표를 일찍 하게 됐다”고 전했다. 일부 언론이 마치 전력난 구원투수로 원전3기를 조기 투입해 전력난을 해소했다는 식으로 보도하고 있지만, 원전3기 재가동 일정은 이미 잡혀 있었다는 설명이다.
공공기관은 최대 전력 예상 주간인 이번 주부터 8월 둘째 주까지 최대 전력 피크시간대에 냉방기를 정지하거나 부하를 최소화하는 '냉방기 순차운휴'를 시행해야 한다. 정부서울청사에 입주한 정부 부처 사무실에 20일 오후 2시 30분이 지나며 에어컨 가동이 멈추자 근무 중인 직원들이 선풍기를 틀며 창문을 열고 근무하고 있다. 연합뉴스
친원전 진영에선 원전 안전성 검사를 위해 정기적으로 받아야 하는 계획예방정비도 탈원전 프레임으로 왜곡한다. 현재 원전 24기 중 16기가 가동 중이다. 한울3·4호기, 월성3호기, 신월성1호기, 한빛4·5호기가 정비 중이다. 이외 신고리4호기는 5월말 화재로 정지됐고, 고리3호기는 지난 12일 출력을 줄이자 갑자기 정지해 조사 중이다. 이중 신고리4호기, 월성3호기, 신월성1호기 재가동이 승인됐지만, 21일 고리4호기도 계획예방정비에 들어가면 18기만 가동하게 된다.
계획예방정비의 경우 장전한 핵연료가 다 연소되는 기간인 15개월(중수로), 18개월(경수로)마다 받도록 돼 있다. 첫 가동 이후 차수를 정해 정기적으로 받기 때문에 사전에 정비 시작일, 종료일, 주요 정비항목 등이 모두 공지된다. 다만 연료교체, 발전설비 점검 및 검사 등을 하는 과정에서 돌발 상황이 발생할 경우 계획예방정비 기간은 길어질 수 있다. 공극이 발견된 한빛 4호기의 경우 4년째 정비 중이다.
산업부 관계자는 “원전을 정비하느라 못 돌리면 탈원전 때문에 원전을 놀린다고 하고, 정비가 끝난 원전을 가동하면 원전 때문에 전력난이 해소됐다고 한다. 이 순환 구조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고 했다.
문재인 정부 탈원전 로드맵은 60년 뒤인 2080년쯤에야 완성되는 장기 정책이다. 폭염처럼 에너지 사용량이 늘어나는 기후위기 시대에는 전력수급 문제는 언제든 재현될 수 있다. 원전 반대 주장을 하는 시민사회에서는 전력난 때마다 구원투수처럼 소환되는 원전과의 연관고리를 끊어내기 위한 대안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김영희 탈핵법률가모임 해바라기 대표는 “하절기 최대수요전력(피크전력)이 오르면 항상 원전을 가동해야 한다고, 설비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피크전력시기라도 수요반응(DR) 자원을 통해 공급 수요량을 조절하면 더 경제적”이라고 설명했다. 2014년 국내에 도입된
수요반응 자원 제도는 전기 사용자가 전기 수요를 줄인 것을 보상해주는 제도다. 올해 수요반응 자원 등록 기업과 규모는 5154개사·4650㎿로 전년보다 늘었다. 이 전력량은 원전 4기 발전량에 해당한다. 수조원을 들여 원전 하나를 더 짓는 것보다 전력사용이 집중되는 짧은 기간 전력수요 관리를 적절히 하면 훨씬 경제적이라는 것이다.
한병섭 원자력안전연구소 소장은 “문재인 정부 기조가 탈원전이지만 당장 탈핵이 아니라 에너지 체계를 다양화시키려는 목적이 있었다. 3~5년 정도 장기 관리 계획을 세워 혹서기 전력난이 일어날 수 있는 시기에는 원전 계획예방정비를 하지 않도록 일정 관리만 해도 이런 논란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탈원전 정책을 내세운 이번 정부가 끝나가자 친원전 주장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한국사회는 ‘원전 무간도’가 맞다”고 했다.
최우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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