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 작가의 2011년 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의 주인공 한아름을 통해 “삶은 선물”이란 말의 구체성을 보여준다. 사진은 소설 원작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같은 제목의 영화. 출처: 영화 <두근두근 내 인생>
어렸을 때 넘어져서 무릎이 까지면, 보기 싫은 딱지가 앉는 것을 보곤 했다. 아스팔트 깔린 주차장이나 도로에서 놀던 시절이라, 모래와 돌멩이가 만드는 크고 작은 상처의 별무리 대신에 비교적 균일한 평행선이 상처 부위에 얽히고 그 위를 딱지가 덮게 마련이었다. 시간이 지나서 다친 곳이 가려워지면 무신경하게 딱지를 떼어버리곤 했고, 아래에서 차오르는 새 살을 보며 신기해하곤 했다. 그 딱지가 생명을 가를 수 있는 중요한 신체 기작(機作)이라는 것을 배운 건, 대학 때 졸음을 쫓으며 들었던 혈우병에 관한 수업에서였다.
혈우병은 여러 이유로 피가 멈추지 않는 질병의 총칭이다. 혈액의 응고를 담당하는 혈액 내 인자 중 어떤 것이 결핍되어 있는지에 따라 혈우병은 A에서 C까지 소분류로 나뉜다. 가장 큰 집단 중 하나인 혈우병 A는 혈액 응고 인자 VIII 결핍(factor VIII deficiency)을 가리키며, 심한 경우 생후 2~5개월에 자연 출혈이 발생한다. 가벼운 경우에는 외상이나 유치 발치 때 피가 멈추지 않는 것을 보고 처음 발견하게 된다. 혈우병은 인류에게 오랫동안 알려져 온 질병이었으며, 그 유전성이 일찍이 밝혀진 질병이기도 하다.
유전성이란 19세기 초 혈우병의 가족력에 관해 조사가 이뤄지면서 질병이 대를 이어 나타난다는 것이 밝혀졌음을 의미하기도 하거니와, 그 질병을 일으키는 유전자의 변이가 무엇인지 알려져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혈우병 A의 경우, 인간 유전체(genome)를 이루는 염색체 23쌍 중 성염색체인 X염색체에 있는 F8 유전자에서 돌연변이가 나타나 발병한다. 이 F8 유전자가 응고 인자인 VIII 단백질의 설계도이기 때문에, 이 유전자에 돌연변이, 즉 염기서열에 오류가 생기면 응고 인자 단백질 생성에도 문제가 생긴다. 이런 혈우병에는 오랫동안 치료법이 없었다. 문제가 생긴 유전자를 직접 손댈 수 없었기에, 환자를 안정시키고 필요하면 응고 인자를 공급하거나 수혈하는 것이 전부였다.
최근 혈우병의 치료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 지난 몇 년 동안 과학계를 뜨겁게 달궈온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CRISPR-Cas9) 기술이었다. 혈우병과 같이 돌연변이가 발생한 유전자의 염기서열 위치를 알고 있는 질병의 경우, 해당 유전자의 잘못된 부분을 고쳐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간단한 생각은 오랫동안 그 실현 방법을 기다려 왔다. 세균이 유전자의 특정 서열을 인식하여 이를 자를 수 있는 제한효소라는 단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은 꽤 오래 전의 일이나, 이를 마음대로 활용하여 유전자를 조작하는 것은 먼 일처럼 여겨져 왔다. 그러다 인간 유전체 지도가 완성되고, 유전자 부위를 정확하게 인식하여 잘라낼 수 있는 유전자 가위가 개발되면서 그 길이 열린 것이다.
유전자 가위, 불치병을 겨냥하다
최초로 개발된 유전자 가위는 징크핑거 뉴클레이즈(zinc-finger nuclease)라는 긴 이름을 가진 합성 단백질이었다. 그냥 제한효소를 하나 사용하지 않고, 유전자를 인지할 수 있는 효소 여러 개를 하나로 묶어 염기 서열을 더 잘 인식하도록 만든 것이다. 하지만 설계, 제작 과정이 복잡하고 오작동이 많아 실제로 원하는 유전자를 변경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유전자란 염기 A, T, G, C라는 네 글자로 이뤄진 긴 책과 같다. 이 중 정확히 열 글자 정도의 순서쌍을 찾는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닌 데다, 다른 부분을 찾을 가능성도 있으니까 말이다.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의 도식. 유도 리보핵산(guide RNA; gRNA)이 원하는 유전자 위치에 결합하면, Cas9 뉴클레이즈(nuclease, 핵산 가수 분해 효소)가 해당 유전자를 잘라 기존 유전자를 제거하거나 새로운 유전자로 교체할 수 있도록 한다.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징크핑거 뉴클레이즈 다음으로 탈렌(TALEN, Transcriptor Activator-Like Effector Nuclease)이라는 기법이 등장했다. 앞선 유전자 가위보다 좀 더 간단하고 정교해졌지만, 제작이 어렵고 고비용이라는 문제는 여전했다. 이러던 중, 2012년 말 이런 문제를 보완하여 3세대 유전자 가위로 등장한 것이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다. 크리스퍼는 단백질을 만들어야 하는 앞 세대 유전자 가위와 달리 리보핵산(RNA), 즉 유전자에서 단백질을 만들기 위해 정보를 전달할 때 사용하는 유전물질 조각만을 설계하면 되기 때문에 제작도 훨씬 간편하고 비용도 적게 든다.[1]
이 덕에, 2015년 7월 기초과학연구원(IBS) 김진수 단장이 이끄는 국내 연구진은 혈우병 환자 체세포에서 줄기세포를 채취, F8 유전자를 정상으로 교정하는 데 성공한 바 있다. 지난해 8월 연구진은 비후성 심근증을 일으키는 변이 유전자를 인간 정자와 난자의 수정 단계에서 유전자 가위 기법으로 교정해 질병의 유전 가능성을 낮추고, 원치 않는 부분의 유전자를 건드릴 가능성 또한 낮춘 연구결과를 발표하면서 2017년을 “크리스퍼의 해”로 만들었다.
유전자를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설계도를 원하는 대로 고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질병 유전자의 치료는 물론이거니와, 키, 눈 색깔, 피부색 등의 외관, 심지어 신체 능력이나 지적 능력 등 인간이 가지고 태어나는 모든 것을 탄생 전에 결정할 수 있는 시대의 문턱에 다가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 기술이 가지고 있는 경제적 가치는 엄청날 것이다. 성형외과는 너무 거친 예일지도 모르겠다. 예컨대 현재 미국에서는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치료제가 성적을 올린다는 낭설로 학생들이 가짜 진단을 받고 약을 처방 받아 먹고 있다. 치료제가 성적을 올려 준다는 보장도 없는 상황에서도 열풍은 식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주 간단한 유전자 조작으로 아이가 좀 더 집중하는 방법을 개발한다면, 그것이 만들어낼 수 있는 사회적 영향도, 경제적 이익도 엄청나리라는 것은 억측이 아닐 것이다.
이에 따라 인간 수정란을 연구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지에 관한 찬반 논란이 작년부터 더 뜨거워지고 있다. 찬성 측은 유전자 질환 환자의 이익을 그 이유로 제시하고, 반대 측은 유전자 가위 기술의 안전성을 문제로 삼는다. 배아를 연구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가에 관한 문제 제기도 있다. 아직 인간 배아와 태아의 유전자 치료가 금지된 국내 실정에서 위의 논점들은 시급한 논의가 필요하다. 무조건 금지만 하기에는 유전자 가위의 경제적, 과학적, 사회적 여파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유전자 편집의 윤리, 가치를 묻다
여러 복잡한 논의가 섞여 있기에, 하나의 축으로 전체 논의를 정리할 필요성이 있다. 위에서 언급한 ‘필요성 대 안전성’의 대립이나 배아의 지위에 관련한 논란은 좋은 출발점이지만, 관련한 문제 전체를 담아내기는 어려워 보인다. 여기에서는 “유전자 편집이 도착할 곳은 어디인가?”라는 질문에 관해 조금 더 생각해보자. 예컨대, 20세기 초 핵물리학 연구가 도착한 지점은 핵폭탄과 핵발전소였다. 위험한 것은 무조건 만들면 안 된다는 주장은 큰 의미가 없다. 이미 개발 중이던 기술에 관해 눈을 가린들 기술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단지, 핵물리학 연구가 도착할 지점이 핵폭탄과 핵발전소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그 결과를 생각하면서 연구를 진행했더라면 역사는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볼 뿐이다. 만약, 핵물리학을 통해 우리가 도착하려고 했던 곳이 다른 곳이었다면, 2차 대전의 광기가 원자력과 폭탄을 연결짓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삶은 조금 달라졌을까.
유전자 편집이 도착할 곳은 그 표현이 의미하는 대로, 유전자를 편집하여 인간을 원하는 대로 설계하는 것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줄리언 사블레스쿠 교수와 같은 이들은 생명공학을 도입해 인간을 향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최근 불거진 이른바 “포스트휴먼(posthuman)” 담론은 기계와 인간의 결합, 유전학을 통한 인간의 변화가 가져올 ‘인간 다음의 인간’을 상상한다. 유전자 편집의 측면에선 아마도 인간의 육체적, 지적 능력의 개선을 통한 더 나은 인간의 탄생을 말할 것이다. 물론, 아직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에서 포스트휴먼을 말하는 것은 시기상조이다. 그런데도, 기술의 발전이 이를 충분히 가능케 하리라는 예상 또한 가능하다.
물론, 이들이 말하는 인간의 도덕적 능력의 향상 등 인간의 단점을 넘어서기 위한 기술 활용 주장에는 충분히 귀를 기울일 만한 부분이 있다. 하지만, 유전자 편집으로 우리가 바라야 할 것이 인간의 부족함을 덜어내고 더 낫게 만드는 것일까. 이 주장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영화 <가타카>가 물었던 것처럼 삶의 가치에 대한 고민 때문일 것이다. 가치 있는 삶은, 과연 더 많은 것들을 누릴 수 있다는 그 조건으로 결정되는 걸까.
국내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미국 하버드대학의 마이클 센델 교수는 <완벽에 대한 반론>이라는 책에서 인간 향상론을 반대하며 그 근거로 “삶은 선물”이라는 오랜 표현을 끌어들인다. 유전자 편집은 질병 치료를 위해서만 허용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그는, 인간을 향상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현실화된다면 삶은 더는 인간에게 선물일 수 없으리라고 외친다. 삶에 존재하는 의외성 때문에 그것은 선물일 수 있다. 만약, 그 조건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면 삶의 아름다움은 사라질 것이다.
<두근두근 내 인생>이 보여주는 선물로서의 삶
다소 복잡한 센델의 논의를 따라가는 대신, 김애란 소설가의 2011년 작 <두근두근 내 인생>의 주인공 한아름을 통해 “삶은 선물”이란 말의 구체성을 살펴보려 한다.
“네가 나의 슬픔이라 기쁘다, 나는.” 소설은 조로증이라는 희소 질환을 통해 부모와 자식의 시간을 역전시킨다. 마치 아름의 글이 부모의 사랑을 낳고, 그 사랑이 다시 아름을 낳은 것처럼. 물고 무는 질문을 통해 삶의 무게와 가치를 묻는 <두근두근 내 인생>은 2014년 영화로, 2015년 연극으로 각색되었다. 출처: 교보문고
올해 한아름은 부모가 그를 얻었던 나이와 같은 열일곱 살이 되었다. 지금의 통념에 비춰볼 때 그의 부모가 조금 성급한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은 잠깐 접어두자. 아마, 소년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 생각은 사라질 테니까. 이미, 여든의 세월을 지낸 얼굴을 한 그를 보면 말이다. 소년은 원인이 알려지지 않은 병인 조로증 환자로, 환자 중에서는 상당히 오랫동안 생존해 있는 축에 속한다. 조혼한 그의 부모는 가정을 꾸리기도 넉넉지 않은 형편에 그의 병원비를 대고 병간호를 하느라 하루하루가 팍팍하다. 노쇠할 대로 노쇠한 그의 신체는 한 부분씩 기능을 상실해 간다. 그는 젊어 보기 전에 이미 늙었다. 그런 삶은 어떨까. 그 시간에 선물이라는 표현을 붙이는 건 잔혹하지 않을까.
물론 소년 아름을 성인으로 대치한다면, 그 삶은 우리 모두에게 선물이 되기야 하겠다. 우린 때로 “아픈 사람이 더 아픈 사람을 보고 내비치는 안도의 눈빛”을 보낼 수 있는 대상을 필요로 하며, 뭇 종교는 그 자리에 신앙의 대상을 놓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런 삶은 다른 사람의 삶에 선물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소설 중 한아름이 이성의 감정을 느낀 대상인 이서하에게 보낸 고백의 편지에 적힌 것처럼 우린 “너보다 더 아픈 사람이 필요”한 경우가 있으니까. 위해를 가하는 것이 아니라면, 나보다 힘든 사람의 삶을 보면서 일말의 위안을 느끼는 것을 나쁘다고 말할 필요는 없다. 그러니, 누군가는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을 내뱉은 것이리라.
하지만 그것은 순전히 남을 위한 것. 친구라곤 옆집의 60대 할아버지뿐이고, 친밀함을 느껴 마음을 터놓은 대상이 오히려 자신의 삶을 모욕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소년 아름의 삶을 선물이라고 하는 건 너무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통증은 공약 불가능하다는 아픈 사실을 “아플 땐 그냥 철저하게 혼자”라고 다시 표현하는 그의 삶을 보면서 누군가가 야속해지지 않기는 쉽지 않다.
다만, 유일하게 독자에게만 오롯이 전달되는 모습에서, 그 삶의 위안을 살짝 엿본다. 아름이 자신의 아픔으로 문장들을 조탁해나가는 모습을 살펴보는 것 말이다. 소설은 조로증에 걸린 한 소년의 인생 마지막 순간에 관한 소설이면서, 동시에 “이야기꾼의 탄생”에 관한 소설이기도 하다.[2] 소설은 아름의 마음속에서 “낱말카드가 조그맣게 회오리”치는 광경을 소복이 담아낸 풍경화다. 자신을 배신한 누군가에게 “내가 너를 볼 수 있게, 그 자리에 있어주었던 것, 고마워”라고 아름이 말할 때 담겨 있는 감정의 진폭은 소설의 마지막에 한아름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에 바친 헌사 ‘두근두근 그 여름’을 포근히 감싸 안는 표현의 넓이가 된다. “싸락눈, 만년눈, 소나기눈, 가루눈” 할 때 세상을 그려가는 단어 하나하나를 세심히 그러쥐는 아름의 손길을 보며, 그는 나보다 더 많은 아름다움을 만났으리라는 생각을 잠시 해 본다.
시들어가는 아름의 신체가 이야기꾼으로 탈바꿈하는 모습은 그에게, 그의 부모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아름의 삶을 선물로 비춰 보여준다. 바꾸어 말하면, <두근두근 내 인생>은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선물로 만들어 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삶이 선물’이라는 말은 그 안이 행복으로, 누릴 만한 것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통으로 가득한 삶일지라도, 인간은 그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기에 삶은 선물일 수 있다.
사블레스쿠와 같은 인간 증강론자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지 모르겠다. 조로증에 걸린 아이의 삶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삶을 좋은 것들로 가득 채울 때 삶은 선물이 될 것이라고. 하지만, 이야기꾼 아름은 삶의 고통과 어려움을 아름다움으로 바꿔 내며 인간 존엄성의 조건을 보여준다. 좀 더 나아가, 우리는 이렇게 말해볼 수도 있겠다. 유전자 편집이 새 생명에게 모든 조건을 결정하게 된다면, 조건을 벗어나 행동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자유가 그 가치를 상실할 것이라고 말이다. 그것은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해야 하는 근거가 되는 인간 자유의 퇴색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증강을 위한 유전자 편집의 가능성에 반대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것이 유전자 편집 자체를 부정한다거나, 질병 치료의 가능성을 넓히기 위한 탐구도 금지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아름이 보여준 것은 고통과 어려움에서도 아름다움이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름다움을 위해 고통을 놓아두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과유불급이다. 혈우병, 페닐케톤뇨증, 갑상선기능저하증 등 유전성 질환의 치료에 유전자 편집 연구가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단, 연구 그 자체가 목적이 되지 않고, 삶의 가치를 위한 수단의 자리에서 계속 연구되어 나아갈 수 있도록 관련 제도를 정비해야 할 것이다.
주어진 삶을 소중히 가꿀 수 있도록 복무하는 유전자 편집은, 더 나은 인간을 말하는 유전자 편집과 그 지향하는 바도, 미래에 우리에게 가져다줄 열매도 다르리라 믿는다. 이제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유전자 편집이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 수 있도록 숙의를 거듭할 때다.
[참고문헌]
[1] 전방욱. “CRISPR-Cas9 사용이 제기하는 윤리적 질문들” 인격주의 생명윤리 2016;6(2):87-117.
[2] 차미령. “이야기꾼의 탄생과 진화 1-김애란 장편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 읽기” 계간 문학동네 2011년 가을호. 문학동네.
김준혁/치과의사,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대학원생(의료윤리학)
junhewk.kim@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