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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칼럼] 여중생 압사시킨 미국인의 '신'

등록 2018-05-18 13:52

[한겨레 창간 30년-디지털 아카이브]
2002년 8월 9일 한겨레신문 14면 ‘김훈의 거리의 칼럼’

김훈 기자

김훈 기자
김훈 기자
미군은 기어이 여중생 압사사건의 재판권 양도를 거부했다. 7일 주한 미국 대사관이 가까운 서울 광화문 시민공원에서는 쏟아지는 빗속에서 미사가 열렸다. 천주교 경기 북부지구 사제단과 정의구현 전국사제단 소속 신부 15명이 미사를 집전했다.

“장갑차 무한궤도에 깔려 심장과 두개골이 으깨진 딸들의 죽음을 딛고 우리는 강자와 약자가 평등한 세상을 향해 부활할 수 있음을 믿는다”라고 신부들은 기도했다.

미국 달러에는 ‘우리는 신을 믿는다’(IN GOD WE TRUST)라는 문구가 인쇄되어 있다. 신부들은 미국 대사관 쪽을 향해 “당신들이 믿는다는 하느님은 대체 누구냐. 이것이 미국의 기독교 정신이냐”라고 물었다. 미군은 사건발생 초기부터 오직 자신의 이익과 위상만을 방어해 왔다. 죄악과 그 죄악을 숨기기 위한 거짓말로 이어진 미군의 소행을 신부들은 “창세기의 원죄와 같은 죄악”이라고 규정했다.

신부들은 한국 정부가 재판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주님께 기도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정부를 주님이 도와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비에 젖은 수녀들이 고개를 숙이고 주님을 부르며 울먹였다. 주님은 대답이 없었다. 정부는 어디에 있는가! 경찰이 미사가 열리는 공원을 에워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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