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예방 로봇’ 실벗(Silbot)은 게임 형식의 훈련 프로그램을 통해 노인들의 뇌 노화를 늦추도록 돕는다. 사진은 실벗이 한 전시장에 설치된 모습.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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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예방 로봇’ 실벗(Silbot)을 처음 본 건 2017년 봄, 수원 영통구 보건소에서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2009년 공개한 실벗은 이곳에서 ‘선생님’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로봇에 탑재된 게임 형식의 다양한 인지 훈련 프로그램이 뇌의 노화를 늦춰 치매를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벗의 효과는 의학 논문으로 검증된 터였다. 보건소는 2016년부터 관내 노인들을 대상으로 ‘로봇 선생님 실벗의 뇌 운동 건강교실’을 운영 중이었다.
이날은 오후 2시와 3시20분에 두 차례의 수업이 예정되어 있었다. 햇살이 잘 드는 작은 교실에 들어서자 흑백 격자무늬 판 위에 서 있는 실벗이 보였다. ‘얼굴’ 역할을 하는 태블릿피시와 곡선 모양의 몸통과 두 팔 그리고 배터리와 바퀴가 달린 하단부가 키 1.1m짜리 로봇을 구성했다. 격자무늬 판 주변을 2인용 책상 네개가 디귿(ㄷ)자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었다. 책상 각 자리에는 태블릿피시 여덟 개가 놓여 있었다. 수업을 10분 앞두고 강사가 교실에 들어와 준비를 시작했다. 꺼져 있던 실벗의 전원을 켜자 로봇의 얼굴에 두 눈이 나타났다.
한 시간 동안 총 네개의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강사는 노인들에게 ‘지혜의 판’ ‘퍼즐 천국’ ‘단어 짝꿍 찾기’ ‘머릿속 한글 세상’이 각각 두정엽, 후두엽, 측두엽, 전두엽을 활성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단어 짝꿍 찾기’는 다음과 같다. 텔레비전 화면에 여러개의 단어 쌍이 차례로 제시되고, 실벗이 단어들을 읽어준다. 알맞은 단어 조합을 찾는 퀴즈가 나오면 노인들은 각자 태블릿피시를 통해 답을 제출한다. 실벗은 노인들이 퀴즈를 푸는 동안 고개를 좌우로 두리번거리며 응원을 보내거나, “약속해요. 답을 옆에서 가르쳐 주시면 안 돼요”와 같은 말을 했다. 로봇의 귀여운 경고에 노인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가르치는 로봇과 배우는 인간의 유별난 만남이 작은 교실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실벗을 다시 만난 건 2019년 가을, 덴마크 ‘오르후스’시에서 운영하는 한 요양원에서다. 2011년 말에 실벗을 처음 도입한 오르후스시는 2015년 후속 버전인 실벗3를 이 요양원에 들였다. 이곳에서는 매주 금요일 오전 10시에 요양원 입소자들을 대상으로 수업이 열렸다. 교실에 들어서자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바닥에는 흑백 격자무늬 판이, 교실 앞쪽에는 텔레비전과 강사용 피시가, 학생들의 책상 위에는 태블릿피시가 있었다. 벽에는 실벗 프로그램이 뇌의 어떤 기능에 어떻게 도움을 주는지 설명하는 커다란 영문 펼침막이 걸려 있었다. 한국 교실을 통째로 옮겨온 듯했다.
수업 시작 전, 작은 수레에 실린 실벗이 등장했다. 몸통 군데군데에 흠이 나 낡고 허름한 모습이었다. 윙윙대는 기계 소리가 교실에 울려 퍼지고 로봇이 얼굴과 팔을 움직일 때마다 삐거덕대는 소리가 났다. 이윽고 휠체어를 탄 노인 세분이 교실로 들어섰다. 이날의 프로그램은 ‘퍼즐 맞추기’ ‘이야기보따리’ ‘빙고’. 덴마크어로 번역된 프로그램 제목이 텔레비전 화면 위에 나타났다. 작업치료사인 모니카가 학생들 사이를 오가며 익숙하게 수업을 이끌었다.
수업이 진행되는 45분 동안 실벗은 노인들에게 어떤 정서적 자극도 주지 않았다. 실벗은 교실 중앙에 서서 프로그램에 맞춰 말을 내뱉었지만, 노인들은 로봇의 말에 반응하기보다는 태블릿피시로 문제를 푸는 데 집중했다. 필요한 대화는 작업치료사들과 나눴다. 이곳의 실벗은 선생님보다는 학습을 위한 교구에 가까웠다. 수업이 끝나자 모니카가 실벗을 다시 수레에 실어 창고로 옮겼다.
덴마크 실벗 프로그램 운영을 처음 맡았던 오르후스시 소속 담당자는 지난했던 로봇 도입기를 회상했다. 노인들은 덴마크어로 번역된 실벗의 말이 종종 무례하고 공격적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제한 시간 내에 문제를 풀도록 재촉하거나 틀린 답을 제출했을 때 나오는 대사가 자신들을 다그치고 꾸짖는 것처럼 느꼈다. 긴박함을 주는 게임적 요소보다는 자신들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학습 분위기를 원했다. 담당자는 로봇과 함께 투입되는 강사들이 참고할 수 있는 안내서를 제작했다. ‘로봇이 혼자 말하게 두라’는 한국 쪽 지침을 따르는 대신, 노인들에게 게임의 규칙에 대해 꼼꼼하게 설명할 것, 정해진 시간이 끝났어도 문제를 끝까지 풀 수 있도록 충분히 기다릴 것 등의 내용이 포함됐다.
로봇에는 그것을 사용할 사람들에 대한 가정이 담겨 있다. 실벗을 개발한 로봇공학자들은 치매를 걱정하는 노인들을 상상하며 프로그램을 설계했을 것이다. 아직 정확한 원인과 치료법이 밝혀지지 않은 치매를, 노인들이 재미있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예방할 수 있도록 대학병원 의료진과 협업하여 인지 훈련 게임을 고안했다. 가만히 앉아서 하는 게임은 재미없으니 실벗이 격자무늬 판 위를 이동한 경로를 기억하여 똑같이 걷게 하는 게임도 만들었다. 태블릿피시가 익숙하지 않을 노인들을 위해 선명한 색깔과 큰 글씨를 골라 넣었다. 최고의 학습 효율을 위해 실벗과 함께 덴마크에 건너간 것들이다.
‘로봇 선생님’이 미처 가져가지 못한 것들도 있다. 새로 만나게 될 학생들과 환경에 대한 이해다. 덴마크 요양원의 작업치료사들은 퀴즈를 누가 얼마나 빠르게 풀었는지 겨루는 것보다 조금 느리더라도 끝까지 해내는 것이 바람직한 학습 방법이라고 믿었다. 노인들은 서두르는 선생님보다 천천히 설명해주고 조용히 기다리는 선생님을 원했다. 시간을 재고 우열을 가리는 실벗의 게임들은 인지 훈련을 위한 도구로 쓰일 뿐, 로봇과 노인 사이에 선생님-학생이라는 구도를 만들어 내진 못했다.
훌륭한 선생님은 학생을 가리지 않는다. 앞에 앉은 학생들이 한국인이건 덴마크인이건, 신체 조건과 수학 능력이 어떻든 간에 누구도 소외하지 않는 교실을 만들 것이다. 수업의 목표와 방향을 유지하면서도 학생들의 성향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는 자질이 필요하다. 덴마크에 간 ‘로봇 선생님’에겐 없던, 아마 영영 가지지 못할 그 능력이다.
과학기술학 연구자
국내 1호 로봇비평가.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에서 로봇과 사회의 관계를 연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