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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한나라당과 어울리지 않아”가 10여년뒤 “혼과 몸 바쳐”로

등록 2012-07-26 19:03수정 2012-07-29 17:50

재야운동 시절 양심수 석방 집회에서 연설하는 모습.
재야운동 시절 양심수 석방 집회에서 연설하는 모습.
[2012 대선주자 탐구] 김문수
변신 혹은 변절의 삶
외동딸 동주를 품에 안은 부인 설난영씨와 함께.
외동딸 동주를 품에 안은 부인 설난영씨와 함께.
한일도루코 공장에서 일하던 시절 동료들과 산에 올라.
한일도루코 공장에서 일하던 시절 동료들과 산에 올라.
1994년 김영삼 전 대통령과 악수하는 모습.
1994년 김영삼 전 대통령과 악수하는 모습.
김문수가 가는 길엔 이념의 양극단을 오간 점이 늘 꼬리표로 따라붙는다.

좌와 우를 넘나든 그의 행보는 보수 쪽엔 전향과 변신이지만 진보 쪽엔 배신과 변절이다.

“한나라당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옷이다. 사고와 발상, 지향점이 나와 너무 다르다.”(<한겨레21> 1999.12.23) 한나라당 초선 국회의원 김문수가 의정활동 4년을 마감하던 1999년 말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다.

그로부터 십여년이 흐른 뒤 김문수는 자신과 너무 다르다던 당의 대선주자를 노리고 있다. 당의 이름은 새누리당으로 바뀌었지만, 구성 인물이나 정체성이 바뀌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그 당에 대한 김문수의 충성심은 이제 확고한 듯하다. 그는 지난 12일 출마 기자회견에서 “제 혼과 몸을 바쳐서 (경선 승리 후보를)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변신에 능한 그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 ‘반항아’ 기질 드러낸 고교시절

김문수는 1951년 경북 영천군 임고면 황강리에서 아버지 김승헌(1977년 작고)의 4남3녀 가운데 여섯째로 태어났다. 경주 김씨 집성촌인 그의 동네는 1980년대까지 서당이 운영됐을 정도로 유교 전통이 강했다.

유복했던 어린 시절은 초등학교 4학년 때 끝났다. 아버지가 친척의 보증을 섰다가 빚쟁이에게 집을 내주는 바람에 영천 읍내 판자촌으로 이사를 갔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집에서 제대로 돌봐주지 못했지만, 김문수는 영남지역의 명문학교인 경북중학교, 경북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는 고교 시절부터 ‘반항아’의 기질을 드러냈다. 당시 진보적 잡지였던 <사상계>를 헌책방에서 구해 읽고 친구들과 토론했다. 고교 3학년 때인 1969년에는 3선 개헌에 반대하는 경북고생의 거리 시위를 주도했다. 그는 ‘반성하면 봐주겠다’는 선생님들의 설득에도 “교과서에도 3선개헌은 나쁘다고 나와 있는 게 아니냐”며 버텼다. 결국 이 일로 무기정학을 당했지만, 2주만에 징계가 풀려 대학입학 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

고교때 3선 개헌 반대시위 주도
대학시절 빈민촌 삶 보고 충격

1970년 서울대 상대(경영학과)에 입학한 김문수는 전공 수업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 때 강의실로 찾아와 “여러분은 대학에 출세나 하려고 왔는가? 머리 좋아 일류대학에 들어와서 입신양명하는 게 그렇게 중요한가?”라고 일갈한 선배 심재권(현 민주통합당 의원)은 그에게 새로운 빛이었다. 그는 심재권의 권유에 운동권 동아리인 ‘후진국 사회연구회’에 가입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1학년 때 교련반대 시위를 시작으로 각종 시국관련 시위에도 열심이었다.

대학 때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건은 동아리 선배들과 함께 한 서울 용두동의 빈민촌 실태조사였다. 용두동 빈민촌은 청계천 옆 하천부지에 생겨난 판자촌이었다. 그곳의 삶은 영천 판자촌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했다. 이 때 받은 충격으로 그는 본격적인 사회운동에 뛰어든다.

1971년 2학년 여름방학 때 구로공단 미싱공장에서 했던 ‘공활’(공장 활동)은 최초의 노동 경험이었다. 당시 대학생들은 방학때 농촌활동을 대부분 했지만, 그 전해인 1970년 청계천 피복공장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자살에 충격을 받은 뒤 일부가 공장 노동자에게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선배인 김근태의 공활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인 김문수는 그러나 단조롭고 힘든 공장생활에 회의하기도 했다.

■ 혁명가에서 여당의원으로

김문수는 1971년 10월 운동권 대학생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나선 박정희 정권의 위수령 발동으로 첫 제적을 당했다. 제적을 당한 뒤 방황하던 그에게 ‘길’을 가르쳐 준 사람이 당시 서울대 상대 학생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안병직 이었다. 안병직은 그에게 “꼭 대학을 나와야 하는 건 아니야. 공장에서 일을 해도 되고, 그러면서 노동운동이나 혁명을 할 수도 있어”라고 말했다.

노동운동을 통한 혁명의 길을 발견한 김문수는 노동자로서의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그는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과 가족들을 만나 청계노조 간부들에게 일반상식 등을 가르치기도 했으며, 재단사 일을 배웠다. 1974년 복교를 해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을 만드는 데 잠시 관여하기도 했지만, 안병직의 권유로 손을 떼고 다시 공장에 들어갈 준비를 했다. 곧이어 민청학련 사건이 터져 또다시 제적당한 그는 보일러 기술을 익혀 마침내 정식 노동자 생활을 시작했다. 1975년 서울 종로6가에 있던 실내수영장을 거쳐 이듬해 구로공단의 한일공업주식회사(도루코)에 취직했다. 그의 목표는 노동자 힘에 의한 혁명이었으며, 이념은 사회주의였다.

박정희 정권 위수령으로 제적
노동운동 통한 혁명의 길 결심

한일공업의 회사 사람들은 그가 서울대 학생이었으며 데모를 하다 제적당한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 노조 교육선전부장을 맡아 노동자들의 신뢰를 얻은 그는 1978년 노조위원장이 되면서 본격적인 노동운동에 나선다. 이때 구로공단의 세진전자 노조위원장이던 부인 설난영도 만난다. 1980년 2월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끌려가 심한 고문을 받는 바람에 신분이 드러나기도 했지만, 노조원들의 지지로 다시 지부장으로 복귀했다.

한일공업에서 해고당한 그는 서울 봉천동 사거리 부근에서 ‘대학서점’을 경영하기도 했지만, 그의 관심은 노동운동이었다. 원풍모방 노조위원장에서 해고됐던 방용석 등과 함께 1984년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를 만들었다. 이어 1985년 심상정 등과 함께 정치적 노동운동을 위한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을 만든다. 서노련은 개별기업의 노조 결성과 투쟁을 지원하는 한편 <서노련 신문> 발간을 통해 전두환 정권의 폭압정치를 폭로하는 등 본격적인 정치투쟁을 벌였다.

김문수가 서노련 회원을 이끌고 1986년 5월3일 인천에서 열린 신민당의 개헌추진위원회 현판식 투쟁에 적극 참석한 것은 혁명 노선의 충실한 실천이었다. 하지만 격렬한 시위에 놀란 전두환 정권은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다. 김문수는 이 일로 구속돼 1988년 10월까지 2년6개월간 두번째 감옥살이를 했다.

그는 출옥한 뒤 장기표 등과 함께 본격인 노동자정당 결성에 나서 1990년 11월 민중당을 만들었다. 그는 민중당 노동위원장을 맡았다. 민중당이 1992년 14대 총선에서 2%를 얻지못해 해산되는 바람에 그의 제도권 진입 시도는 무산됐다.

총선 패배와 당 해산이라는 충격에 휩싸여 있던 그에게 권인숙이 노동인권회관 운영을 맡겼다. 전두환 정권의 부천서 성고문 피해자였던 권인숙이 국가로부터 받은 보상금으로 만든 노동인권회관은 노동자 상담과 교육사업을 주로 했다.

그러나, 노동인권회관을 운영하던 김문수는 1994년 3월 돌연 민자당에 입당했다. 당시 대통령이자 여당 총재이던 김영삼의 영입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변절자’란 낙인이 찍힐 법한 급작스런 변신이었지만 그는 “민자당이 여당이어서가 아니라 가장 개혁적인 정당이기에 입당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가 입당한 뒤 이재오, 이우재 등 민중당 동지들도 뒤를 따랐다. 김문수는 당시 그가 타도하려 했던 군사독재 정당을 계승한 정당에 입당하게 된 데에는 80년대 중반에 사상전향한 스승 안병직의 조언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1996년 15대 총선에서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에 신한국당(민자당 후신) 후보로 출마해 국민회의 총재 김대중의 최측근이었던 박지원을 꺾고 당선됐다.

■ 중도개혁파에서 우파전사로

15대 국회에서 김문수는 재야 운동권 출신답게 나름대로 개혁적 성향을 유지했다. 1996년 12월 26일 새벽 신한국당의 노동법 날치기에 가담했던 데 대해 그는 이듬해 3월 대정부질문에서 “의회민주주의에 깊은 상처를 남기는 단독처리에 동참한 이후 많은 눈물을 흘렸으며 회한 속에서 우리 국민이 어제의 국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반성문을 썼다. 그는 날치기 파동 뒤 국회의원 뱃지를 한동안 달지 않았다.

1998년 12월 교원노조법 처리 때는 합법화 찬성이라는 소신과 반대를 종용하는 당론 사이에서 고심한 끝에 기권했다. 이듬해인 1999년에는 15만 결식아동 지원을 위한 예산 확보에 앞장서기도 해 ‘김결식’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2000년 16대 총선에서 재선의원이 된 뒤 김문수는 공안검사 출신의 정형근과 함께 ‘디제이(DJ) 저격수’로 활약한다. 이어 2003년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에는 이재오 홍준표와 함께 ‘노무현 저격수’ 3인방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즈음 김문수는 정치적 투사로 변신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정치적 좌표도 오른쪽으로 크게 옮겼다. 그는 2003년 8월 한나라당 의원총회에서 “노동자에게 최대의 복지는 일자리 창출이다. 여가 및 근로조건 개선은 차후의 이야기”라며 주5일 근무제 도입에 반대했다.

“가장 개혁적 정당” 94년 민자당으로
재선뒤 김대중·노무현 저격수 활약

그는 자신이 젊은 시절 맞서 싸웠던 박정희 뿐 아니라 이승만의 정치적 복권운동에도 앞장섰다. 그는 뉴라이트와 조갑제 등 극우파들이 주장하는 이승만, 박정희 동상의 광화문 광장 건립에 찬성하고 있다. 2010년 7월 국립현충원에서 열린 이승만 45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김문수는 “당신은 이 나라 근현대사의 중심에 계시고 우리 역사의 걸출한 지도자임에도 이 나라 곳곳에 그렇게 많은 동상을 세우면서 반만년 역사에 가장 빛나는 대한민국을 세우신 당신의 동상 하나 세우지 못했으며 기념관조차 없다. 우리의 무지와 비겁함을 저부터 깊이 반성한다”고 연설했다.

2008년 건국절 논란 때는 건국이 아니라 정부수립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좌파의 억지”(조갑제 김문수 공저 ‘나는 일류국가에 목마르다’)라고 말했다. 그는 뉴라이트전국연합 등 우파단체의 각종 집회나 모임에도 거의 빠짐없이 참석했다.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때 김문수는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서 촛불시위대에게 경찰이 두드려 맞는 나라에 투자를 하는 바보같은 기업이 있겠나? 법을 준수하지 않으면 결국 투자가 위축되고 일자리가 없어질 뿐이다”며정부에 물대포 사용 등 강경 진압을 촉구했다. 그는 최근 경제민주화에 대해서도 “재벌 때리기로 흐르면 안 된다. 규제를 더 풀어야 한다”며 재벌체제를 옹호하고 있다.

김종철 기자 phillkim@hani.co.kr

▷ 2012 대선주자 탐구 기획연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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