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한 장면. ENA 유튜브 화면 갈무리
태어나서 읽은 책을 모두 기억하고 대학교에서 단 한 번도 일등을 놓친 적이 없지만, 건물 회전문은 통과하지 못하는 변호사 우영우.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지고 있어 다른 사람과 원활한 소통을 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그는 사건에서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부분을 파고들어 그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돕는다. 시청률 0.9퍼센트에서 출발하여 10퍼센트를 넘는 시청률을 기록하고 회마다 선풍적인 인기를 몰고 다니는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이야기다.
작가의 전작인 영화 <증인>에도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주인공과 변호사의 이야기가 등장하기에 후속편이라는 느낌도 있는 이 드라마가 이렇게까지 인기를 끌 것이라 예상한 사람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주인공이 지닌 한계는 언제나 극을 이끌어 가는 동력이지만, 한국 사회에서 장애는 그렇게 환영받는 주제는 아니기에 그렇다.
한편, 주인공은 영화 <레인 맨>, 드라마 <굿 닥터> 등에서 등장한 ‘서번트 증후군’, 즉 자폐 스펙트럼 장애로 사회적 측면에서 어려움을 겪으나 암기나 계산 등 ‘지적’ 측면에서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는 인물로 그려지기에 서사에서 어느 정도 익숙한 인물형이다. 따라서 우영우 변호사가 시청자들에게 다가와야 하는 허들은 그렇게 높지 않았던 것 같고, 법정 드라마를 기본으로 휴머니즘, 로맨스 등을 섞은 복합 장르물인 작품이 탄탄한 구성을 통해 깊은 호소력을 가질 수 있는 요소로 작용했던 것 같기도 하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포스터. 출처: 이엔에이
작품이 왜 성공했는지 말하는 것은 나무에서 물고기를 구하는 격이기에 그만두자. 주인공 우영우와 같은 능력을 지닌 사람은 극소수이며, 이런 고기능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지닌 사람만을 서사의 중심인물로 내세우는 것은 장애를 바라보는 왜곡된 시선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우려도 접어두자.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보면서 나는 저런 천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방방곡곡을 찾아보면 저런 능력을 지닌 사람이 분명히 있을 테니까.
하지만 현실에서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만나지 못할 것 같은 사람들이 드라마에는 등장한다. 우영우 변호사를 둘러싼 사람들이다. 법무법인 ‘한바다’의 시니어 변호사로 우영우를 챙겨주는 정명석(강기영 분)이나 우영우를 아무런 편견 없이 대하는 친구 동그라미(주현영 분) 같은 사람. 아니면 우영우의 로스쿨 동기로 질투와 관심을 동시에 보이는 최수연(하윤경 분) 같은 사람 말이다.
이들 없이 우영우가 변호에 성공할 수 있을까? 아니, 로스쿨을 다니고 법무법인에 취업은 할 수 있을까?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확률은 우영우와 같은 ‘서번트 신드롬’을 가질 극히 드문 확률보다 훨씬 더 낮을 것이다. 우영우의 정신 상태는 그가 학업이나 업무를 할 때 극명한 장애를 일으킬 것이다.
그러나 우영우는 변호에 성공한다. 자신을 여러 방향에서 지지해 주는 주변 사람들과 함께. 그들과 함께 있을 때, 우영우는 그저 약간 다른 사람일 뿐이다.
우리가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장애의 의미다. 어떤 특징을 지닌 사람이 어떤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 즉 장애를 정말 ‘장애’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다른 무엇보다도 주변 사람이며, 주변 사람에게 역할을 부여하는 사회다. 다시 말하면, 사회가 어떤 특징을 가진 사람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할 때 장애가 나타난다. 그런 의미에서, 우영우에겐 장애가 없다.
그에겐 의사가 붙인 진단명도 있고, 다른 사람의 말을 따라 하는 반향어나 특정 대상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이는 등 다른 행동을 보이는 데 장애가 없다니 무슨 말이냐 싶으실 테다. 그래서, 살펴보려 한다. 도대체, 장애란 무엇인가?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시니어 변호사 정명석은 ‘서브 아빠’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우영우의 뒤를 받쳐준다. 한 기사[1]에서 김효원 소아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정명석 같은 변호사가 판타지”라면서 장애인을 지지하는 인물을 현실에서 만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지적한다. 출처: 이엔에이
고·중세 사회에서 장애는 천형이거나 세상의 할큄이 남긴 흔적이었다. 지금이라고 크게 다르겠나 싶기도 하지만, 질병을 치료할 방법이 별로 없던 세상에서 많은 사람은 크든 작든 병이나 사고가 남긴 자국을 평생 간직하며 살아야 했다. 근대 복지 개념이 등장하기 전까지 사회가 약자를 체계적으로 책임지는 노력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한편으로 장애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신적 비밀을 알게 해주는 통로로 인식되었다. 시각 장애인은 ‘눈앞’의 것을 보지 못하는 대신 비밀스러운 것들을 ‘볼 수 있다’고 여겨졌다. 정신질환자는 인간 사회의 질서에서 벗어난 대신 다른 세계의 질서, 예컨대 신들의 질서 속에서 살아간다고 했다.
산업사회는 신체 건전한 노동자의 세상으로 세계를 재편했다. 노동할 수 없는 자에게 인간 이하의 지위를 부여하고 대신 그들을 구휼한 것도 산업사회였다. 노동의 질서에서 벗어난 자들을 구빈원에 모으고, 이들을 집단 관리하기 위한 체계는 병원이 되었다. 병원은 치료 가능한 자와 치료 불가능한 자를 분류하여 전자는 환자로, 후자는 장애인으로 불렀다. 비로소 장애는 현대적 의미를 부여 받았다. 그것은 인간을 노동할 수 없게 만드는 변경 불가능한 속성이다.
이런 생각은 고전적인 장애 정의에 반영되어 있다. 1975년 국제연합(UN) 총회가 결의한 ‘장애인 권리 선언’은 장애인을 “신체적·정신적 능력의 결함으로 인한 결과로 개인, 사회생활의 필요조건을 스스로 보장할 수 없는 사람”으로 정의하였다.[2] 1980년 세계보건기구(WHO)는 국제장애분류(ICIDH)를 제시하여 신체적 기능 제한인 손상(impairment), 개인의 능력 제한인 장애(disability), 손상과 장애로 인하여 개인이 경험하는 사회적 불리함인 핸디캡(handicap)을 구분하였다.[3] 이런 구분은 장애의 원인이 되는 신체적·정신적 문제와 장애 자체를 나누는 한편, 장애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결국 시민으로서의 ‘정상적인’ 역할 수행이라고 보고 있음을 보여준다. 간단히 말해서 ‘장애인’은 일할 수 없는 존재라서 장애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시혜적인 소득의 보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복지 정책의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이후 세계보건기구는 1997년 국제장애분류-2(ICIDH-2), 2001년 국제 기능·장애·건강 분류(ICF)를 발표하면서 장애와 관련한 정의를 개정해 나갔다.[4] 이 과정에서 기존 구분의 장애와 핸디캡 사이 경계가 모호하다는 주장을 받아들여 핸디캡이라는 개념은 삭제되었다. 또한 장애인의 사회 참여를 확대하는 것이 정책의 목적이 되었고, 이에 따라 장애인 고용정책을 추진할 것을 각 국가에 요구하게 되었다.
장애가 인간을 노동할 수 없게 만드는 속성이라면, 장애인 고용정책이란 모순이거나 눈 가리고 아웅인 이상적 목표가 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헛된 꿈이 아니며, 장애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요청하고 있다. 더는 장애 자체가 노동을 불가능하게 하는 요소가 아님이 여기에서 강조된다. 물론 개인은 손상으로 인하여 특정 능력의 수행에 한계를 지닐 수 있다. 그러나 개인적, 환경적 요소로 인하여 그 한계는 줄어들거나 늘어날 수 있다. 예컨대 경사로가 없으며 통로의 폭이 보장되지 않는 직장에 휠체어를 사용하는 이가 취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상황이라면 그가 취업하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국제 기능·장애·건강 분류[4]의 장애 개념. 개인이 기능할 수 있는지, 또는 장애를 경험하는지 여부는 신체적 조건과 상황(환경적, 개인적 요소)의 상호작용에 따라 결정된다.
다시 우영우의 이야기로 돌아오자. 주변 사람의 이해와 도움이 없을 때, 우영우는 변호사로서 역할을 수행해 낼 수 없다. 사실 드라마 곳곳에서 등장하는 것처럼, 아니 드라마 자체가 우영우를 “이상한”이라는 표현으로 수식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우영우는 일반적인 노동 환경에서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이것이 우영우 개인이 지닌 변경 불가능한 속성, 즉 본질적 장애로 받아들여질 때,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이가 노동한다는 것은 오히려 ‘이상한’ 일이 된다.
그러나 드라마에서 우영우는 착실히 자신의 길을 간다. 그에겐 자기 역할을 수행하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주변 환경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가 ‘천재’이고 엄청난 기억력의 소유자라서가 아니다. 물론 그렇기에 그는 변호사 일을 하지만, 꼭 변호사여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의 역할 수행을 가능케 하는 것은 우영우의 주변 인물들이다. 즉 우영우에게 정명석 변호사나 동그라미와 같은 인물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지닌 한계를 줄이고 자신의 특징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환경적 요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리하여 개인의 ‘손상’이 어떻게 ‘장애’가 되지 않을 수 있는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잘 보여준다.
안타깝게도 이런 환경적 요소는 우리에게 주어져 있지 않다. 우리 사회에서 우영우와 같은 개인은 본질적 장애인으로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는 인물로 받아들여지며, 이것은 전후 한국 사회를 지배해 온 장애에 대한 낙인이기도 하다. 고도성장의 이면에는 여전히 고칠 수 없는 신체와 정신의 문제를 노동 불가능성과 연결 짓는 근대적 인식이 남아있다. 장애를 가진 개인은 그 자체로 열등한 ‘장애인’으로 격하된다.
그러나 환경적 요소가 변화할 때, 우리 각자가 손상을 가진 개인을 대하는 방식이 바뀔 때 장애는 달라진다. 오히려 그들을 ‘장애인’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우리 사회가 아닌가?
김준혁/연세대 교수·의료윤리학자 junhewk.kim@gmail.com
참고문헌
1. 중앙일보. “우영우가 판타지? 정명석이 판타지죠” 전문가 뼈있는 일침. 2022.7.16.
2. UN. Declaration on the rights of disables persons. 1975.12.9. https://www.ohchr.org/en/instruments-mechanisms/instruments/declaration-rights-disabled-persons
3. WHO. International classification of impairments, disabilities, and handicaps: a manual of classification relating to the consequences of disease, published in accordance with resolution WHA29.35 of the Twenty-ninth World Health Assembly, May 1976. 1980. https://apps.who.int/iris/handle/10665/41003
4. 세계보건기구. 국제 기능·장애·건강 분류 한글번역본 제2차 개정판. 2016. https://apps.who.int/iris/bitstream/handle/10665/42407/9241545429_kor.pdf?sequence=114&isAllowed=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