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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사각지대 아이들’ 줄섰는데…예산깎인 공부방

등록 2009-02-23 19:28수정 2009-02-26 16:13

인천 남동구 ㅇ지역아동센터에서 23일 오후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다. 지난해 국회에서 공부방 예산이 동결되면서 전국의 공부방이 운영난에 허덕이고 있다.   인천/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인천 남동구 ㅇ지역아동센터에서 23일 오후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다. 지난해 국회에서 공부방 예산이 동결되면서 전국의 공부방이 운영난에 허덕이고 있다. 인천/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이명박 정부 1년 평가] 살림살이 나아졌나 ②
지역아동센터 통해 본 복지정책
집 있다고 지원 배제된 가정 넘치지만
정원 초과로 오랜기간 대기하기 일쑤
방과후 봐줄 사람 없어 가족해체 위기

“선생님, 선생님, 지금 이 닦을까요?” 지난 20일 저녁, 밥을 먹고 난 민정(8·가명)이가 공부방 선생님에게 물었다. “그래.” 대답이 떨어지자, 아이는 환한 웃음을 머금고 쏜살같이 사라진다.

민정이는 오빠 민호(11·가명)와 함께 인천 남동구 ㅇ지역아동센터에 다닌다. 이혼한 아버지와 사는데, 자잘한 관심과 칭찬을 받고 싶어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남매는 지난해 12월 이 공부방에 왔다. 인천 남동공단에서 일하는 아버지 정아무개(44)씨는 두 아이를 기르기가 힘들어 보육원에라도 보내려다가, 이곳을 알게 됐다.

정씨는 기계설비를 납품하고 점검·수리 등을 해 주는 공장에 다닌다. 여섯 남매의 넷째로 태어나 홀어머니 밑에서 중학교만 졸업했다. 형들과 함께 ‘노가다’로 사회에 뛰어들어 11년 전 공단에 흘러들어왔다. 첫 월급은 80만원이었고, 지금은 다달이 160만원을 받는다. 일감이 많아 잔업이라도 하면 20만~30만원을 더 쥐지만, 올해는 공장이 망하거나 기본급이 밀리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여긴다.

가장 큰 고민은 어린 두 남매라고 했다. 2007년 말 이혼한 뒤로는 아이들이 아파도, 밥을 굶어도 돌볼 사람이 없다. 출장이 잦아 일년이면 석 달은 집을 비워야 하는 처지라, 늘 발을 구른다. 초등학교 4학년인 민호는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증후군)로 정서가 불안하다. 초등학교 1학년인 민정이는 제 앞가림을 기대하기엔 어리다.

지역아동센터 월운영비 예산증액 추진 실패 과정
지역아동센터 월운영비 예산증액 추진 실패 과정
정씨 가족이 정부로부터 받을 수 있는 지원은 거의 없었다. 집도 있고, 직장도 있기 때문이다. 경기 파주시에 아파트가 하나 있는데, 대출금 4600만원을 안고 9600만원에 분양받았다. 하지만 이혼하면서 6천만원에 전세로 내줬고, 위자료로 3천만원을 준 뒤 남은 3천만원으로 인천에 방 두 칸 전세를 얻었다. 실제 가진 것이라곤, 일할 몸뚱어리와 2천만원 재산뿐인 셈이다. 정씨는 “아프기라도 하면 끝장이란 생각이 덜컥 들어서, 급하게 보험을 들었다”고 불안감을 털어놨다.

기초생활 수급자도, 차상위 계층도 될 수 없는 정씨는 지난해 다달이 50만원 안팎 적자를 내며 허덕였다. 은행 대출이자만 한 달에 20여만원이 나가고, 민호 병원비·약값도 5만~40만원씩 뭉텅뭉텅 들었다. 급하게 집을 비울 때 파출부나 이웃에 아이들을 맡기려니 다달이 30만원은 써야 했다.


정씨는 “내 형제들은 못 배워 다들 날일이나 하면서 형편없이 산다”고 했다. 그래서 더욱더 아이들만큼은 잘 가르쳐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기를 바라는 소망이 절절하다. 아이들이 학교를 마치고 거리를 떠돌며 게임이나 할까봐 학원에도 보내봤다. 하지만 정서 장애를 앓는 아들은 공부를 따라잡을 형편이 못 되는 것 같다. 그는 “너무 힘들고 속상해서, 아들한테 같이 죽자고 칼을 들이댄 적도 있다”며 “저소득층 아이 돌보미나 이런저런 복지 혜택을 받을 길을 찾아봤는데 우리 같은 이들을 도와줄 데는 없었다”고 말했다.

생활고 속에서 극심한 양육 불안으로 고통받던 정씨네가 안정을 되찾은 건, 공부방에 아이들을 맡기면서부터다. 두 달 전 동네 주민센터를 찾은 그는 “아이들을 보육원에 보내게 해 달라”고 하소연했다. 가족이 흩어질 것을 각오한 뒤였다. 주민센터에선 공부방을 소개해 줬고, 덕분에 밤 9시까지는 근심을 덜게 된 것이다. 공부방에선 아이들 저녁밥을 챙겨 주고, 숙제나 일상 생활을 돌봐 준다. 학부모를 대신해 학교 쪽과 상담하며 교내 생활도 보살펴 준다.

처음엔 공부방 선생님한테 “왜 태어났는지 모르겠다”고 울먹이던 민호는, 지금은 “병이 있어서 잘못할 때가 많지만 얘기해 주면 고치겠다”고 또박또박 말한다. 정씨는 “바로잡아 보겠다고 아들을 모질게 때리기만 했는데, 후회가 된다”며 가슴을 쓸었다.

이처럼 작은 도움의 손길만 닿으면 가정 해체 위기를 모면할 수 있는 ‘사각지대 아이들’이 지난해 하반기 이후 경제위기가 심화하면서 더욱 많이 공부방으로 몰려들고 있다. 이 공부방에도 예년엔 문의가 한 달에 1~2건 수준이었는데, 요즘은 일주일에 1~2건 정도로 급속히 늘고 있다. 하지만 정부의 지원은 이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이 공부방의 센터장은 “정원 19명보다 훨씬 많은 25명이 다니는데, 민호와 민정이는 사정이 너무 딱해 받아줬다”며 “요즘은 찾아와 대기자 명단에라도 올려 달라고 호소하는데도 들어주지 못하니 안타까울 뿐”이라고 말했다.

인천/정세라 기자 sera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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