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6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열린 국립국악관현악단 ‘부재’ 연습 과정에서 최수열 지휘자와 지휘자 로봇 에버6이 관현악단 지휘를 함께 하고 있다. 연합뉴스
1989년 미국의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이 지휘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하이든 교향곡 88번’ 4악장 연주는 그의 특별한 지휘법으로 유명하다. 지휘봉을 쓰지 않고 얼굴로만 3분30초가량의 곡을 이끌기 때문이다. 현악기의 선율로 곡이 시작하자 번스타인이 두 손과 팔을 가볍게 떨어뜨리고 여유로운 표정으로 연주자들을 바라본다. 필요한 주문은 눈썹을 치켜세우거나 입을 삐죽거리거나 고개를 까딱거리는 것으로 대신한다. 지휘자는 만족스럽다는 듯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 팔짱을 낀 채 리듬을 타기도 한다. 분명한 말이나 큰 동작 없이 표정과 고갯짓만으로 수십명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니, 지휘란 어쩌면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고난도의 상호작용이 아닐까? 물론 번스타인과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그동안 수없이 많은 합주 연습을 했기에 가능했겠지만 말이다.
지난 6월30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의 무대에 오른 지휘자 ‘에버6’(EveR6)은 번스타인과 정반대의 지휘를 선보였다. 얼굴을 사용할 줄 모르는 이 지휘자는 하반신을 고정한 채 모든 지휘를 두 팔로만 진행했다. 에버6은 국내 최초 지휘 로봇으로, 한국생산기술연구원이 국립국악관현악단과 함께 개발한 안드로이드다. 인간 지휘자의 어깨, 손목, 팔꿈치, 허리 등 몸통 곳곳에 센서를 부착해 인체 움직임을 3차원 좌표 위 데이터로 변환했고 이를 다시 로봇의 움직임으로 만들어냈다. 이 과정에서 에버6의 관절 개수와 크기, 모터 성능 등 기술적 조건에 따라 동작을 수정하고 정돈하는 일이 필요했다. ‘모션 캡처’, ‘모션 리타기팅’, ‘모션 최적화’라고 하는 작업이다. 그다음, 작은 단위의 지휘 동작들을 조합해 전체 곡의 지휘법을 완성했다. 즉, 로봇의 지휘는 인간의 지휘 동작을 불완전 모사한 결과다.
에버6이 지휘자로 나선 국립국악관현악단 공연의 제목은 ‘부재’(不在)로, “부재로 존재의 가치를 역설한다”는 뜻을 담았다. 지휘자의 빈자리에 로봇을 투입해 인간 지휘자의 쓸모를 곰곰이 생각해본다는 취지다. 저녁 7시30분 정각,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소란스러웠던 장내가 가라앉았다. 에버6이 무대 아래에서 리프트를 타고 나타났다. 로봇은 매끄러운 몸통을 일부러 드러내려는 듯 연미복은 입지 않았다. 전선이 그대로 보이는 투명한 덮개가 팔을 감쌌고 하얀색 플라스틱이 머리와 상·하반신을 이뤘다. 지휘자의 등장에 연주자들도 일제히 일어섰다. 로봇이 관객을 향해 상반신을 180도 회전하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로봇은 상체를 숙여 정중히 인사했다. 관객이 더 큰 박수와 함성으로 화답했다.
연주자들을 향해 다시 몸통을 돌린 에버6이 오른손과 왼손을 높게 들어올려 자세를 취했다. 연주자들의 시선이 로봇으로 집중됐다. 지휘봉을 힘차게 휘두르는 로봇의 팔짓에 맞춰 첫 곡 ‘깨어난 초원’의 연주가 시작됐다. 연주가 끝나고 에버6이 왼팔을 내리자 연주자들이 그제야 자세를 풀었다. 로봇 지휘자의 가장 큰 역할은 수십개의 악기가 동시에 시작하고 종료되도록 신호를 보내고, 악기의 연주가 어긋나지 않게끔 속도를 일정하게 잡아주는 것이었다. 공연 며칠 전 공개된 리허설 현장에 방문했던
기자들의 평가대로 에버6은 일관된 박자와 균일한 템포를 과연 훌륭하게 구현했다.
1부의 또 다른 연주곡 ‘침향무’는 최수열 부산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이 지휘를 맡았다. 한곳을 꼿꼿이 응시하며 암보(머릿속 악보)로 지휘한 에버6과 달리 그는 악보와 연주자들을 번갈아 쳐다보며 지휘했다. 가야금 협주곡인 ‘침향무’는 앞선 두 곡보다 느리고 음의 세기가 강조된 곡이었다. 가야금 협연자와 전체 악단의 연주가 조화를 이루면서도, 차례로 등장하는 각 악기의 소리가 잘 부각돼야 한다. 최수열은 자신을 에워싼 연주자들과 계속 눈을 맞추고 상체를 구부리거나 팔을 크게 휘젓는 방식으로 곡을 해석해냈다. 곡의 진행과 함께 역동적으로 변하는 그의 표정에서 희열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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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자 로봇 에버6이 공식 데뷔한 지난달 30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공연 모습. 국립극장 제공
1부에서 연주된 곡들이 로봇 지휘자와 인간 지휘자 각각의 특성을 잘 나타냈다면, 인간과 로봇이 함께 지휘한 2부 첫 곡 ‘감’(感)은 둘의 대비를 극대화했다. 연주자들을 향해 나란히 선 에버6과 최수열은 ‘감’을 각자의 방식대로 지휘했다. 최수열은 연주자들과 소통하며 실시간으로 음악을 만들어나가고, 에버6은 곡 안에서 연속되는 패턴을 일정하게 지휘하는 역할을 맡았다. 무대 양쪽의 커다란 화면에 두 지휘자의 상반신이 동시에 송출됐다. 에버6은 1부에서 그랬던 것처럼 박자를 정확히 맞췄고, 최수열은 얼굴과 몸에 감정을 한껏 실어 곡을 지휘했다. 연주자들은 두 지휘자를 바쁘게 따랐다. 박자의 정확성, 곡의 해석 능력, 연주자들과의 교감 능력 등 복잡다단한 감각을 요구하는 이 곡은 지휘의 본질에 대해 묻는 공연의 주제와 잘 어울렸다.
이날 로봇의 지휘는, 로봇과 인간의 합동 지휘는 대결이었나, 협업이었나. 또는 공연이었나, 실험이었나. 어느 쪽이든 그것이 실패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애초 어느 정도 결과가 정해진 시도였기 때문이다. 로봇이 완벽하지 않더라도 가능성을 보인다면 실험으로서 의미가 있고 관객에게 볼거리를 제공하니 공연으로도 의미가 있다. 또 ‘로봇이 절대 따라 할 수 없는 인간의 영역은 감각과 교감’이라는 가설은 부정하거나 반박하기 어려운 ‘참인 명제’였다. 지휘자로서 로봇의 한계는 예견됐고, 연주자들은 곡을 무사히 연주해내기 위해 제한된 방식으로 지휘하는 로봇의 지휘법과 리듬을 익혔을 테다. 그러니 로봇의 성공 여부를 따지는 건 큰 의미가 없다.
이번 사례를 가지고 우리 사회에 로봇을 도입하는 방식의 본보기로 삼으면 어떨까. 로봇을 실험과 공연의 경계에, 부재와 존재의 현장 사이에 놓인 기술로 이해하는 것이다. ‘부재’ 공연이 그랬던 것처럼 인간의 존재와 자리를 일부러 없애서 그 자리에 로봇을 넣어보고, 인간과 로봇을 나란히 두는 것이다. 반대로도 가능하겠다. 로봇의 자리에 인간을 넣어보고 실험 결과를 관객 앞에서 시연하고 가능성을 확인한다. 그래서 인간 존재의 가치를 곱씹고, 로봇과 인간의 자리를 새롭게 설계한다. 그리고 다시 인간 부재의 현장에서 로봇을 실험해본다. 로봇은 어디에선가 깜짝 등장하는 혁신적 기술이 아니라 실험, 시연, 증명, 반추, 재설계의 반복적인 사이클을 통해서 천천히 우리 앞에 자리 잡을 수 있다.
과학기술학 연구자
※연재를 마칩니다. 작가와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국내 1호 로봇비평가.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에서 로봇과 사회의 관계를 연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