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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대한민국 정치 흐름 뒤바꾼
통합과 야합의 대하 드라마

등록 2014-03-03 15:46수정 2014-03-04 15:17

1990년 3당 합당에서 2014년 제3지대 신당까지
1990년 2월9일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회관에서 열린 전당대회 수임기구 합동회의에서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3당이 합당하기로 의결한 뒤 김영삼·김종필 최고위원과 박태준 최고위원 권한대행(오른쪽부터)이 만세를 부르고 있다.  자료사진
1990년 2월9일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회관에서 열린 전당대회 수임기구 합동회의에서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3당이 합당하기로 의결한 뒤 김영삼·김종필 최고위원과 박태준 최고위원 권한대행(오른쪽부터)이 만세를 부르고 있다. 자료사진
1997년 12월19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기자회견을 마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가 김종필 , 박태준 씨의 손을 들어 DJT 연대를 과시하고 있다. 연합뉴스
1997년 12월19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기자회견을 마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가 김종필 , 박태준 씨의 손을 들어 DJT 연대를 과시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파가 몰아치던 1990년 1월22일,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가 따뜻한 청와대 접견실에서 방송카메라 앞에 섰다. “민주·번영·통일을 이룰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기 위해 오늘 국민 여러분 앞에 섰”다는 그들은 “지난날의 배타적 아집과 독선, 투쟁과 반목의 구시대 정치를 활활 타는 용광로 속에 불사르기로 했”다고 국민들에게 통보했다. 1988년 총선이 빚어낸 여소야대 구도를 일거에 뒤집은 메가톤급 합당이었다.

‘87년 체제’로 절차적 민주주의가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면서 정치세력이 집권을 위해 필요한 건 국민들의 ‘표’였다. 결선투표 없이 다수득표자가 대권을 장악하는 단판승부에서 산술적인 합산은 단순하고 매력적인 방책이었다. 특히 각자의 지역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3김은 합당과 연합의 방식을 통해 충분히 야망을 가질 수 있었다. 3당 합당을 발표하며 노태우는 “역사의 사명”, 김종필은 “구국의 결단”이라는 거창한 수사를 막 던졌다. 그러나 최대 수혜자는 3당 합당을“하나님의 뜻”으로 돌린 김영삼이었다.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은 88년 총선에서 김대중이 이끈 평화민주당에 제1야당 자리를 내줬다. 92년 대선에서 집권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김영삼은 ‘군사정권 세력과의 야합’이라는 욕먹을 각오를 하고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호남과 김대중을 포위한 데 이어 거대여당의 대통령 후보까지 거머쥔 김영삼은 92년 대선에서 김대중을 압도했다.

3당 합당으로 영남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거대 패권정당이 형성된 뒤, 합당과 연합은 소수파의 벤치마킹 대상이 됐다. 민주화 세력의 유일 대선후보라는 명분을 가지고 출마한 92년 대선에서 필생의 라이벌 김영삼에게 패배한 김대중은 소수파의 한계를 뼈저리게 절감한다. 그리고 ‘제2인자’만으로도 만족하는 김종필과의 연합으로 반격을 시도한다.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총재는 대선을 한 달여 앞둔 97년 11월 초, 김종필 자유민주연합 총재에게 국무총리 자리와 경제부처 조각권을 약속하며 손을 잡았다. 자민련에 합류한 박태준까지, 반 이회창 세력을 모으는 ‘디제이티(DJT) 연합’이었다. 이렇게 형성된 대세에도 김대중은 이회창을 39만표 차이로 간신히 누르고 집권에 성공했다.

2002년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시도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 후보와 정몽준 국민통합21 후보가 2002년 11월16일 새벽 서울 국회 귀빈식당에서 후보단일화를 위한 회담 결과를 발표한 뒤 껴안고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2002년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시도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 후보와 정몽준 국민통합21 후보가 2002년 11월16일 새벽 서울 국회 귀빈식당에서 후보단일화를 위한 회담 결과를 발표한 뒤 껴안고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김한길 민주당 대표(오른쪽)와 안철수 새정치연합 창당준비위 중앙운영위원장이 2일 오전 국회 사랑재에서 6·4 지방선거 전 신당 창당을 선언하는 기자회견을 하기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김한길 민주당 대표(오른쪽)와 안철수 새정치연합 창당준비위 중앙운영위원장이 2일 오전 국회 사랑재에서 6·4 지방선거 전 신당 창당을 선언하는 기자회견을 하기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2002년 대선에서도 이른바 민주진영의 필승 전략은 단일화였다.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지지율 하락에 이어 자신을 후보 자리에서 끌어내리려는 민주당 내 후보단일화추진협의회(후단협)의 공세를 ‘연합’으로 막아낸다. 상대는 2002 월드컵 성공 분위기를 타고 대선후보로 급부상한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였다. 단일화에 합의한 뒤 정몽준과 포장마차에서 소줏잔을 비우고 머리에 털어주는 노무현의 제스처가 주는 인상은 강렬했다. 독배일 수도 있는 소줏잔을 받아든 노무현은 결국 정몽준을 누르고 단일후보로 선출되며 지지율 하락세를 일거에 반등시켰다. 캠페인 과정에서 쌓인 감정싸움 탓에 정몽준이 대선 전날 ‘지지 철회’를 선언했지만 대세는 노무현이었다.

2007년 대선을 앞둔 민주진영의 화두는 통합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당선 뒤 전국정당, 백년정당을 표방하며 열린우리당을 창당했지만 호남을 잃고 분열된 여당의 구조는 취약하기만 했다. 결국 2007년 대선을 앞두고 민주진영은 다시 모여 대통령 후보 경선을 치르며 붐업을 시도한다. 그런 배경에서 ‘열린우리당+민주당+손학규+시민사회’가 모인 대선용 정당이 대통합민주신당이었다. 그러나 대통합민주신당의 후보 경선에는 인물도 없고 감동도 없었다.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는 강력했다.

2012년 대선에서의 후보단일화 논의는 안철수가 있어 가능했다. 이명박 정권의 실정 탓에 정권교체 열망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제1야당이었던 민주당의 문재인 후보는 뒷심이 부족했다. 반면에 ‘무릎팍 도사’ 출연 뒤 대선후보로 급부상한 안철수는 매력적인 대체재였다. 구도나 인물 면에서 야권으로서는 싸워볼 만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문재인-안철수 두 후보 진영은 후보등록 마감 직전까지 단일화 방식을 놓고 치킨게임을 벌였고 결국 안철수의 일방적인 양보로 단일화는 마무리됐다. 아름답지 못한 단일화는 시너지 효과가 없었다. 국가정보원과 국군 사이버사령부 등 집권 세력의 관권선거와도 맞물렸다. 승자는 박근혜였다.

안철수 새정치연합 중앙위원장이 2일 김한길 민주당 대표와 제3지대 신당 창당 방식의 합당을 선언했다. 이전의 연합과 합당이 그러했듯 올해 지방선거와 2017년 대선에서의 승리를 위한 것이다. 합당이라는 높은 수준의 연합 전술을 전격적으로 구사한 야권은 과연 ‘10년 야당’생활을 청산할 수 있을까? 김태규 기자 dokbul@hani.co.kr

야권발 정계개편 ‘막전막후’ [성한용의 진단 #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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