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조치 9호
75년 5월13일 기존 1~8호 망라
누구라도 엮어넣을 결정판
박정희 사망까지 4년여간
1389명을 구속시켰다
5·22 시위
관악캠퍼스로 이전한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
1천여명이 모여들었다
김근태·박원순도 현장에
7인 위원회
서울·중앙·고려·연세·외대 7명
전국 학생조직 만들려 회합
명동성당 지하에서
긴급히 영세를 받았다
박정희는 1974년 1월부터 79년 10월 정권이 종언을 고할 때까지 아홉번이나 긴급조치(긴조)를 발동했다. 이는 국민의 기본적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시키는 극단적인 ‘국가긴급권’ 남용 행위였다.
그해 1월8일 유신정권은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막고자 긴조 1·2호를 발동했고, 4월3일에는 대학생들의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결성 시도와 ‘민중·민족·민주선언’(삼민선언) 발표와 시위에 대응해 긴조 4호로 대량 검거에 나섰다.
이어 8월15일 문세광에 의한 대통령 암살 미수와 부인 육영수 사망사건 직후인 8월23일 긴조 5호를 발동하는 동시에 긴조 1·4호를 해제했다. 그러나 민주회복국민회의를 비롯한 재야와 언론계·문인·학생들이 계속 개헌운동을 전개하자 유신정권은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 실시로 대응했다. 75년 2월12일 국민투표는 긴급조치하에서 찬반토론도 못한 채 치러졌고, 결과는 그들이 의도한 대로(투표율 79.9%, 찬성률 73%)였다.
국민투표 결과에 고무된 유신정권은 2월15일 긴조 위반 구속자들을 석방하는 등 유화조처를 취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관련 학생들의 복학과 교수들의 복직을 봉쇄했다. 이에 전국에 걸친 학생 시위가 확산되어 고려대에서 4월7·8일 독재정권 퇴진과 유신헌법 철폐를 요구하는 격렬한 시위가 일어나자 4월8일 저녁 7시를 기해 긴조 7호를 발동해 고려대에 휴교령을 내리는 한편 군인을 진주시켰다.
이어 4월30일 베트남이 패망하자, 박 정권은 관제 안보궐기대회를 여는 등 전쟁 분위기를 조성하며 5월13일 긴조 7호를 해제하는 긴조 8호와,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행위를 금지하는 긴조 9호를 발동했다. 긴조 9호는 기존의 긴조 내용들을 종합편성한 결정판이었다. 권력이 마음먹기만 하면 누구라도 엮어 넣을 수 있는 무소불위의 법이었다. 김명식·양성우의 필화사건, <현대문학>의 ‘미친새’ 필화사건, 리영희·백낙청의 필화사건,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 크리스찬아카데미 사건 등 지식인 사건이 모두 긴조 9호 위반을 빌미로 일어났던 것이 이를 말해준다.
이제 긴조는 ‘긴급한 조치’가 아니라 일상적인 조치가 됐다. 실제로 긴조 9호는 4년6개월 동안 유지되었다. 한국정치범동지회의 조사를 보면, 긴조 9호로 구속된 인사는 1389명, 긴조 9호 관련 판결은 1289건으로, 피해자 수만 974명에 이르렀다.
79년 10월26일 박정희가 사망할 때까지 긴조 9호가 유지된 도합 6년 가까운 기간을 일컬어 훗날 ‘긴급조치 시대’(긴조시대)라고 불렸다.
1974년 긴급조치 첫 발동 이후 주요 대학가는 반유신독재 학생 시위를 막기 위한 휴교와 개강의 되풀이로 사실상 거의 학사 진행이 어려웠다. 고려대에는 75년 6월25일 ‘긴조 9호’에 따라 전경들이 진입해 강당을 포위했다.
■ 5·22 서울대 시위 사건
75년 2월 서울대는 관악캠퍼스로 이전했다. 동숭동·공릉등 등에 흩어져 있던 캠퍼스가 합쳐지고 대학의 통폐합과 조정도 이루어졌다. 그때까지 이 나라 학생운동의 중심이었던 서울대 문리대는 인문·사회·자연과학대로 분리·해체되었다. 이 때문에 캠퍼스 이전이 반정부 학생 시위의 본산이었던 서울대를 관악산 산골짜기로 유폐시키려는 목적이라는 얘기도 나돌았다.
이제 학생운동의 공간적 중심은 동숭동이 아닌 관악캠퍼스 본부 건물과 중앙도서관 사이에 있는 넓은 빈터, 1980년 ‘서울의 봄’ 때 1만여명이 모여 유명해진 아크로폴리스 광장이 된다. 아크로폴리스라는 이름은 <대학신문>에 실린 ‘여기가 관악의 아크로폴리스’라는 가십 기사 이후 그대로 정착되었다. 학생 시위의 규모와 양상도 달라졌다. 동숭동 시절 몇백명이 모이던 집회 양상은 이제 1000명, 2000명이 쉽게 동원되는 형태로 바뀌었다. 이에 맞서 서울대 앞에는 동양 최대의 파출소가 들어섰다.
75년 3월28일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동아일보> 사태를 풍자한 ‘진동아굿’이 민속가면극연구회·문학회·연극회 공동주최로 열렸다. 긴조 4호 발동 1돌이 되는 4월3일에 관악 이전 뒤 첫 시위가 발진한 곳도 여기였다.
긴조 9호라는 강력한 탄압도 학생들의 민주화투쟁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그해 5월22일 이른바 ‘오둘둘(5·22) 시위’로 불리는 서울대생들의 데모는 긴조 9호 선포 이후 전개된 첫 시위였다. 문리대의 민속가면극연구회·연극회·문학회 등 긴조 9호 이후 학생운동에 전투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한 문화 동아리들과 사범대 야학문제연구회, 71년 위수령으로 제적됐다가 복학한 학생들이 김상진을 추모하기 위한 시위를 준비해 나갔다.
긴조 9호가 발동된 5월13일, 서울대에서는 시위 추진을 결정하는 모임이 열렸다. 이날 모임에 이영창(문리대 문학회), 박연호(야학문제연구회) 등 시위를 이끌 현역 대학생들과 김근태·유영표·이호웅·유상덕·채광석·채만수 등 68·69학번 그룹 대표들이 참석했다. 이 모임에서는 긴조가 발동된 상황에서 신중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지만, “김상진 열사의 죽음을 같은 대학에 적을 둔 우리가 헛되이 할 수 없다”, 더 나아가서는 “죽은 사람도 있는데 감옥 가는 게 무슨 대수입니까” 하는 목소리에 눌렸다.
5월15일 관악캠퍼스가 다시 문을 열었다. 4월8일 휴강에 들어간 지 37일 만이었다. 개강과 더불어 시위 준비도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마이크와 스피커, 추도사 등 문건과 유인물은 현역들이 담당하기로 했다. 복학생들은 ‘거사’ 당일 강의가 끝나기 10분 전 대형 강의실 뒷자리에 앉아 앞자리로 쪽지를 돌리기로 했다. “12시 중앙도서관 앞 김상진 열사 장례집회 있음.”
마침내 5월22일 쪽지를 준비한 복학생 그룹이 대형 강의실에 분산배치되었고, 강의가 끝날 무렵 사대생 그룹이 강의실에 유인물을 뿌렸다. 정오 무렵 각 건물에서 요란한 경보음이 울렸다. 복학생 그룹이 계단 중간에 위치한 화재 비상벨을 누른 것이다. 학생들은 영문을 모른 채 웅성거리며 건물을 빠져나왔다.
바로 그때 아크로폴리스 광장의 중앙계단 앞으로 김도연과 박연호가 “의로운 죽음, 암장이 웬말이냐”라는 펼침막을 펴들고 나서자 꽹과리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졌다. 아크로폴리스 광장은 갑자기 몰려든 학생과 기관원들의 난투장으로 변했다. 김도연이 겨우 장례 선언문을 낭독했고, 김정환이 조시를, 박연호가 반독재 선언문을 읽었다.
그 사이 아크로폴리스에는 1000여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시위대로 변했고, 교문을 향해 나아갔다. 학생들은 ‘애국가’ ‘정의가’ ‘선구자’ 등의 노래를 부르며 500여명이 스크럼을 짜고 나갔으나 출동한 경찰기동대에 의해 해산당했다. 경찰은 강의실까지 난입해 유인물을 가진 학생들을 무조건 구타·연행했다.(<70년대 캠퍼스Ⅰ>, 신동호)
유신정권은 긴조 9호라는 강력한 억압조처에도 불구하고 시위가 발생하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한심석 서울대 총장이 물러났고, 치안본부장과 서울남부경찰서장이 경질됐다. 서울대 연극회·가면극회·문학회 등의 주요 회원과 사대의 주도 인물 등 300여명이 연행되었으며, 이 가운데 56명이 구속되고 24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김도연·박연호·천희상 등 ‘오둘둘’ 현장 지도부 3명은 2년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대부분 형기를 채운 뒤 풀려났다. 유영표는 계속 도피중이었다. 나는 그때 김지하의 어머니 정금성님으로부터 급히 피신처를 구해달라는 전갈을 받고 우선 급한 대로 이화여대 김윤수 교수를 소개했다. 김 교수는 뒷날 유영표를 범인은닉한 죄와 함께 김지하의 양심선언문을 보관한 것 때문에 고역을 치렀다. 또 나는 쫓기는 김근태를 인왕산 자락 시민아파트에 숨기고, 신동수는 신현봉 신부를 따라 원주로 피신시켰다.
이밖에도 오둘둘 사건은 많은 일화를 남겼다. 사회계열 1학년이었던 박원순은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밖이 시끄럽자 책과 가방을 그대로 둔 채 뛰쳐나와 시위에 동참했다. 그는 도서관에 돌아오지 못한 채 영등포구치소에 수감되었다가 석달 뒤 기소유예로 풀려났지만 학교에서는 제적당했다. 박원순을 오늘에 이르도록 한 운명의 사건이 아닐 수 없다.
1979년 12월8일 ‘긴급조치 9호’ 해제와 구속자 석방 소식을 전하고 있는 당시 보도. 같은 해 10월26일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면서 비롯된 ‘긴조 9호’의 해제는 유신독재의 종막이었다.
■ 천주교정의구현 전국학생총연맹 사건
75년 4월부터 뜻있는 일부 학생들은 흩어진 조직을 한데 묶어 전국적인 학생운동기구를 조직하고자 회합을 거듭했다. 이른바 ‘7인 위원회’로 불리는 이 모임에는 서울대의 심지연·박홍석, 중앙대의 이명준, 고려대의 한경남·조성우, 연세대의 김용석, 한국외대의 선경식이 참여했다. 이들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종교계의 보호가 필요하다고 인식하고 천주교와 관계를 맺었다. 명동성당을 거점으로 삼아 활동했다.
학생들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명동성당의 이기정 신부도 인혁당 사건과 같은 사태를 맞지 않으려면 종교적 보호막을 갖출 필요가 있다고 권유했다고 한다. 7인 위원회 구성원들은 명동성당 지하에서 긴급히 영세를 받았고 이후 세례명을 암호로 썼다. 이명준은 이미 신자로 클레멘스라는 세례명을 갖고 있었고, 심지연은 요한, 박홍석은 베드로, 한경남은 스테파노, 김용석은 세바스찬, 선경식은 요셉, 조성우는 바오로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김상진의 할복을 목도하고 그의 양심선언을 읽은 이들은 4월18일 명동성당에서 가톨릭학생지도신부단 주관으로 열린 기도회에서 ‘민주회복을 열망하는 학생들’이라는 이름으로 ‘조국의 앞날을 위한 제1시국선언’을 발표했다.
7인 위원회는 유신헌법 철폐, 긴조 9호 철회, 학도호국단 해체 등을 목적으로 하는 대학간의 조직적인 연대투쟁을 모색했다. 그들은 서울대의 ‘오둘둘 시위’에 크게 고무되었다. 이들은 고려대 5월28일 또는 29일, 연세대 6월2·3일, 한국외대 6월4·5일 순으로 후속 시위를 준비했다. 이들은 전국 18개 대학을 연결하기로 하고, 연맹 결성을 위한 준비작업에 들어가 ‘발기문’, ‘선언문’ 등을 제작했다. 5월27일 ‘반독재 투쟁 선언문’, 김상진의 죽음에 대한 조사·조시 등 유인물 500부를 제작했다. 또 서강대·경희대 등 서울시내 남은 대학과 강원대의 최열, 경북대의 여석동을 비롯해 부산과 전남대 등 지방대와도 채널을 확보해 나가고 있었다.(<한국민주화운동사 2>)
그러나 이들의 활동은 이미 수사당국에 포착되고 있었다. 5월27일 연세대의 김용석을 시작으로 6월3일 대부분 검거되었다. 이 사건과 관련해 구속된 23명의 학생들은 유신헌법과 긴조 자체를 부정하므로 유신 법정에서는 결코 재판받지 않겠다고 주장했다.
75년 11월10일 오전 서울형사지법 대법정은 아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건번호 75 고합 654 대통령 긴조 9호 등 위반사건’. 이들은 재판 거부라는 법정투쟁으로 유신헌법과 긴조 9호, 그리고 당시 법정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다.
재판 거부 의사는 조성우와 최열이 밝혔고, 미리 감옥에서 의견을 맞춘 학생들은 검사의 회유와 재판장의 설득에도 재판에 응하지 않았다.
선고공판은 75년 12월2일에 열렸다. 이때도 피고와 방청석 학생들의 재판 거부와 애국가 합창 등으로 재판 분위기는 말이 아니었다. 결국 이들은 한사람씩 따로 불려가 구형과 선고를 받았다. 재판장은 재판장 나름대로 절차에 따라 재판을 진행했고, 피고인들은 피고인 나름대로 재판을 거부한 셈이다. 이들은 항소도 거부했다.
이 사건을 맡았던 심훈종 판사는 조준희 변호사의 친구로 유신헌법과 긴조 9호를 두고 사법 판단을 내리는 것에 대해 무척 괴로워했다고 한다. 이들의 재판 거부가 심 판사의 심경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이 사건 이후 1년 남짓 만에 스스로 법복을 벗었다.
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수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