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정치 정치일반

“진실을 쓸 수 있는 곳은 이곳뿐”
감시 피해 스스로 정신병원으로

등록 2011-11-07 20:23

1998년 서울대 법대에서 열린 최 교수 25주기 추모식에서 동료교수였던 이수성 당시 민주평통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을 대표로 ‘최종길 교수를 추모하는 모임’이 구성됐다. 왼쪽 둘째부터 최광준·이수성·최종선씨.(왼쪽 사진) 그해 마석 모란공원 추도식에서 광준씨의 아들 최유성(7살 무렵)군이 ‘할아버지가 술을 좋아하셨다’는 얘기를 듣고 직접 잔을 올리고 있다. 초등학교 때 할아버지의 고문사 사실을 알게 된 유성군은 지인의 할머니가 노환으로 별세했다는 얘기에 “행복하게 돌아가셨네요”라고 말하기도 했다.(오른쪽)
1998년 서울대 법대에서 열린 최 교수 25주기 추모식에서 동료교수였던 이수성 당시 민주평통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을 대표로 ‘최종길 교수를 추모하는 모임’이 구성됐다. 왼쪽 둘째부터 최광준·이수성·최종선씨.(왼쪽 사진) 그해 마석 모란공원 추도식에서 광준씨의 아들 최유성(7살 무렵)군이 ‘할아버지가 술을 좋아하셨다’는 얘기를 듣고 직접 잔을 올리고 있다. 초등학교 때 할아버지의 고문사 사실을 알게 된 유성군은 지인의 할머니가 노환으로 별세했다는 얘기에 “행복하게 돌아가셨네요”라고 말하기도 했다.(오른쪽)
그때 그 사람 ‘형의 죽음’ 양심수기 쓴 최종선씨
“1973년 10월26일 서울 신촌의 세브란스병원 정신병동.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한 최적의 장소로 이곳을 선택했다. 지금의 나에게 있어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후일을 위해 형님의 죽음에 대한 오늘의 한을 생생히 남겨두는 것이다. 나는 그들이 형님에게 반역자의 누명을 씌워 대대적으로 보도한 어제 저녁, 쇼크를 가장하여 이곳에 들어온 것이다. 그들의 감시 범위 속에 남아 그들을 안심시키면서, 내가 뜻하는 글을 제한받지 않고 쓸 수 있는 곳은 이곳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아침 레지던트 과정 중에 있는 친구들을 병실로 불러 그들로부터 펜과 노트를 받아 이 글을 쓰는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완전히, 조속히 쓰고 난 후에야 이곳을 떠날 것이다. 이 글은 우리 가족 또는 고인의 동료 교수, 제자들에게 다른 위해가 가해질 경우 공개될 것으로 나의 최후의 글이 될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 글은 진실 이외 아무 가식도 없는 나의 유언인 것이다.”

최종선에게 둘째형 최종길은 우상이었다. 그들 4남2녀 형제자매의 우애는 요즈음 세상에서 찾아보기 힘들 만큼 돈독했지만, 특히 막내인 종선의 둘째형에 대한 존경과 신뢰는 유별났다. 그에게는 최 교수가 그야말로 가문의 영광이자 긍지였다. 그런 형의 죽음이 종선에게 준 충격은 너무도 컸다. 거기다 자신의 손으로 형님을 죽음으로 이끌었다는 죄책감, 자신의 직장인 중앙정보부에 대한 배신감, 형의 죽음을 은폐 조작하는 그들에게 어처구니없이 끌려다닌 굴욕감이 그를 더없이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때 그는 이대로는 무슨 일이든 저지를지 모르는 불안한 정신상태였다.

스스로 정신병동에 입원한 그는 10월13일부터 10월25일까지, 최 교수의 죽음과 관련해서 자신과 중앙정보부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수기 형식의 기록으로 정리한다. 얼마나 흐느끼며, 얼마나 분노를 삭이며 썼을까. 그는 이 수기를 쓰고 11월12일 퇴원해 81년까지 형을 고문치사시킨 그 중정에 7년 반을 더 근무한다. 그 세월은 또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나와 최 교수 가족이 맺은 인연은 꽤 오래되었다. 88년 수기 공개를 하고자 처음 만났던 최종선은 대단한 의협남아였다. 그렇게 당차게 진상을 밝히기 위해 노력했던 그는 파란곡절 끝에 지금 한국 국적을 버리고 미국에서 살고 있고, 그 바통을 이어받은 아들 최광준 교수는 돌아가신 아버지 몫까지 학문 활동을 왕성하게 하고 있다. 나는 생전에 최종길 교수를 직접 만나본 적은 없지만, 최종선·최광준과 함께 그 의문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과 신원을 위해 조그마한 힘이나마 보탰던 것을 더없는 보람으로 생각한다.

인터넷을 통해 <한겨레> 기사를 본 최종선이 며칠 전 버지니아에서 이런 이메일을 보내왔다. “우연히 차기 대선후보에 대한 설문조사를 보니 ‘안철수·박근혜’ 두 분이 유력하다더군요. … 그런데 정말 궁금한 게 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형, 우리의 최종길 교수가 돌아가시던 날, 또 우리의 영원한 광복군 장준하 선생님이 약사봉 계곡 아래 던져지던 그날, 그 한 분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을까, 저는 정말 그게 궁금합니다.”

정리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정치 많이 보는 기사

‘부정선거 전도사’ 황교안, 윤 대리인으로 헌재서 또 ‘형상기억종이’ 1.

‘부정선거 전도사’ 황교안, 윤 대리인으로 헌재서 또 ‘형상기억종이’

선관위 “선거망 처음부터 외부와 분리” 국정원 전 차장 주장 반박 2.

선관위 “선거망 처음부터 외부와 분리” 국정원 전 차장 주장 반박

오세훈, ‘명태균 특검법’ 수사대상 거론되자 ‘검찰 수사’ 재촉 3.

오세훈, ‘명태균 특검법’ 수사대상 거론되자 ‘검찰 수사’ 재촉

이재명 “국힘, 어떻게 하면 야당 헐뜯을까 생각밖에 없어” 4.

이재명 “국힘, 어떻게 하면 야당 헐뜯을까 생각밖에 없어”

이재명, 내일 김경수 만난다…김부겸·임종석도 곧 만날 듯 5.

이재명, 내일 김경수 만난다…김부겸·임종석도 곧 만날 듯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