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정치 정치일반

김한림 선생 3대의 수난사

등록 2011-12-12 20:36수정 2011-12-14 15:23

1972년 경남 마산 시절 친구네 집에서 함께한 김한림 선생과 둘째딸 김윤. 김윤이 본격적인 반유신 학생운동에 투신하기 전인 서강대 영문학과 2학년 때다.
1972년 경남 마산 시절 친구네 집에서 함께한 김한림 선생과 둘째딸 김윤. 김윤이 본격적인 반유신 학생운동에 투신하기 전인 서강대 영문학과 2학년 때다.
그때 그 사람
부친 3·1독립만세운동 고문후유증 33살에 작고
민청학련 홍일점 둘째딸도 고문후유증으로 운명
김한림 선생은 1946년 시인이자 수필가인 김소운(81년 작고) 선생과 결혼해 2녀1남을 뒀다. 25년 가까운 교단생활에서 은퇴한 그가 환갑의 나이에 민주화투쟁의 현장에 뛰어드는 계기가 됐던 둘째딸 김윤은 ‘민청학련의 홍일점’이었다.

서강대 영문학과 4학년 때인 74년 3월 학내 시위를 주동해 구속·제적된 김윤은 다시 민청학련 사건과 연루돼 가장 먼저 구속됐다가 75년 2월17일 풀려났다. 그때 서대문구치소에서는 지학순 주교, 김찬국 교수, 강신옥 변호사, 서울대생 이철 그리고 유일한 여학생인 그가 마지막으로 나왔다. 그때 김윤은 머리를 한 갈래로 땋아내리고 연분홍 저고리에 빨간 치마를 입고 있었다. 그 옷은 김지하 시인과 이현배의 어머니들이 장만해준 것이었다.

김윤은 어려서 심장판막증을 앓아 1년이면 40일씩 학교에 결석할 만큼 병약했다. 대학 동창이자 절친이었던 장영희(2009년 작고) 교수는 생전에 <샘터>에 기고한 글에서 “심장이 약했던 윤이와 나는 입학 때 나란히 신체검사에 불합격해 몇 번의 재검을 받으며 친해졌고 대학 1학년 내내 함께 다녔다”며 “걸핏하면 휴교령이 내려지고 탱크가 학교 정문을 지키고 있던 시절, 그는 우리 시대의 잔다르크처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기 시작했고, 중앙정보부에 요주의 인물로 찍혀 걸핏하면 체포되어 옥살이를 했다”고 추억했다.

76년 이른바 지하신문 <자유서강> 사건으로 또다시 1년간 옥살이를 한 뒤 김윤은 79년 한국앰네스티위원회 간사를 맡아 80년 광주민중항쟁 배후로 지명수배되기도 했다. 무혐의로 수배해제된 그는 81년 5월 가톨릭농민회 활동을 하던 강기종(전 전국농민회총연맹 사무총장)과 결혼해 전북 익산시 여산면에서 농민운동에 투신했다. 순창군 팔덕면 용두촌, 완주군 구이면 평촌, 정읍시 정우면 등을 거쳐 88년부터는 정읍 태인에서 농민을 위한 무료 도서관인 ‘샘골 책마을’을 운영했다. 전북민주여성회 농민분과장으로 전북 여성농민 조직화에 앞장선 데 이어 전국여성농민회 준비위원장을 맡았다.

1975년 2월17일 민청학련 관련자 중에서 맨 마지막으로 서울 서대문구치소에서 풀려나는 김윤. 구속자가족협의회 어머니들이 손수 지어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나와 세간의 화제가 됐다. 
 사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1975년 2월17일 민청학련 관련자 중에서 맨 마지막으로 서울 서대문구치소에서 풀려나는 김윤. 구속자가족협의회 어머니들이 손수 지어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나와 세간의 화제가 됐다. 사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어머니 김한림 선생도 86년부터 김윤이 사는 시골마을로 내려와 살며 손녀를 돌보고 샘골 책마을 간사를 맡았다. 그 보답으로 91년 3월 전북여성농민회 준비위원회는 김 선생에게 감사패를 전하기도 했다. “여성농민 만세, 김한림 어머님, 거치른 바람 안고/ 박토에 씨를 넣고/ 지심매며 거름주어/ 새 세상을 키우는/ 땅의 사람 여성농민/ 그 갈쿠리 손 따뜻이 잡아/ 새 세상을 만들라고 북돋아 주신/ 어머니들의 어머니!/ 그 깊은 마음을 간직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김 선생이 생전에 받은 유일한 상이었다.

그러나 그 무렵부터 모녀는 병마와 싸워야 했다. 일찍이 67년 자궁암 3기에서 기적처럼 완치됐던 김 선생은 92년 위암 말기 진단을 받고 1년6개월 만인 이듬해 8월 79년간의 생을 마쳤다. 90년말 인공판막 수술을 한 김윤은 한동안 요양한 뒤 92년 외동딸(하니)이 다니던 거창 샛별초등학교 등에서 보조교사로 일하다 97년말 뇌일혈로 또다시 쓰러졌다. 고문 후유증이라고 했다. 전신마비의 고통 속에서도 “방송통신대에서 법학을 공부해 사법시험에 합격하면 장애인들을 돕겠다”는 꿈을 키우던 그는 2004년 2월 전주 평화동 자택에서 쉰한 살로 운명했다. 주기철 목사의 은사였던 김 선생의 부친(김인식)도 3·1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했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나이 서른셋에 세상을 떠났으니 3대에 걸친 수난사인 셈이다.

그 가계와 생애사를 살아생전에 정리하지 못한 것이 못내 한스러울 뿐이다.

정리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정치 많이 보는 기사

‘부정선거 전도사’ 황교안, 윤 대리인으로 헌재서 또 ‘형상기억종이’ 1.

‘부정선거 전도사’ 황교안, 윤 대리인으로 헌재서 또 ‘형상기억종이’

선관위 “선거망 처음부터 외부와 분리” 국정원 전 차장 주장 반박 2.

선관위 “선거망 처음부터 외부와 분리” 국정원 전 차장 주장 반박

오세훈, ‘명태균 특검법’ 수사대상 거론되자 ‘검찰 수사’ 재촉 3.

오세훈, ‘명태균 특검법’ 수사대상 거론되자 ‘검찰 수사’ 재촉

이재명 “국힘, 어떻게 하면 야당 헐뜯을까 생각밖에 없어” 4.

이재명 “국힘, 어떻게 하면 야당 헐뜯을까 생각밖에 없어”

이재명, 내일 김경수 만난다…김부겸·임종석도 곧 만날 듯 5.

이재명, 내일 김경수 만난다…김부겸·임종석도 곧 만날 듯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