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대선주자 탐구] 박근혜 ①
독재자의 딸
독재자의 딸
“우리 아버지는 독재자였고, 딸로서 침묵한 나도 공범자다. 이제 아버지는 세상에 없으니 내가 그 잘못을 안고 가겠다.”
2004년 8월 이재오 의원이 박근혜 당시 당 대표(이하 호칭 생략)를 비판하며 인용한, `스탈린 딸의 말’이다. 스탈린의 외동딸 스베틀라나는 1967년 ‘적국’이었던 미국에 망명해, 소련과 스탈린,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을 쏟아냈다. 이재오 의원은 스베틀라나에 빗대 박근혜에게 ‘이제는 아버지 박정희를 버리고 진심으로 사과하라’고 요구한 셈이다. 박근혜는 응하지 않았다. 박근혜의 사회생활과 정치활동이 줄곧 아버지 박정희의 명예회복에 초점을 맞춰왔다는 것을 보면, 당연한 반응이다.
박정희 죽음뒤 돌변한 전두환과 3공 사람들
추도식조차 허용 안해
“네 아버지 정치 잘못해손 흔드는 것도 촌스러워” ■ 3공 세력의 배신 전두환 정권은 박정희의 흔적을 지우려고 애를 썼다. 박정희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키려 헌법에서 ‘5·16 혁명정신’을 지웠고, 하나회에 부정적이었던 공화당 실세는 권력형 비리 혐의를 씌워 제거했다. 박정희 시대는 부정, 부패, 비리의 시대로 규정됐다. 유신 말기에 이미 박정희와 정치적으로 경쟁할 지위까지 올랐던 김종필은 물론 정치 생명을 부지하려는 옛 공화당 인사들도 박정희 비판에 나섰다. 박근혜 남매들로선 아연할 일이었다. 박지만은 <여성동아>(1989년 4월호) 인터뷰에서 당시의 참담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육사 시절) 생도대장은 아버님이 돌아가시자 태도가 돌변했다. 생도대장은 ‘박 대통령은 손 흔드는 것부터가 얼마나 촌스러운가. 그런데 전두환 대통령은 얼마나 폼이 멋있는가’ 등등의 이야기로 돌아가신 아버님을 깎아내렸다. 나는 화가 치밀어 얼굴이 붉어졌다. 아버지 주위에서 충성을 바쳤던 사람들과 정치인 중의 일부는 칠면조처럼 변해버렸다. 어쩌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하면 ‘현 대통령(전두환)은 훌륭한데, 네 아버지는 정치를 다 잘못했다’고 내 앞에서 비난을 일삼았다.” 박근혜도 그런 배신감을 일기장에 토로했다. “지금 상냥하고 친절했던 사람이 나중에 보니 이(利)에 기가 막히게 밝은 사람이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덧없는 인간사이다.”(1981년 2월) “자기를 은혜로이 돌보았지만 언제 어떻게 돌변하여 총을 겨눌지, 욕을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 가득한 도시, 또 그러한 사람들이 영웅시되는 사회는 도덕이 바로 설 수가 없다. ”(1981년 3월) 전두환 정권은 박정희에 대한 추도식을 허용하지 않았다. 박근혜 남매가 친지들과 함께 집안 제사로 대신했다. 국립묘지에서 추도식이 열린 것은 1987년이 처음이었다. 박근혜가 느꼈던 배신의 상처는 그의 뼈와 살을 파고들어가 디엔에이(DNA)에 새겨진 듯하다. 박근혜가 정치에 입문한 지 15년이 지났지만, 꾸준히 곁을 지키는 2인자가 없다. 측근이 있다 해도 ‘자기 정치’에 나서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순간, 박근혜와의 관계는 치명적 손상을 입는다.
노태우 정권 들어선 이후
명예회복 외부활동 개시
기념회 만들고…추도식 열고…
영화 찍고…봉사단 조직하고…
여성지에도 단골로 등장 ■ ‘아버지’의 명예회복 12살 때부터 ‘큰 영애’로 10년, 22살 때부터 퍼스트레이디로 5년을 살았던 박근혜는, 27살 때부터 10년가량 공개적인 대외활동을 하지 않았다. ‘은둔’, ‘칩거’ 등의 표현을 쓰기도 하지만, 육영재단과 영남대 등에는 관여했다. 1988년 노태우 정권이 들어선 뒤부터는 박정희를 복권시키기 위한 공개적인 외부 활동을 시작했다. 우선 박정희·육영수 기념사업회를 발족시켰고(1988년), 박정희 사망 10주기 추도 행사를 15만명이 참배하는 대대적인 규모로 치렀다(1989년). 박정희를 미화하는 영화 <조국의 등불>을 제작했고, 박정희의 업적을 담은 <겨레의 지도자>라는 520쪽짜리 책을 내기도 했다(1990년). 그 무렵 굳어가던 ‘독재자 박정희’라는 세간의 평가를 바꾸기 위해 ‘박정희 바로 세우기’ 작업을 진행한 셈이다. 꾸준히 그의 곁을 지킨 최태민과 더불어 육영수를 추모하는 단체 ‘근화봉사단’을 조직(1989년)한 것도 이때다. 박근혜와 최태민이 1976년 만들어 대외활동의 기반으로 삼았던 ‘새마음 봉사단’의 후신이다. 근화봉사단은 한때 전국 회원이 70만명에 이르렀고, 지역 조직도 갖췄다. 근화봉사단의 소식지인 <근화보>는 박정희 정권의 정당성을 설파하는 이론의 기반이 됐다. 박근혜는 근화보 사설을 통해 아버지를 지우려던 전두환 정권을 정면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1979년 11월3일, 고 박정희 대통령의 국장일에는 수많은 국민들이 애도하고 통곡하며 박 대통령을 영결하였다. 그로부터 10년의 세월 동안 동방예의지국이라고 하는 나라에서 국장을 지낸 분에 대한 추도 행사 한번 없었고 매도 일색의 세월을 보내왔다. 과연 그 매도는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가? … 그렇다면 국장은 무엇 때문에 지냈는가.” 같은 시기, 언론을 통한 여론전도 활발히 벌였다. 권력의 정점에서 ‘공주’로 살다가 ‘소녀가장’으로 급전직하한 박근혜의 이야기는 여론의 관심을 끌었고, 특히 각종 여성지는 박근혜의 소식을 단골 소재로 다뤘다. 박근혜는 비정한 현실에 대한 소회를 여과없이 드러냈다. “유신 시절에 책임이 막중한 자리에 앉았던 정치인들 중에는 유신을 죄악시하는 요즘의 풍토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는 그때 반대를 했다. 내가 그때 무슨 힘이 있어 반대를 할 수 있었겠느냐’고 발뺌을 하는 경우가 쉽게 목격되고 있다. 그런 분들에게 저는 자신이 진실로 나쁜 체제라고 생각했다면 왜 그때 그 자리를 물러나지 않았었는가를 묻고 싶다.”(<여성동아> 1989년 1월호) 아버지 박정희의 명예회복을 위한 활동을 통해 박근혜는 무엇을 얻었을까? 1989년 말 그의 일기에선 ‘한풀이’의 허탈감이 묻어난다. “1989년은 … 수년간 맺혔던 한을 풀었다고 표현해도 좋을 한해이다. 아버지에 대한, 그 시절 역사에 대한 왜곡이 85% 정도 벗겨졌다고들 한다. … 오로지 감사하고 기뻐해야 할 내 마음은 사실은 몹시 울적하다. 왜 태어났을까, 태어나지 않았으면 이와 같은 마음의 고통도 없었을 것이 아닌가 등등 꼬리에 꼬리를 무는 침울한 생각들 뿐이다. … 80년대는 다시 돌아다보기도 싫은 소름끼치는 연대라고 느껴지는 것이다.”(1989년 12월30일) 90년대 다시 은둔의 삶 살다가
97년 이회창 선대위 계기로 정치인으로 새 인생 시작
‘아버지의 사람들’과 대척점에서
자민련 대신 신한국당 택해
■ 다시 잠적…그리고 정치인으로
1990년 최태민의 전횡 논란에서 촉발한 육영재단 분란 끝에 이사장직을 내놓은 박근혜는, 다시 공개석상에서 사라진다. “1990년 11월, 그때까지 모든 마음과 정성을 기울여 추진해 왔던 부모님 기념사업 활동을 중단하고, 따라서 별다른 외부 활동 없이 지내온 기간 동안 저는 독서와 사색 그리고 운동 등에 비교적 많은 시간을 보내며 생활해 왔다고 돌이켜집니다.”(1993년 펴낸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 서문)
동생들과의 교류도 끊다시피 했다. 1991~1997년 기간엔 부모의 추도식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박지만의 마약 복용 사건으로 시끄러울 때도 박근령만 모습을 보였다. 동생들과의 볼썽사나운 싸움으로 입길에 올랐던 육영재단 사건이, 박근혜에겐 상당히 큰 충격이었다고들 한다. “다시 살라고 한다면 차라리 죽음을 택할지도 모른다. 지난 세월은 태어났기 때문에, 사명과 의무가 있기 때문에 산 것이다. 태어나서 삶을 누린다는 것에 이런 즐거움도 있구나 하고 느낀 기억이 별로 없다.”(1992년 5월21일 일기)
김영삼 정부 말기 발생한 외환위기는 박정희 시절의 고도성장에 대한 사회적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1997년 대선 후보였던 이인제가 박정희식 머리 모양을 하고 나와 박정희 이미지를 공공연하게 내세울 정도였다. 박근혜가 정치인으로 거듭난 것은 이 시기다. 그는 대선을 일주일 앞두고 이회창 신한국당 후보의 선거대책위원회 고문으로 위촉됐고, 은둔의 세월 18년에 마침표를 찍었다.
당시 박근혜는 사촌 형부이자 박정희의 ‘동지’였던 김종필 대신 신한국당을 택했다. 3공화국 인사들이 많았던 김종필의 자민련엔 외삼촌(육인수)도 있었고, 박정희 비서실장 출신인 박태준도 있었다. 실제 이들의 ‘러브콜’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럼에도 박근혜는 그 대척점에 섰다. 수많은 ‘아버지의 사람들’이 배신하고 신군부를 향했던 시대에 대한 박근혜 나름의 답변이었다. 당시 김종필과 박태준의 “박정희의 업적을 승계하겠다”는 말에, 박근혜는 이렇게 응수했다. “아버님과 국민이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으려고 애쓰시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와 아버님의 업적이 왜곡되었을 때 그 당시 침묵하며 시대에 편승해서 매도했던 사람들의 말은 자신들의 이득을 얻으려고 하는 것일 뿐 믿을 수 없는 말들이다.”
박근혜는 이튿날부터 지원유세에 나서, “1960~70년대 국민이 피땀 흘려 일으킨 나라가 오늘 같은 난국에 처한 것을 보면 돌아가신 아버님이 생각나 목이 멜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이러한 때 정치에 참여해 국가를 위해 기여하는 것이 부모님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한다”고 소리를 높였다. 김외현 기자 oscar@hani.co.kr
▷ 2012 대선주자 탐구 기획연재 보기
<한겨레 인기기사>
■ 제주 올레길 살해범 변태 행각 했었다
■ 검찰, 박지원 체포영장 30일 청구할 듯
■ 아들·딸 성적 위조한 엄마 징역 42년?
■ 이대호, 시즌 16호 투런포 작렬…홈런 단독 선두
■ [화보] 해운대는 물반 사람반
추도식조차 허용 안해
“네 아버지 정치 잘못해손 흔드는 것도 촌스러워” ■ 3공 세력의 배신 전두환 정권은 박정희의 흔적을 지우려고 애를 썼다. 박정희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키려 헌법에서 ‘5·16 혁명정신’을 지웠고, 하나회에 부정적이었던 공화당 실세는 권력형 비리 혐의를 씌워 제거했다. 박정희 시대는 부정, 부패, 비리의 시대로 규정됐다. 유신 말기에 이미 박정희와 정치적으로 경쟁할 지위까지 올랐던 김종필은 물론 정치 생명을 부지하려는 옛 공화당 인사들도 박정희 비판에 나섰다. 박근혜 남매들로선 아연할 일이었다. 박지만은 <여성동아>(1989년 4월호) 인터뷰에서 당시의 참담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육사 시절) 생도대장은 아버님이 돌아가시자 태도가 돌변했다. 생도대장은 ‘박 대통령은 손 흔드는 것부터가 얼마나 촌스러운가. 그런데 전두환 대통령은 얼마나 폼이 멋있는가’ 등등의 이야기로 돌아가신 아버님을 깎아내렸다. 나는 화가 치밀어 얼굴이 붉어졌다. 아버지 주위에서 충성을 바쳤던 사람들과 정치인 중의 일부는 칠면조처럼 변해버렸다. 어쩌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하면 ‘현 대통령(전두환)은 훌륭한데, 네 아버지는 정치를 다 잘못했다’고 내 앞에서 비난을 일삼았다.” 박근혜도 그런 배신감을 일기장에 토로했다. “지금 상냥하고 친절했던 사람이 나중에 보니 이(利)에 기가 막히게 밝은 사람이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덧없는 인간사이다.”(1981년 2월) “자기를 은혜로이 돌보았지만 언제 어떻게 돌변하여 총을 겨눌지, 욕을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 가득한 도시, 또 그러한 사람들이 영웅시되는 사회는 도덕이 바로 설 수가 없다. ”(1981년 3월) 전두환 정권은 박정희에 대한 추도식을 허용하지 않았다. 박근혜 남매가 친지들과 함께 집안 제사로 대신했다. 국립묘지에서 추도식이 열린 것은 1987년이 처음이었다. 박근혜가 느꼈던 배신의 상처는 그의 뼈와 살을 파고들어가 디엔에이(DNA)에 새겨진 듯하다. 박근혜가 정치에 입문한 지 15년이 지났지만, 꾸준히 곁을 지키는 2인자가 없다. 측근이 있다 해도 ‘자기 정치’에 나서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순간, 박근혜와의 관계는 치명적 손상을 입는다.
퍼스트레이디 시절 박근혜 의원이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함께 청와대 잔디밭에 서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명예회복 외부활동 개시
기념회 만들고…추도식 열고…
영화 찍고…봉사단 조직하고…
여성지에도 단골로 등장 ■ ‘아버지’의 명예회복 12살 때부터 ‘큰 영애’로 10년, 22살 때부터 퍼스트레이디로 5년을 살았던 박근혜는, 27살 때부터 10년가량 공개적인 대외활동을 하지 않았다. ‘은둔’, ‘칩거’ 등의 표현을 쓰기도 하지만, 육영재단과 영남대 등에는 관여했다. 1988년 노태우 정권이 들어선 뒤부터는 박정희를 복권시키기 위한 공개적인 외부 활동을 시작했다. 우선 박정희·육영수 기념사업회를 발족시켰고(1988년), 박정희 사망 10주기 추도 행사를 15만명이 참배하는 대대적인 규모로 치렀다(1989년). 박정희를 미화하는 영화 <조국의 등불>을 제작했고, 박정희의 업적을 담은 <겨레의 지도자>라는 520쪽짜리 책을 내기도 했다(1990년). 그 무렵 굳어가던 ‘독재자 박정희’라는 세간의 평가를 바꾸기 위해 ‘박정희 바로 세우기’ 작업을 진행한 셈이다. 꾸준히 그의 곁을 지킨 최태민과 더불어 육영수를 추모하는 단체 ‘근화봉사단’을 조직(1989년)한 것도 이때다. 박근혜와 최태민이 1976년 만들어 대외활동의 기반으로 삼았던 ‘새마음 봉사단’의 후신이다. 근화봉사단은 한때 전국 회원이 70만명에 이르렀고, 지역 조직도 갖췄다. 근화봉사단의 소식지인 <근화보>는 박정희 정권의 정당성을 설파하는 이론의 기반이 됐다. 박근혜는 근화보 사설을 통해 아버지를 지우려던 전두환 정권을 정면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1979년 11월3일, 고 박정희 대통령의 국장일에는 수많은 국민들이 애도하고 통곡하며 박 대통령을 영결하였다. 그로부터 10년의 세월 동안 동방예의지국이라고 하는 나라에서 국장을 지낸 분에 대한 추도 행사 한번 없었고 매도 일색의 세월을 보내왔다. 과연 그 매도는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가? … 그렇다면 국장은 무엇 때문에 지냈는가.” 같은 시기, 언론을 통한 여론전도 활발히 벌였다. 권력의 정점에서 ‘공주’로 살다가 ‘소녀가장’으로 급전직하한 박근혜의 이야기는 여론의 관심을 끌었고, 특히 각종 여성지는 박근혜의 소식을 단골 소재로 다뤘다. 박근혜는 비정한 현실에 대한 소회를 여과없이 드러냈다. “유신 시절에 책임이 막중한 자리에 앉았던 정치인들 중에는 유신을 죄악시하는 요즘의 풍토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는 그때 반대를 했다. 내가 그때 무슨 힘이 있어 반대를 할 수 있었겠느냐’고 발뺌을 하는 경우가 쉽게 목격되고 있다. 그런 분들에게 저는 자신이 진실로 나쁜 체제라고 생각했다면 왜 그때 그 자리를 물러나지 않았었는가를 묻고 싶다.”(<여성동아> 1989년 1월호) 아버지 박정희의 명예회복을 위한 활동을 통해 박근혜는 무엇을 얻었을까? 1989년 말 그의 일기에선 ‘한풀이’의 허탈감이 묻어난다. “1989년은 … 수년간 맺혔던 한을 풀었다고 표현해도 좋을 한해이다. 아버지에 대한, 그 시절 역사에 대한 왜곡이 85% 정도 벗겨졌다고들 한다. … 오로지 감사하고 기뻐해야 할 내 마음은 사실은 몹시 울적하다. 왜 태어났을까, 태어나지 않았으면 이와 같은 마음의 고통도 없었을 것이 아닌가 등등 꼬리에 꼬리를 무는 침울한 생각들 뿐이다. … 80년대는 다시 돌아다보기도 싫은 소름끼치는 연대라고 느껴지는 것이다.”(1989년 12월30일) 90년대 다시 은둔의 삶 살다가
97년 이회창 선대위 계기로 정치인으로 새 인생 시작
‘아버지의 사람들’과 대척점에서
자민련 대신 신한국당 택해
1998년 4월 대구 달성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후보가 지구당 사무실에서 당원들의 축하를 받고 있다. 달성/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 제주 올레길 살해범 변태 행각 했었다
■ 검찰, 박지원 체포영장 30일 청구할 듯
■ 아들·딸 성적 위조한 엄마 징역 42년?
■ 이대호, 시즌 16호 투런포 작렬…홈런 단독 선두
■ [화보] 해운대는 물반 사람반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