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 편집 기술을 이용한 치료제가 겸상 적혈구병에서 처음으로 승인됐다. 정상 적혈구는 둥그런 모양이지만 겸상 적혈구병 환자의 적혈구는 길쭉한 낫 모양이다. 존스홉킨스의대 누리집 갈무리
2020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이용한 난치병 치료제가 처음으로 나온다.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란 박테리아의 면역 시스템을 이용해 개발한 유전자 편집 도구로, 유전자 가위를 DNA의 표적 부위로 안내해주는 가이드RNA 분자(크리스퍼)와, 표적 부위를 잘라내는 효소 단백질(캐스9)로 구성돼 있다.
영국 의약품·의료기기규제안전관리국(MHRA)은 지난 16일(현지시각)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이용한 겸상 적혈구 병과 베타-지중해빈혈 치료제 카스거비(Casgevy)의 사용을 승인했다.
미국에서도 지난 10월 식품의약국(FDA) 자문단이 겸상 적혈구병 환자에 대한 치료의 이점이 위험보다 훨씬 크다는 결론을 내렸다. 식품의약국은 12월8일까지 이 치료제 승인 결정을 내릴 것으로 예상된다. 유럽의약품기구(EMA)도 치료제 승인을 검토하고 있다. 이에 따라 2023년은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이용한 질병 치료 시대를 여는 첫해로 기록될 전망이다.
노벨상 수상자인 미국의 제니퍼 다우드나 교수와 프랑스의 에마뉘엘 샤르팡티에 교수가 2012년 6월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에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기술 논문을 발표한 지 11년만의 일이다.
카스거비는 미국 생명공학기업 버텍스 파마슈티컬스(Vertex Pharmaceuticals)와 스위스 생명공학기업 크리스퍼 테라퓨틱스(CRISPR Therapeutics)가 공동 개발한 치료제로, 정맥주사로 단 1회 투여한다.
흑인들한테서 주로 나타나는 희귀질환인 겸상 적혈구병은 원래 둥그런 모양이어야 할 적혈구가 유전자 돌연변이로 인해 ‘낫 모양’(겸상)으로 바뀌고 끈적해져 서로 엉겨붙는 바람에 피 흐름을 막아 심한 빈혈과 함께 통증 등 다양한 합병증을 일으키는 질환이다. 적혈구 세포의 헤모글로빈을 구성하는 베타글로빈 유전자의
염기서열 단 하나가 잘못돼 발병한다.
지중해, 중동, 남아시아 사람들한테서 주로 나타나는 베타지중해 빈혈도 베타글로빈 유전자 돌연변이로 인해 헤모글로빈 생산이 크게 줄어 빈혈과 함께 피로, 숨가쁨 등의 증상이 나타나는 질환이다.
2019년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기술을 이용해 치료를 받은 최초의 겸상 적혈구병 환자 빅토리아 그레이가 연구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이언스에서 인용
조혈모세포 채취해 유전자 교정한 뒤 다시 주입
카스거비는 45명을 대상으로 한 겸상 적혈구병 임상시험에서 중간결과가 나온 29명 중 28명이 치료제를 투여받은 후 최소 1년 동안 통증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보통 한 달에 한 번씩 수혈을 받는 베타지중해 빈혈 환자 54명을 대상으로 한 임상시험에서는 중간 결과가 나온 42명 중 39명이 최소 1년 동안 수혈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나머지 3명은 수혈 필요성이 70% 이상 감소했다.
치료 방식은 두 질병 모두 같다. 환자의 골수에서 혈액 줄기세포(조혈모세포)를 채취해 크리스퍼-캐스9 유전자 가위로 유전자 염기서열을 교정한 뒤, 다시 환자 몸에 이식한다.
유전자 가위는 표적 유전자(BCL11A)에 도달하면 DNA 이중가닥을 모두 절단한다. 이 유전자는 일반적으로 태아에서만 만들어지는 헤모글로빈의 한 형태가 생성되는 것을 막는 기능을 한다. 이 유전자를 제거하면 태아 헤모글로빈의 생성이 촉진돼 헤모글로빈 이상 현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표적 유전자 부위가 제거된 줄기세포가 태아 헤모글로빈을 함유한 적혈구를 생산해 산소 공급을 증가시켜주기 때문이다.
미국 보스턴에 있는 버텍스 파마슈티컬스 본사 전경. 버텍스 제공
단순한 듯 보이는 이 과정은 그러나 실제론 매우 까다롭다. 유전자 편집된 세포가 몸에 다시 주입되기 전에 환자는 자신의 골수가 이 세포를 받을 수 있도록 기존 골수 세포를 죽이는 혹독한 화학요법을 받아야 한다.
영국 보건당국은 “환자는 치료받은 세포가 골수에 자리를 잡고 안정된 형태의 헤모글로빈으로 적혈구를 만들기 시작하는 동안 병원에서 한 달 이상을 보내야 한다” 밝혔다.
효과가 있더라도 부작용이 심하다면 치료제로 쓰기는 어렵다. 일단 현재로선 메스꺼움, 피로, 발열 등의 증세는 있었지만 큰 안전성 문제는 발견되지 않았다.
또 하나 계속 지켜봐야 할 안전성 문제가 있다. 유전자 편집 과정의 오류로 의도하지 않은 유전자 변형이 생길 수 있다는 점이다.
영국 임페리얼칼리지런던의 데이비드 루에다 교수(유전학)는 “결론을 내리기 전에 이들 세포에 대한 전체 게놈 서열 데이터를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에 의해 절단된 디엔에이(DNA)를 형상화한 그림. 유튜브 갈무리
기념비적 성과지만 치료비용 수십억원
치료 비용이 수십억원에 이를 정도로 엄청나게 든다는 점도 이 치료제가 극복해야 할 과제다. 환자의 혈액 줄기세포를 채취하고, 여기에 유전자 편집을 시행한 뒤 다시 줄기세포를 몸 속으로 주입하는 일련의 복잡한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치료제가 승인받더라도 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국한될 가능성이 크다. 겸상 적혈구병 환자 대부분이 아프리카 사람들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비용이나 시설 면에서 실효성이 크게 떨어진다.
영국 옥스퍼드대 케이 데이비스 교수(유전학)는 “이번 카스거비 승인은 다수의 유전병 치료에 크리스퍼 기술을 적용할 수 있는 문을 열었다는 점에서 기념비적인 조처”라며 “문제는 치료법이 매우 비싸기 때문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국제학술지 네이처는 “치료제 가격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지만 다른 유전자 치료법과 비슷하게 환자당 약 200만달러(25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곽노필 선임기자
nop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